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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익환 묘
장익환(1866 - 1937)은 1896년 3월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에 들어가 단양방면의 수비책임자로 임명되어 단양 일대에서 군사를 소모(召募)하고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05년 원용팔(元容八)이 의병을 일으키자, 포군 조직까지 갖추고 있던 향약 조직을 이용하여 적극 가담하여 좌군장을 맡기도 하였다. 원용팔이 체포된 후, 정운경(鄭雲慶)이 봉기하자 참여하여 반강제로 심상훈을 의진에 끌어들이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907년 7월 이강년(李康秊)이 봉기하였을 때에도 좌종사로서 적극 협조하였으며, 국채 보상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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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식 묘
장충식 묘는 충청북도 단양군에 위치해있다. 묘소를 찾아가다보면 효열각에서 두 갈래 갈림길이 나오는데 아랫쪽 갈림길을 직진해서 가면 묘소가 있다. 장충식과 장익환은 부자 관계로 근처에 묘가 위치해있다. 장충식(1836 - 1901)은 1896년 2월 3일 강원도 영월에서 유인석(柳麟錫)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 참가하여 의병 대장소(義兵大將所)를 설치하고 600여 명의 유생으로 진용을 갖출 때 사객(司客)으로 임명되었다. 의진에서는 복수보형(復讐保形)의 큰 깃발을 걸어 놓고 밀정 4명을 처단하는 등 활약하였다. 한편 의병진에서는 8도에 격문을 발하고 청풍·평창·안양·원주·풍기·영월 등지에서 왜군과 전투하였으며 제천성 공략에서 패전하여 해진될 때까지 활동하다 후일을 기약하고 은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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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칠 공적비
이승칠(1850 - 1912)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두경(斗卿). 충청북도 보은 출신으로 경주영장(慶州營將) 이지현(李之鉉)의 아들이다. 원래 공적비의 비명은 의사였지만 지금은 지사로 바뀌었다. 1910년 사헌부(司憲府) 감찰직(監察織)에 재직 중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 순국하려 하였으나 가족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1912년 일본왕이 사망하자 일제는 한국인들도 상복을 착용할 것을 강요함에 이를 거부하고 1912년 6월 26일 망국의 한을 품은 채 "몸이 원수의 복을 입는다면 만대의 수치이다. 이 머리가 떨어지더라도 오랑캐는 될 수 없다(身被讐服萬代羞恥 寧爲殞首 不作夷狄)"라는 유서를 남기고 보은군 내북면(內北面) 봉황대(鳳凰台)에서 투신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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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훈 송적비
윤정훈(1881 - 1921)은 1919년 4월 8일 무명산(無名山)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 주도하였다.그는 1919년 2월 하순, 평소부터 친면이 두터운 손병희(孫秉熙)로부터 거사 밀령을 받고 독립선언문을 입수하여 이용기(李龍基)·최용문(崔容門)·안만순(安萬淳)·이흥하(李興夏) 등을 규합하여 거사를 계획하고,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4월 8일, 보은군내 각 면별로 즉, 내북면(內北面)은 산성리(山城里) 노고성, 외북면(外北面)은 관모봉(冠帽峰)에, 속리산(俗離山)은 문장대(文章臺)에 각각 거사 지정장소를 정하여, 일제히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4월 8일 무명산(일명, 갓빈데산)에서 같은 마을 사람 윤홍훈(尹洪勳)등 많은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해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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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창문 묘
석창문(1886 - 1908)의 이명은 석성국이며,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속리산 중에 의진이 형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생업을 버리고 한봉수(韓鳳洙)의 참모장이 되었다. 출전할 때마다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일병들이 그를 사로잡으려 하였으나 출입할 때마다 병기로 무장하고 있어서 어찌할 수 없었다. 1908년 5월 의병장 한봉수·김규환(金奎煥)과 함께 약 40명을 인솔하고 청주 산외일면 초정동(椒井洞)에서 일인기병 2명이 우편물을 호위하고 오는 것을 확인하고 좌우의 산기슭에 매복하였다가 이들이 오는 것을 기다려 석창문이 선두의 일본병을 저격하여 사살하고 접전 중 나머지 일인이 퇴각하자 우편물과 현금 2,000여 원을 탈취하여 군자금에 썼다. 그해 봄에 석창문이 적정을 탐색하기 위하여 홀로 의진을 떠나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렀을 때 적 수십 명에게 창졸지간에 포위되었다. 대적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틈을 보아 도주하였으나 적의 추격을 받아 주머니칼을 꺼내 들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체포당하였다. 적이 그를 심문하여 의진의 근거지를 알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석창문은 혀를 깨물며 자백하지 않았다. 적이 보은군으로 그를 끌어내려서 살해하였다. 일설에는 스스로 신랑(腎囊)을 끊어 자결하였다고 전하기도 하는데 순국 당시 그의 나이 24세에 불과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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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헌 강도유허비
송은헌(1877 - 1946)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경식(敬植), 호는 강와(剛窩)로 보은 강신에서 태어났으며 보통 송면헌(宋勉憲)이라 불린다. 유인석(柳麟錫) 의진에 군자금을 지원하고, 1919년 항일문구의 제문으로 일제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을미사변의 변보(變報)를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여 복수보형(復讐保形)의 4자를 머리맡에 걸어 두고 그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마침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그 분노는 폭발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의 의병은 유생이 주체가 되었으므로 그 사상적 배경도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이념으로 하고 존왕적(尊王的)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 중에도 유인석 의진은 가장 전투적 성격을 띠고 활발하게 의병항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유인석 의진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지원하기로 하고, 유인석 의병진에 3백 냥의 군자금을 제공한 이후 수십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그 후 1910년 주권이 상실되자 유인석 의병장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려 하였지만, 스승 어윤적이 때가 좋지 않다고 극구 만류함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유인석 의병장을 기리는 항일문구의 제문으로 일제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지만, "오늘날 옥중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홀로 작은 충성을 바치며 웁니다"라는 옥중시를 짓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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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석, 어경선 추모비
어윤석(1846 - 1898)은 아들 어경선(魚敬善)과 함께 1896년에 유인석(柳麟錫)이 이끈 제천의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화서학파의 학문적 특징인 춘추대의적 존화양이 사상에 철저히 경도되어 있었던 인물이다. 그리하여 의병활동 중에 남긴 글에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성재 유중교 세 분 선생님의 문하들이 일생을 통해 강설(講說)한 것은 서학을 배척하고 왜적에 대해 복수하는 것 뿐이다. (중략) 나라를 사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의거에 누가 창의(倡義)하지 않으며, 원수를 갚고 형세를 보존하는 일에 누가 거사하지 않겠는가. 오늘의 일을 차마 어찌 말로 다하랴. 일을 하는데 우리는 죽지 않으면 그만이고, 죽는다 해도 대의를 펴서 천하를 구하기 위해 죽으니 죽을 명분을 찾은 것이다”라고 하여 강렬한 항일투쟁 의지를 드러내었다. 그 후 유인석이 휘하 의병을 이끌고 황해도·평안도 등 양서지방을 거쳐 재기를 위해 서간도로 망명할 때 아들 어경선과 함께 동행하여 갖은 고초를 겪었다. 서간도에서 돌아온 직후인 1898년에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어경선(1869 0 1816)은 1896년 아버지와 함께 유인석(柳麟錫)의 제천의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하지만 의진 내의 직책이나 구체적 활동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후 유인석 의병이 황해도·평안도 등 양서지방을 거쳐 재기를 위해 잔여세력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할 때 부친과 함께 동행하였으며, 1898년에 유인석이 다시 서간도로 망명할 때에도 또한 함께 망명하여 갖은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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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경선 묘
어경선(1869 0 1816)은 1896년 아버지와 함께 유인석(柳麟錫)의 제천의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하지만 의진 내의 직책이나 구체적 활동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후 유인석 의병이 황해도·평안도 등 양서지방을 거쳐 재기를 위해 잔여세력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할 때 부친과 함께 동행하였으며, 1898년에 유인석이 다시 서간도로 망명할 때에도 또한 함께 망명하여 갖은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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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산3.1운동만세시위지 안내석
보은군 길상마을 유래비에 삼봉산 3.1운동 만세시위지에 대한 사연이 적혀있다. 이창선(李昌善)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고, 이인하(李寅夏)·김용섭(金用燮)·이준영(李準永)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오후 8시경 김용섭은 마을 가운데에서 풍물을 두드려 소리를 내어 주민을 집합시키고, 이인하·이준영은 마을 가운데에서 주민 수십명을 집합시킨 후 구인리와 길상리 뒷산인 삼봉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창선(1895 - 1961)은 3·1독립운동을 발의하여 이인하(李寅夏)·김용섭(金用燮)·이준영(李準永) 등과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징을 치며 마을주민 수십명을 모아 구인리 및 길상리(吉祥里)의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주동자로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5월 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았고 6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인하(1894 - 1980)은 1919년 4월 11일 이창선(李昌善)을 중심으로 김용섭(金用燮)·이준영(李準永) 등과 같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켰다. 같은 해 5월 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7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용섭(1894 - 1965)은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독립만세를 고창하명서 함께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같은해 5월 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다시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준영(1889 - 1939)은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이인하(李寅夏)·김용섭(金用燮) 등과 같이 마을 주민들을 규합,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7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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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기 의열비
이용기(1880 - 1942)는 충북 보은(報恩) 사람으로 1919년 4월 8일 보은군 내북면(內北面) 산성리(山城里)에서 구열조(具悅祖)·윤정훈(尹鼎勳)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이날 밤 산성리 언덕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독립만세의 취지를 역설하고 20여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4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당하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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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교도와 농민이 합세해 일으킨 사회개혁운동이다. 보은은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1893년 1월 장내리(현 장안면)에 동학교단의 총본부인 대도소를 설치한 곳이다. 같은 해 3월에는 전국의 동학도를 규합한 보은취회가 열렸다. 최대 3만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회에서 그들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즉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다라는 정치적 기치를 올렸다. 동학농민혁명의 불씨였다. 1894년 일본이 경복궁을 기습 점거하자 동학농민군은 전국에서 일어났다. 충청, 경기, 강원, 경상도의 동학농민군이 보은으로 집결했고 곧 전봉준의 호남 농민군과 합세했다. 그러나 이들은 우금치전투에서 밀려나 해산되었고, 전라도를 거쳐 북상하던 혁명군은 보은 북실마을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으로 무참히 학살당한다. 동학농민혁명군 최후의 항전이었다고 한다. 그렇기때문에 보은은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고 종결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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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동학최후7인 학살 매장지
동학군들은 구 속리산석재 뒤 둥글레봉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동학군들이 이곳에 있다는 첩보를 접한 일본군은 장안 구인리에 주둔하며 동학군을 치기 위해 밤 10시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해월 최시형 등 동학군 지도자들은 김소천가와 지막골(금학동)에 막사를 지어놓고 지내고 있었다. 밤 10시 30분이 되자 일본군은 구인리에서 오창→누청→강신→성족→종곡리로 쳐들어갔고 동학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총소리에 놀란 동학군들은 마을 밖으로 달아났지만 일본군을 추격해 요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산으로 올라간 동학군들이 반격하며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동학군은 새벽까지 몇 번을 역습하는 전투를 계속했고 18일 오전에는 종곡부근 고지를 점령하며 일본군에 맞섰다. 일본군에 절대 밀리지 않으며 일본군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러나 동학군이 보유하고 있던 총알이 모두 떨어지고 힘도 부쳤다. 동학군의 제1선이 취약해져 급기야 저지선이 무너졌고, 동학군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총알이 떨어진 동학군들은 몰살되고 말았다. 사망자가 2천 600여명에 달했으며 그 때가 12월 18일 오후 3시였다. 살아남은 동학군들은 퇴로를 찾아 수철령을 넘고 북암리 터골을 거쳐 괴산, 강원도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북암리 부내실로도 10명이 숨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말을 타고 말티재를 넘어 북암리로 뒤쫓아온 일본군은 민가를 샅샅이 수색해 동학도를 색출했다. 여기서 꼬리를 밟힌 7명은 현장에서 죽고 3명은 부내실 주민들이 하인이라고 둘러대는 등 신분을 감춰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7명의 시체는 부내실 주민들이 집단매장을 했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2017년 부내실 주민들의 증언을 채록, 확인한 것이다. 6월 3일에는 집단매장지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넋을 위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