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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초등학교 독립운동기념비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내수초등학교 독립운동기념비는 1919년 4월 2일 내수초등학교(보통학교) 교사 및 학생들이 참여한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1919년 4월 2일 정오 무렵, 교사 및 85명의 학생들은 한말 의병장 출신인 한봉수 선생의 지휘에 따라 세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3.1운동의 정신을 표출하였다. 이후, 투철한 독립정신을 배양하고 상급학교로 진학한 내수초등학교 출신들의 독립운동은 각지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1930년 1월에 전개된 청주 학생들의 연합시위는 청주고보에 진학한 이인찬 등의 내수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한편 1931년 6월 14일, 내수초등학교 교정에 독립만세라고 쓴 격문이 부착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제는 이를 구실로 평소 요주의 인물로 감시하던 5학년 담임 홍봉희 선생을 사직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일제히 동맹휴학을 벌여, 일제의 민족차별과 식민지 교육에 대항하였다. 본 비는 내수초등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이러한 숭고한 독립운동 위업을 기념하고 후세에 전하고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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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 집
한봉수(1883-1972)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근무하다가 1907년 조선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그해 음력 8월에 의병장 김규환 의진에 가담하여 일본군의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였다. 1907년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병진을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라 칭하였다. 이후 강원으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고, 의병장 조운식(趙雲植)과 적과 맞설 계획을 논의하고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식량과 무기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점점 강해짐에 결국 의병을 해산하고,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1910년 소위 내란죄 및 강도·살인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았으나, 경술국치가 이루어짐에 따라 1910년 8월 29일 사면을 받아 면소 판결되어 석방되었다.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 즈음에 홍명희,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 7일 청주의 서문장터(우시장)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 다시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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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 동상(청원구)
한봉수(1883-1972)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근무하다가 1907년 조선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그해 음력 8월에 의병장 김규환 의진에 가담하여 일본군의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였다. 1907년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병진을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라 칭하였다. 이후 강원으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고, 의병장 조운식(趙雲植)과 적과 맞설 계획을 논의하고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식량과 무기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점점 강해짐에 결국 의병을 해산하고,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1910년 소위 내란죄 및 강도·살인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았으나, 경술국치가 이루어짐에 따라 1910년 8월 29일 사면을 받아 면소 판결되어 석방되었다.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 즈음에 홍명희,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 7일 청주의 서문장터(우시장)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 다시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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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 묘
한봉수(1883-1972)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근무하다가 1907년 조선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그해 음력 8월에 의병장 김규환 의진에 가담하여 일본군의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였다. 1907년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병진을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라 칭하였다. 이후 강원으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고, 의병장 조운식(趙雲植)과 적과 맞설 계획을 논의하고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식량과 무기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점점 강해짐에 결국 의병을 해산하고,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1910년 소위 내란죄 및 강도·살인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았으나, 경술국치가 이루어짐에 따라 1910년 8월 29일 사면을 받아 면소 판결되어 석방되었다.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 즈음에 홍명희,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 7일 청주의 서문장터(우시장)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 다시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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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집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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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기념관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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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보 송덕비
윤인보(1878-1951)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1919년 3월 30일 오후 2시경,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미원면(米院面) 미원(米院) 장터에서 신성휴 등과 같이 군중 1,000여 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또한 일헌병의 대검을 탈취하려 하는 등의 항일활동을 하다가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며, 8월 16일에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결국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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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보 묘
윤인보(1878-1951)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1919년 3월 30일 오후 2시경,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미원면(米院面) 미원(米院) 장터에서 신성휴(申聖休) 등과 같이 군중 1,000여 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또한 일헌병의 대검을 탈취하려 하는 등의 항일활동을 하다가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며, 8월 16일에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결국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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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수 사적비
최명수(1881-1951)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1907년에 충청남도의 목천(木川)교회 전도사로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 김동삼과 함께 경학사(耕學社)와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재만한인의 경제적 지위 향상에 노력하였다. 동시에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에도 참여하였다. 1919년에는 한족회(韓族會)에 참가하여 헌병과장, 검무감 등으로 친일분자 처단에 앞장섰으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중앙의회 의장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재만독립운동단체가 통합되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하게 되자 검무국장(檢務局長)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다시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대표로서 정의부(正義府)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정의부가 조직된 후에는 검무감(檢務監)에 임명되어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28년 8월에는 3부(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통합 운동이 일어나게 됨에 따라 정의부 제5회 정기중앙의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최명수는 시국 문제 토의 중 혼란이 일어나자, 민족유일당재만촉성회(民族唯一黨在滿促成會)를 지지하는 중앙집행위원 이청천, 이종건, 김원식, 이규동, 김상덕, 김동삼 등과 함께 퇴장하게 됨으로써 3부 통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최명수는 1928년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자 간부에 임명되어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일제가 만주를 석권하게 됨에 따라 이청천과 함께 상해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상해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 2월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평안환(平安丸, 헤이센마루) 배편으로 인천을 거쳐 신의주로 압송되었으며, 1935년 6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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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현 묘
송태현(1874-1945)은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밤 충북 청주군(靑州郡) 북일면(北一面) 우산리(牛山里)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송태현은 3월 1일 이래 전국적으로 산 위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만세 시위가 전개되는 사실을 알고 고향에서도 이런 형태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심하였다. 4월 1일 밤, 그는 동리 주민들에게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을 권유하여, 수십 명의 주민들과 함께 우산리 뒷산 꼭대기에 올라가 모닥불을 피워 놓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에 따라 송태현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20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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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묘
박준규(1863-1919)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에 홍일선, 김교선, 한동규, 이순구, 조인원, 유관순 등이 갈전면(葛田面)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 명의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여세를 몰아 시위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본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일본 헌병이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하어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하였다. 이때 박준규도 일본 군경의 발포로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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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유적비
박준규(1863-1919)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에 홍일선, 김교선, 한동규, 이순구, 조인원, 유관순 등이 갈전면(葛田面)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 명의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여세를 몰아 시위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본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일본 헌병이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하어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하였다. 이때 박준규도 일본 군경의 발포로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