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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석조 묘
경석조(1881 - 1957)은 충북 괴산 연풍(延豊) 사람이다. 1914년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하다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 1919년에는 대동단(大同團) 충북 지단에서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길림성(吉林省) 북간도(北間島) 용정촌(龍井村)에서 고사연구회(古事硏究會)를 조직하고 절대독립(絶對獨立)을 외치며 항일활동에 주력하였다. 1929년에는 한족연합회를 결성하여 중앙 총무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기밀부장에 피선되었다. 1944년에는 중국국민당에 입당하여 재만동포의 생명과 재산보호에 힘을 다하였다. 광복 후 1949년 2월에는 반민특위(反民特委) 충북책임자로 피선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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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석조 공적비
경석조(1881 - 1957)은 충북 괴산 연풍(延豊) 사람이다. 1914년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하다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 1919년에는 대동단(大同團) 충북 지단에서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길림성(吉林省) 북간도(北間島) 용정촌(龍井村)에서 고사연구회(古事硏究會)를 조직하고 절대독립(絶對獨立)을 외치며 항일활동에 주력하였다. 1929년에는 한족연합회를 결성하여 중앙 총무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기밀부장에 피선되었다. 1944년에는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여 재만동포의 생명과 재산보호에 힘을 다하였다. 광복 후 1949년 2월에는 반민특위(反民特委) 충북책임자로 피선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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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3.1운동 7인열사비
괴산3.1운동7인열사의 비는 충북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 신촌마을입구에 위치해있다. 일제에 항거하기 위하여 1919년 4월 만세운동을 일으킨 이 고장 출신 김의현·김의대·박영래·정해문·양신집·지민수·김일곤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비이다. 김의현(1880 - 1947)은 당시 장연면의 서당 교사로, 1919년 3월 3일 광무황제의 인산일에 참례하기 위하여 제자인 박영래와 함께 상경하여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시위를 목격하였다. 귀향 후 김의대(1892 - 1925), 김일곤(1880 - 1946), 정해문(1882 - 1947), 지민수, 양신집(1882 - 1948)과 함께 거사를 협의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수백 장을 몰래 준비하였다. 거사일자를 4월 1일로 결정하고 각 동리의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박영래로 하여금 준비된 태극기와 선언문을 각 동리에 전달하게 하였다. 4월 1일 오가리 소재 면사무소 앞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시위군중들과 함께 면사무소를 파괴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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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강면 기적비
신강면(1896 - 1951)은 충청북도 괴산(槐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30일 김수백(金壽伯)·이태갑(李泰甲)·장성원(張聖源)과 함께 청안면(淸安面) 읍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장터에 모인 시위군중 3천여명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주동자들이 청안 경찰주재소로 연행되자, 그는 선두에 서서 격분한 시위군중을 이끌고 주재소로 달려가 투석으로 대항하며 연금자 석방운동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군중들은 해산되었으며, 그는 주모자로 체포되어 그해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곳의 시위는 일경의 발포 이후에도 김수백·장성원·함재원(咸在源)이 주동이 되어 군중 200여명과 함께 부근의 우편소를 습격하였으며, 특히 청안면 독립만세운동은 3천명 이상 참가하였고, 사망자 6명, 부상자 2명을 발생케 하는 등 매우 격렬한 시위운동이었다. 충주에서 급파된 일본 경찰의 무력적 탄압으로 이곳의 시위는 겨우 중단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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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 만세운동유적비
청안 만세운동유적비는 충북 괴산군 청안면 청안면사무소앞에 위치해있다. 청안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주민들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유적비.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가던 중인 3월 중순부터 청안에서도 만세시위가 계획되고 있었다. 청안의 이태갑, 김수백, 신강면 등은 3월 30일 오후 3시 반경, 청안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 모인 2,000여 군중을 선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군중들은 우편소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경찰은 주도자를 체포하여 청안경찰서 주재소로 연행하자 격부한 시위군중들은 주재소로 몰려가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일제 경찰은 충주에서 급파된 수비대와 함께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90년 1월 1일 괴산군에서는 3·1독립운동을 일으킨 청안 면민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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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주재소터
청안주재소는 1919년 3월 30일 청안장터 만세시위 중 주도자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장터에 있던 군중이 몰려가 시위한 곳이다. 청안면에 살고 있던 이태갑·김수백·신강면·장성원·함재원·박내명 등은 3월 30일 청안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당일 오후 3시 반경, 청안 시장에 모인 약 3,000여 명의 군중들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하였고, 군중들은 이에 호응하여 시위에 동참하였다. 그러자 경찰이 출동하여 주도자들을 청안 경찰관 주재소로 연행해 갔다. 이에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로 달려가 체포된 애국지사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시위군중은 주재소 뒷문 근처의 우물에 쌓아 놓은 돌을 떼어 내어 던지고, 몇몇 사람들은 주재소 안으로 진입하여 항의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제 경찰은 충주에서 급파된 수비대와 함께 야만스런 무차별 발포를 감행하였다. 결국 일제의 발포로 홍봉운·노도원·이찬의·연병봉·우현우·연병룡 등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날 시위로 김수백·장성원·함재원은 각각 징역 3년, 이태갑·박순옥·신강면은 각각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이들의 공을 기려 장성원·이태갑·신강면·함재원·김수백에게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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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원 묘
장성원(1897 - 1956)은 충청북도 괴산(槐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30일 김수백(金壽伯)·이태갑(李泰甲)·박내명(朴來明)·신강면(辛康勉)·함재원(咸在源)과 함께 청안면(淸安面) 읍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오후 2시경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시위를 진행하며,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였고 우편소를 순식간에 파괴하였다. 이때 그는 김수백·함재원과 함께 군중 약 200명과 함께 다시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우편소를 습격하고, 군중을 지휘하여 우물에 쌓아 올린 돌을 군중에게 건네주어 투석케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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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기 공적비
정운기(1875 - 1943)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을 도모하던 중 1913년에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璋烈)·한 훈(韓焄)·강순필(姜順必)·정진화(鄭鎭華) 등과 함께 풍기(豊基)에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을 결성하였다. 풍기광복단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에 실천방략을 두고 독립운동을 폈다. 그리하여 1914년에 박창빈(朴昌彬)으로부터 권총 10정을 제공받아 박영효(朴泳孝) 등을 암살하려던 김재성(金在性)에게 교부했었는데, 사전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징역 5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15년에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박상진(朴尙鎭) 등과 통합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게 되자, 이에 참여·활동했다. 국내민족운동이 전반적으로 봉쇄되던 무렵인 1910년대 국내의 독립군 단체로 결성된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滿洲)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한다는 구도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선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해 갔는데, 이때 정운기는 자산가 명단을 작성하는 외에 군자금 모집에 필요한 경고문을 발송하면서 군자금 수합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1918년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이에 연루되어 붙잡혔으나 1919년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면소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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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재 충의비
김용재(1900 - 1928)은 평북 희천(熙川) 사람이다. 조국의 독립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1920년대 중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서간도 망명 후 1923년 8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에 가입하여 군사교육을 받으면서 독립군의 자질을 배양하던 그는 참의부의 군기 확충과 재정을 위해 국내에 거점을 두고 군자금을 모집 송달하라는 명령을 받고 국내로 파견되었다. 국내로 잠입한 그는 어릴적부터 거주하며 활동하던 소백산중에 거점을 정하고 동지 김찬섭(金燦涉)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였으며, 단양·영월·영주지역은 물론 충청도·강원도·경상도 등을 출입하면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여 일경들의 체포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김현구(金顯九)가 일경에 붙잡혀 악형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거처를 자백함에 따라 그의 근거지는 발각되었다. 이에 따라 1928년 9월경 일경 100여 명이 4부대로 나누어 소백산을 포위하고 그를 체포하기 위한 수색작업을 전개해 옴에 따라 소백산 형제봉 밑에 은신하던 그는 동지 1명과 함께 일경을 상대로 총을 쏘며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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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식, 장익환 기념비
장충식(1836 - 1901)은 1896년 2월 3일 강원도 영월에서 유인석(柳麟錫)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 참가하여 의병 대장소(義兵大將所)를 설치하고 600여명의 유생으로 진용을 갖출 때 사객(司客)으로 임명되었다. 의진에서는 복수보형(復讐保形)의 큰 깃발을 걸어놓고 밀정 4명을 처단하는 등 활약하였다. 한편 의병진에서는 8도에 격문을 발하고 청풍·평창·안양·원주·풍기·영월 등지에서 왜군과 전투하였으며 제천성 공략에서 패전하여 해진될 때까지 활동하다 후일을 기약하고 은신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장익환(1866 - 1937)은 1896년 3월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에 들어가 단양방면의 수비책임자로 임명되어 단양 일대에서 군사를 소모(召募)하고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1905년 원용팔(元容八)이 의병을 일으키자, 포군 조직까지 갖추고 있던 향약 조직을 이용하여 적극 가담하여 좌군장을 맡기도 하였다. 원용팔이 체포된 후, 정운경(鄭雲慶)이 봉기하자 참여하여 반강제로 심상훈을 의진에 끌어들이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907년 7월 이강년(李康秊)이 봉기하였을 때에도 좌종사로서 적극 협조하였으며, 국채 보상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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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유사 간행지 표지석
용담유사는 천도교경전으로 이곳 단양군 샘골(南泉洞)은 천도교 제1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선생이 지은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처음으로 간행한 뜻깊은 곳이다. 제2세 교조 신사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은 수운 선생의 명교에 따라 경전(經典)을 간행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채 18년간을 미루어 오다가 1880년에 인제군 갑둔리에서 동경대전 간행을 마치고 1881년 단양군 장정리에 은신하시던 최시형은 이해 5월 이곳 샘골 여규덕(呂圭德)의 집에 간행소를 설치하여 6월 드디어 수백권의 용담유사를 간행하게 되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해월신사의 거룩한 덕업을 기리기 위하여 해월신사 순도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용담유사를 간행한 이곳에 표지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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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리 마을 자랑비
이강년(1858 - 1908)은 1895년 을미사변이 나자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감찰사 김석중 등 3인을 죽이고 유인석 휘하에 편입 유격장으로 다수 왜병을 도처 습격 도살했고 익년 유인석과 같이 도만 삼년간 있다가 귀국하였다. 1906년에는 왜인들이 고종을 위협해서 양위하라는 소문을 듣고 익년 삼월 영춘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각지로 횡행하면서 왜인을 만나는 곳마다 습격 도살하였고 강원도 의병대장 민긍호와 경기도 의병대장 허위와 상호연락하면서 왜병 대부대와 여러번 싸워 기세를 올렸으나 1908년 2월 가평에서 경성 주둔 왜병에게 체포되어 무한 곤욕에도 굴하지 않고 사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의병전투지 백자리마을 자랑비는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에 위치해있다. 영춘면 일대 의병전투지는 1907년 이강년 의병부대가 영춘면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하였던 곳이다. 그 역사적인 흔적을 백자리 마을 자랑비에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