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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27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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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형 묘
김재형(1890-1966)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기독교인이다. 당시 매일신보 판매업을 하고 있었으며, 1919년 3월 1일 국장(國葬)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을 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직접 보고 귀향하여 본인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은밀하게 거사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강내면(江內面)에서 매일 산 위에서 봉화를 올리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어 거사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서울의 박동완 민족대표로부터 수령하여 감추어 두었던 독립선언문 500여 매 중 연기군(燕岐郡) 조치원(鳥致院)에 사는 김재석에게 350여 매를 주어, 문의면(文義面), 미원면(米院面), 보은읍(報恩邑) 등지에 나누어주게 하였다. 또 나머지 150매는 50매씩 봉투에 넣어 강내면에 살고 있는 조동식, 김봉회, 박준평 등에게 각각 나누어주어 각지에 배부하도록 하여, 인근 주민의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6월 7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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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충혼비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애국지사 충혼비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됨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 독립을 위해 몸 바쳐 투쟁한 애국지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58년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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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식 집
조동식(1873-1949)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월 23일부터 3일간에 걸쳐 밤마다 강내면(江內面) 대성리(臺城里)에 있는 대성산상(?)에서 부락민 수십 명과 함께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사기를 올렸다. 첫날인 23일에는 면내의 18개 부락과 인접한 강외(江外), 옥산(玉山), 남이면(南二面) 등지에서도 호응하여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제는 청주와 조치원 등지의 경찰과 헌병, 수비대까지 동원시켜 시위행렬을 제지하고 총기를 휘두르며 여러 사람을 잡아 연행하여 새벽 1시경에야 시위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튿날인 24일과 26일에도 횃불시위는 계속되어 충남 연기군(燕岐郡) 동면(東面) 응암리(應岩里)에서 이에 호응하였고, 27일에도 동면의 예양리(禮養里)에서 횃불시위가 전개되었으며, 4월 1일에는 청주, 오창, 강의, 부용면에서 횃불시위가 벌어지고, 또한 북일, 북이, 강내, 오산면에서도 일어남으로써 도합 8개 면, 즉 청주군의 서북쪽 태반이 모두 불바다와 만세 소리로 진동케 되었다. 또한 조동식은 3월 25일 김재형이 보낸 사람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을 고취시키는 비밀 격문 약 50매를 받아서 허영대로 하여금 화정리(華亭里) 일대에 배포시키는 등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그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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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식 묘
조동식(1873-1949)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월 23일부터 3일간에 걸쳐 밤마다 강내면(江內面) 대성리(臺城里)에 있는 대성산상(?)에서 부락민 수십 명과 함께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사기를 올렸다. 첫날인 23일에는 면내의 18개 부락과 인접한 강외(江外), 옥산(玉山), 남이면(南二面) 등지에서도 호응하여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제는 청주와 조치원 등지의 경찰과 헌병, 수비대까지 동원시켜 시위행렬을 제지하고 총기를 휘두르며 여러 사람을 잡아 연행하여 새벽 1시경에야 시위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튿날인 24일과 26일에도 횃불시위는 계속되어 충남 연기군(燕岐郡) 동면(東面) 응암리(應岩里)에서 이에 호응하였고, 27일에도 동면의 예양리(禮養里)에서 횃불시위가 전개되었으며, 4월 1일에는 청주, 오창, 강의, 부용면에서 횃불시위가 벌어지고, 또한 북일, 북이, 강내, 오산면에서도 일어남으로써 도합 8개 면, 즉 청주군의 서북쪽 태반이 모두 불바다와 만세 소리로 진동케 되었다. 또한 조동식은 3월 25일 김재형이 보낸 사람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을 고취시키는 비밀 격문 약 50매를 받아서 허영대로 하여금 화정리(華亭里) 일대에 배포시키는 등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그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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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동상
신채호(1880-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단재(丹齋)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1]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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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 공적비
연병호(1894-1963)는 충청북도 괴산(현 증평) 사람으로, 1919년 4월에 서울에서 이병철과 협의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조용주, 안재홍, 김홍식, 김연우, 김태규, 이의경, 조소앙 등이 합류하여 역할을 맡았다. 그중 연병호는 조용주와 함께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창립된 최초의 단체로, 임시정부에 대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통신하여 주는 것,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 그리고 선전활동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경상북도 도 경찰은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애국부인회와 연계하여 서울에 본부, 각 지방에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때 연병호도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상해로 탈출한 그는 1921년 4월 한인대동(韓人大同)을 목적으로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世界韓人同盟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 김현구, 조소앙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수습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로의 의견이 부합되지 않자, 조소앙, 김용철, 조완, 이기룡 등과 함께 탈퇴하였다.1929년 말에는 안창호, 이동녕, 김구, 엄항섭, 이시영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연계하여 조국광복운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2월에는 윤기섭과 함께 재남경(在南京) 한국혁명당 대표로서 재만(在滿)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홍면희, 김원식 등과 회합하고 독립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양 단체를 통합하여 새로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였다. 1935년 1월 재남경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집행위원이던 연병호는 정무(政務)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어, 의열단(義烈團)을 다시 통합하여 1935년 7월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그는 또한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 무렵에 독립공론(獨立公論)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그는 일제 앞잡이인 이갑녕(李甲寧)의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총영사관의 경찰의 추적을 받아 1937년 1월 7일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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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마을 표지석(덕촌리)
덕촌리 독립운동가 마을은 독립운동가 정순만 선생의 고향 마을인 덕촌리에 선생의 독립운동사와 충북·청주의 독립운동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조성된 마을이다.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위원회 주관 기념사업 공모에 선정되어 청주시의 1호 마을 아카이브 사업으로 조성되었다. 독립운동가 마을 표지석, 태극기 거리, 애국의 길, 정순만 선생 기념관, 3.1운동 만세 광장 등 다양한 콘텐츠로 꾸며져 있다. 정순만 선생은 상동청년회에서 을사조약 반대투쟁을 주도하다 실패하고 일제에 대한 실효성 있는 투쟁을 위해서는 국민의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 것이 최선책이라 결의하고 고향 덕촌으로 낙향하였다. 이 때 하동 정씨 문중에게 발의하여 설립한 것이 덕신학교이다. 덕신학교는 농민을 대상으로 교육 계몽 및 생활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구한말 민족적 자각이 증대하고 근대 의식이 성장할 즈음에 경제력을 가진 지방 유지 및 선각자들은 민족교육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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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신학교
덕신학교는 청주 옥산면 덕촌리를 중심으로 당시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하동 정씨 가문에서 독립협회와 상동청년회 간부로 활동하던 정순만 선생을 중심으로 1906년 5월 15일 설립한 학교이다. 초대 이사장은 초대 이사장 정재봉이었다. 개교 당시 당시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사립학교 중 하나였으며 1909년 8월 정식 인가를 받았고 1911년에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하였다. 한편, 덕신학교는 2016년 독립운동가마을이 조성되면서 그 안에 복원된 형태의 건물로 세워졌다. 덕신학교에는 정순만 선생의 일대기와 청주 항일 독립운동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덕신학교 뒤편에는 조선시대 설립된 문절 영당이 있고, 문절 영당은 1769년에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 3등으로 책록 되고 하원군에 봉해진 문절공 좌찬성 정수충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영당 내부는 개방되지 않으며 외부에서만 둘러볼 수 있다. 또한 주민들이 만세 횃불 시위를 벌였던 응봉산이 뒷산에 있고 1km 길이의 애국의 길과 횃불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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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만 추모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산13-1 독립운동가마을 표지석 맞은편에 애국지사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덕촌리 독립운동가마을 표지석 앞에는 덕신학교옆 재실 앞에 있던 안내판과 추가로 만든 것이 서 있었다. 이 비는 정순만 선생과, 선생의 아들이 되는 정양필 선생, 그리고 정양필 선생의 부인이자 정순만 선생의 며느리가 되는 이화숙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세 분 모두 건국훈장을 수훈한 유공자이며, 이에 따라 이 곳은 독립운동가 마을로써 추모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독립운동가 정순만, 정순만 선생은 충북 청원 사람으로 1873년 옥산면 덕촌리에서 출생했다. 국내외에서 온 생애를 대한민국독립운동에 바쳤고, 상동교회에서는 간부로서 을사늑약 결사반대 상소운동을 주도하였다. 귀향후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육사업을 전개하며 집안 어른들을 설득 종재를 내어 덕신학교 설립을 발의 하였다. 1906년 국내에서 독립운동 한계를 절감 1906년 북간도로 망명 후 용정에서 이상설과 함께 최초의 신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이요 중국 조선족 교육사의 서막인 서전서숙을 설립 후 운영했다. 연해주(러시아 블라디보스코)로 옮겨 해조신문을 창간하였고 한인 사회 지도자로 활동하며 안중근 의사 의거 때에는 계획을 주도하였고, 안의사 구명 운동등 독립운동가로 격렬히 활약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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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정씨 부사직공파 세천비
충북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는 한말 국권회복 운동과 만주 및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정순만 선생이 태어나신 곳이다.마을 입구에 있는 하동정씨 세천비와 충렬문, 정확한 위치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20-4다.정순만 선생은 충북 청원(淸原) 사람이다. 1896년 3월에 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 창립에 참여하였다.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도총무부장으로 활약하다가 이승만(李承晩)·유근(柳瑾)·나철(羅喆)·안창호(安昌浩)·남궁억(南宮檍)·양기탁(梁起鐸) 등 367명과 함께 붙잡혔다.1902년부터 1904년 사이에 이승만(李承晩)·박용만(朴容萬) 등과 삼만(三萬)으로 결의하여 의형제를 맺고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간도(間島) 용정(龍井)에서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여준(呂準) 등과 함께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민족교육과 독립사상을 주입시켰다. 또한 독립군(獨立軍) 양성 등에 주력하였다. 1907년에는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해아(海牙) 밀사의 여비 1만 8천원을 교포로부터 모금하여 전달하였다.1909년에는 러일전쟁(露日戰爭) 및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전후하여 이범윤(李範允)·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박은식(朴殷植)·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노령(露領)에서 활약하였다. 1910년 연해주(沿海州) 지역에서 〈해조신문(海朝新聞)〉·〈대동공보(大東共報)〉 등을 발간하였다. 또한 13도 의군부(義軍府)·성명회(聲明會)·권업회(勸業會) 등을 창설하여 민족계몽 및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1년 6월 21일에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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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운 공적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장동리 319 마을회관 광장 애국지사 윤병운 선생 공적비를 찾았다. 마을회관 앞 광장, 장동 노인회 건물 앞에 세워져 있다. 해당 공적비는 윤병운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선생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다. 선생이 2018년 광복절 애국장을 수훈한 이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추진됐으며 파평 윤씨 장동문중 종친회 일동이 건립하였다. 윤병운 선생은 서울의 사립 성남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2년 4월 학우 박원배(朴源培)·박병양(朴秉陽)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진당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독서회 형태의 모임을 꾸려 한국역사를 공부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으로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또한 과거의 3.1운동과 같은 거국적인 대규모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며,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저격 등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2월에서 이듬해인 1943년 1월 사이에 윤병운을 비롯해 박원배와 박병양 등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내내 여러 차례 취조와 고문을 당하였으며, 9월 15일 부로 성남중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하였다. 같은 해 12월 18일 대전지방법원(大田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단기 2년, 장기 4년을 선고받았다. 인천소년형무소(仁川少年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4년 4월 11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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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운 집
윤병운 선생의 공훈록에 있는 생가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장동리 393번지를 찾았지만 주민에게 물으니 이곳이 아니라고 한다. 주민들이 알려주신 곳을 와보니 생가 표지석이 서 있다. 이 곳의 주소는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장동리 378이다. 서울의 사립 성남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2년 4월 학우 박원배(朴源培)·박병양(朴秉陽)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진당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독서회 형태의 모임을 꾸려 한국역사를 공부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으로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또한 과거의 3.1운동과 같은 거국적인 대규모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며,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저격 등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2월에서 이듬해인 1943년 1월 사이에 윤병운을 비롯해 박원배와 박병양 등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내내 여러 차례 취조와 고문을 당하였으며, 9월 15일 부로 성남중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하였다. 같은 해 12월 18일 대전지방법원(大田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단기 2년, 장기 4년을 선고받았다. 인천소년형무소(仁川少年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4년 4월 11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