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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흥 집
김규흥(1872~1936)은 충북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임시정부의 파견원으로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대 초 북경에서 흥화실업은행(興華實業銀行)을 세우며 무장투쟁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1908년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임시정부에 참가하였으며, 한국 독립을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던 김규식을 지원하고자 파리로 파견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김규식 등과 함께 한국의 독립문제를 국제사회에서 보장받기 위해 힘을 쏟았으나, 열강의 외면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파리강화회의 이후 중국에 돌아온 그는 북경을 활동 무대로 삼아 박용만(朴容萬) 등과 함께 무장투쟁노선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무장투쟁방략을 추진한 군사통일회의를 주도하던 박용만 등은 대조선국민군(大朝鮮國民軍)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이를 위해서는 자금의 확보가 필요한 일이었다. 김규흥은 그와같은 무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1921년 박용만과 함께 흥화실업은행(興華實業銀行)을 설립하였다. 흥화실업은행은 겉으로는 금융기관을 표방하였으나, 실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이들은 주식금 모집을 위장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모집된 자금으로 이들은 북경과 만주지역에 토지를 구입하는 한편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을 불러모아 경작케 하면서 농한기에는 훈련을 실시하여 점차 각 군사단체를 통일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23년 대규모의 주식금 모집 계획이 뜻과 같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한인사회의 건설 및 군사양성의 계획을 달성하지는 못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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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식, 홍명희 집
홍범식(1871 - 1910)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이며, 충청북도 괴산 출생으로 참판(參判) 홍승목(洪承穆)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였고 1907년 전라북도 태인군수에 부임하였다. 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로서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목매어 자결하였다. 홍범식이 장남 홍명희 등 가족에게 남긴 유서에는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는 내용이 담겼고 부친의 유언을 모든 집안 자제들이 좌우명으로 삼다고 전해진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명희(1888-1968)의 호는 가인(可人), 벽초(碧初)이고, 경술국치 이후 오산학교(五山學校)·휘문학교(徽文學校)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0년대 초반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에 관여하여 그 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30년에는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사건의 주모자로 잡혀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좌익운동에 가담하고,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으나, 월북하여 요직을 거쳤다. 홍범식 고택은 경술국치에 자결 순국한 홍범식의 고택인 동시에, 사랑채는 1919년 괴산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고 전하는 3.1만세운동 유적이다. 또한 홍범식의 아들인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의 고택으로도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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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만세운동유적비
괴산 만세운동유적비는 충청북도 괴산군 수진교 앞 옛날 괴산장터에 위치해있다. 괴산의 3.1만세운동은 충청북도 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홍명희(洪命熹)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고종(高宗)의 인산(因山)에 참여하였던 그는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괴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부탁받고, 고향의 인척과 지역 인사를 규합하여 3월 19일 괴산 읍내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괴산읍에서는 3월 24일과 29일 그리고 4월 1일까지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특히 3월 29일 이후의 시위는 괴산읍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치열하게 전개하였던 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19일, 수천 명의 군중이 괴산장터에 모여들었다. 이때 홍명희를 비롯한 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은 장꾼들 앞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자 괴산장터는 순식간에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경(日警)이 긴급히 괴산장터로 출동하여 홍용식, 홍명희, 이재성 등 18명을 현장에서 체포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압수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시위군중은 점차 늘어났으며, 그들은 괴산경찰서로 몰려가 사로잡힌 시위군중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3월 24일에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번 시위는 홍명희의 동생인 홍성희(洪性憙)를 중심으로 괴산읍의 서기 구창회(具昌會), 괴산군 소수면(沼壽面)의 면서기 김인수(金仁洙)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의논하고 시위를 주도하였으나 곧 일경에 강제로 체포되었다. 홍성희가 붙잡히자 분노한 군중들은 더욱더 거세게 시위를 벌였다. 3월 29일은 장이 서는 날로 오후 6시경 1,500여 명의 군중이 장터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많은 군중이 일경과 격돌하였다. 이튿날인 30일에도 만세시위는 계속되었다. 이날도 많은 군중이 경찰서로 가서 경찰과 충돌하였다. 이후 4월 1일에는 1,000여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로 몰려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괴산의 3.1만세운동에는 홍명희뿐만 아니라 홍용식, 홍성희 등 그의 친척과 지인들이 만세시위에 대거 참여하였다. 홍명희는 이른바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위반하였다는 죄목으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청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 19일부터 4월 1일까지 주로 괴산장터의 장날을 이용하여 다섯 차례에 걸친 대규모 시위를 격렬하게 전개한 괴산읍의 3.1만세운동은 이후 충청북도 전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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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 집
홍명희(1888-1968)의 호는 가인(可人), 벽초(碧初)이고, 홍범식과는 부자지간이다. 홍명희는 경술국치 이후 오산학교(五山學校)·휘문학교(徽文學校)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0년대 초반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에 관여하여 그 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30년에는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사건의 주모자로 잡혀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좌익운동에 가담하고,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으나, 월북하여 요직을 거쳤다. 충북 괴산에 위치한 홍명희 생가지 표지석이다. 홍명희가 태어난 곳은 홍범식 고택인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이지만, 만세운동으로 인해 피체되어 옥고를 치른 후 이사하여 살았던 곳은 이 사적의 주소인 [충북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36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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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식 묘
홍범식(1871 - 1910)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이며, 충청북도 괴산 출생으로 참판(參判) 홍승목(洪承穆)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였고 1907년 전라북도 태인군수에 부임하였다. 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로서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목매어 자결하였다. 홍범식이 장남 등 가족에게 남긴 유서 10여 통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요지는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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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택 공적비
정원택(1890 - 1971)은 1910년에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1912년 상해(上海)에서 신규식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하였다.1918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사절단의 자금을 간도(間島), 노령(露領)에서 인수하여 전달하였으며 1919년에는 대한독립의군부(義軍府)의 조직에 참여하여 서무를 담당하였다고 한다.1919년 4월에는 의군부의 기밀사(機密事)로 상해(上海)에 출장하여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길림(吉林)의 상황을 보고하고 국내에서 새로 온 청년들에게 폭탄제조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19년 4월에 개최된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당시의 임시정부는 재정(財政)의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그 동안은 각 지방에서 모여든 인사들 중에 자금을 가져오는 이도 있었고, 또 각기 가까운 계통을 통하여 자금이 들어오기도 하였지만 정부의 조직 또는 운영을 위하여 이를 솔선하여 공식적으로 희사하는 경향이 적었으며, 또 정부의 조직과 함께 5월에 개최된 제4차 의정원 회의에서는 구급의연금(救急義捐金)의 모집을 결정하고 각 도별로 구급 의연금 모집위원을 선출하였지만 그것이 당장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신규식(申圭植)·조소앙(趙素昻) 등 임정 요인들은 동년 5월초에 의정원 의원인 김덕진(金德鎭)과 함께 그를 국내로 밀파하여 서울의 정두화(鄭斗和)를 찾아 자금 조달을 원조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귀국 도중에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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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재의병 격전유적비
모래재의병 격전유적비는 1908년에 의병장 한봉수를 중심으로 괴산 모래재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것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것이다. 한봉수(1883 - 1972)는 1907년 의병투쟁에 나선 이후 1910년 5월 일제에 피체될 때까지 충청북도 일원은 물론 경상·강원지역 등 광범한 지역을 무대로 20여회에 걸쳐 격렬한 투쟁을 벌인 중부지방의 후기 의병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평민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부대를 이끌고 민중적 기반에서 호응을 받으며 활동하였는데, 번개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의 명수였다. 그의 투쟁 유형은 일본인 자산가와 친일파 처단, 밀정과 변절자의 응징, 일본군과의 직접 교전, 군자금 모금, 우편행랑의 습격 등 다양하였다. 1910년 피체된 한봉수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합방대사령(合邦大赦令)으로 면소되어 출옥하였다. 이후 1919년 거족적인 독립운동인 3·1운동이 발발하자 4월 1일 고향인 세교리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이튿날에도 내수보통학교 학생들과 장꾼들을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피체되어 다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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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륜 묘
유해륜(1883 - 1956)은 충북 괴산(槐山) 사람이다. 괴산군 소수면 몽촌리(沼壽面 夢村里)에 거주하였으며 이곳 유지로서 경권중(慶權重)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2일 면민 200여 명을 규합하여 소수면 길선리(吉善里)에 사는 김승환(金昇煥) 면장의 집과 소수면 주재소로 집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시위군중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5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었으며, 6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1년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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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독립운동 공적비
김용응과 김태규는 부자지간으로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 공적비를 세웠다. 김용응(1869 - 1959)은 병농이라는 이름으로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아들인 김태규(1896 - 1962)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어 1919년 3.1운동 때부터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파리 강화회의에 송부할 의견서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중국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와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보냈다. 1919년 5월에는 연병호, 안재홍 선생 등과 활약하였으며 외교시보를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국민들에게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와의 관계로 선생의 활동이 발각되어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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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만세운동유적비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에서 전개된 3·1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괴산군이 세운 기념비이다. 1985년 9월에 건립하였으며, 2002년 11월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소수면의 독립만세운동은 몽촌리의 유해륜(柳海崙)과 경권중(慶權重), 송능식(宋能植) 등이 주도하였다. 항일 의식이 투철하던 유해륜과 경권중은 같은 군의 괴산면·장연면·청천면 등지에서 전개된 3·1운동에 고무되어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2일 새벽 2시경, 송능식이 앞장선 5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현리의 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위하여 몰려갔으나, 사전에 탐지한 일제 경찰의 무력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날 밤 8시 경에 200여 명의 시위대가 길선리(吉善里)에 사는 면장 김승환(金昇煥)의 집을 습격하여 면장을 선두에 세우고 경찰주재소로 몰려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유해륜(1883 - 1956)은 괴산군 소수면 몽촌리(沼壽面 夢村里)에 거주하였으며 이곳 유지로서 경권중(慶權重)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2일 면민 200여 명을 규합하여 소수면 길선리(吉善里)에 사는 김승환(金昇煥) 면장의 집과 소수면 주재소로 집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시위군중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5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었으며, 6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경권중(1871 - 1920)은 1919년 4월 2일 유해륜(柳海崙)과 함께 소수면(沼壽面) 길선리(吉善里)에 사는 면장 김승환(金昇煥)의 집과 경찰주재소를 찾아가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러 함께 독립운동하자고 말하고, 다시 동리민 200여명을 이끌고 면장집과 주재소에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하였다. 또한 새벽 2시경 면사무소 습격계획이 일제의 제지로 실패하자, 약 300여명의 시위군중들과 함께 밤 8시경 면장집을 습격하여, 면장을 선두에 세우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그해 5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되었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귀가 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송능식(1898 - 1963)은 1919년 4월 2일 괴산군 소수면(沼壽面)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한 유해륜(柳海崙)·경권중(慶權重) 유지 등이 괴산군내의 괴산면·장연면(長延面)·청천면(靑川面) 등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고무되어 추진되었다.4월 2일 새벽 2시 경, 괴산군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는 송능식의 주도로 시위군중 500여 명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옥현리(沃峴里)의 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위해 몰려갔다. 그런데 사전에 이러한 정보가 새어나가 일경의 무력적 저지로 일단 중지되었다. 이날 밤 8시 경, 시위군중 300여 명은 다시 집결하여 면장집을 습격하고 각 동리를 돌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경은 그날 밤부터 대대적인 검속을 실시하여 주도자들을 체포하였다. 송능식은 이 일로 붙잡혀, 이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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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권중 공적비
경권중(1871 - 1920)은 1919년 4월 2일 유해륜(柳海崙)과 함께 소수면(沼壽面) 길선리(吉善里)에 사는 면장 김승환(金昇煥)의 집과 경찰주재소를 찾아가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러 함께 독립운동하자고 말하고, 다시 동리민 200여명을 이끌고 면장집과 주재소에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하였다. 또한 새벽 2시경 면사무소 습격계획이 일제의 제지로 실패하자, 약 300여명의 시위군중들과 함께 밤 8시 경 면장집을 습격하여, 면장을 선두에 세우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그해 5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되었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귀가 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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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영 의적비
박문영(1871 - 1943)은 경남 양산(梁山) 사람이다.1919년 3월 8일 대구(大邱)에서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이 주동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800여명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쓴 대형 깃발을 높이 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7월 24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