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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백우 사적비
신백우(1889-1962)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1907년 4월에 양기탁, 안창호, 전덕기, 이회영 등을 중심으로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족친인 신채호(申采浩)의 권유로 이에 가입하여 서울과 충청북도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에는 합법적 외곽 청년단체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가 설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청년학우회 한성연회(漢城聯會)의 서기로서 활동하였다. 또한 1909년, 신민회 계열의 비합법적 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이 조직되자 남형우, 안희제, 박중화 등 80여 명과 함께 국권 회복을 위한 지하활동을 하였다. 1910년 8월, 결국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1911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奉天)성 일대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조부의 별세로 1918년에 귀국하였다가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한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부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에 귀국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윤덕병 등과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를 발기하여 조직하고 그 기관지 『노동(勞動)』의 편집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3년 7월에는 홍명희, 윤덕병 등과 함께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후에 火曜會로 개칭)를 조직하였으며, 1924년 윤덕병, 차금봉 등과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을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가 코민테른에의 대표파견사건으로 체포되어 6개월간 투옥당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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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묘
신채호(1880-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단재(丹齋)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1]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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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휴 구 묘
신성휴(1891-1955)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1919년 3월 30일 청주군 미원면(米院面) 장터 사가리(四街里)에서 1,000여 명의 장꾼들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다 주동자 신경술(申敬述)이 일경에 연행되자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그해 5월 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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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사(낭성사)
김제환(1867-1916)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호는 소당이고, 청주 지방의 유생이었다. 교육을 통한 배일사상(排日思想) 고취와 구국교육운동을 펼쳤던 김제환은 평소 배일의식이 강하며 일제의 호적에 기입을 거부하고 이른바 '경절'에 일장기를 달지 않으며 납세 및 부역 등을 거절하는 등 항일투쟁을 하였다. 1913년 2월 배일항거운동(排日抗拒運動)으로 일본 헌병에 붙잡혔으나 단식투쟁으로 같은 해 3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곧이어 5월, 청원군(淸原郡) 오창면(梧倉面) 이산리(里山里)에서 '성산대강회(星山大講會)'를 개최하여 의거할 것을 주창(主唱)하다가 일경에 다시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조선 총독이던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항일 유서를 송부한 후 단식하여 순절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성환(1875~1958)은 충청북도 청주군 산내이상면 문박리에 서당을 설치하고 한학을 가르쳤다. 1910년 8월 한국과 일본 양국 합병식을 보고 분노하여 생도 등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5월 1일 평소의 언동에 대해 청주경찰서에서 설유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도 일본 경찰에게 병합의 부당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경찰서를 나와서도 생도 수십 명에게 “현시의 관리는 모두 난신적자(亂臣賊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병을 일으켜 그들을 박멸하고자 밤낮으로 오랫동안 고심하여 왔으나 아직 그 시기를 얻지 못하였다. 너희는 항상 이 뜻을 가슴에 품고 우리 대한국 신민(臣民)의 의무를 잊으면 안 된다.”고 설파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1913년 6월 12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반’으로 금고 1월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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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환 유허비
김제환(1867-1916)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호는 소당(素堂)이고, 청주 지방의 유생이었다. 교육을 통한 배일사상(排日思想) 고취와 구국교육운동을 펼쳤던 김제환은 평소 배일의식이 강하며 일제의 호적에 기입을 거부하고 이른바 '경절'에 일장기를 달지 않으며 납세 및 부역 등을 거절하는 등 항일투쟁을 하였다. 1913년 2월 배일항거운동(排日抗拒運動)으로 일본 헌병에 붙잡혔으나 단식투쟁으로 같은 해 3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곧이어 5월, 청원군(淸原郡) 오창면(梧倉面) 이산리(里山里)에서 '성산대강회(星山大講會)'를 개최하여 의거할 것을 주창(主唱)하다가 일경에 다시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선 총독이던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항일 유서를 송부한 후 단식하여 순절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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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유허비
김성환(1875-1958)은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정당(定堂)이다. 청주군 산내이상면(山內二上面) 문박리(文博里)에 서당(書堂)을 설치하고 한학을 가르쳤다. 1910년 8월 한국과 일본 양국 합병식(合倂式)을 보고 분노하여 생도 등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5월 1일, 평소의 언동에 대해 청주경찰서(淸州警察署)에서 설유(說諭)를 받았으나, 김성환은 이 과정에서도 일본 경찰에게 병합의 부당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경찰서를 나와서도 생도 수십 명에게 “현시의 관리는 모두 난신적자(亂臣賊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병(義兵)을 일으켜 그들을 박멸하고자 밤낮으로 오랫동안 고심하여 왔으나 아직 그 시기를 얻지 못하였다. 너희는 항상 이 뜻을 가슴에 품고 우리 대한국 신민(臣民)의 의무를 잊으면 안 된다.”고 설파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1913년 6월 12일 공주지방법원(公州地方法院) 청주지청(淸州支廳)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금고(禁錮) 1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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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동상(충북)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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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하 사적비
조장하(1847-1910)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죽음으로써 항의하기로 하고 의관을 깨끗이 갈아입은 다음 단식을 결행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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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집
신석구(1875-1950)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919년 2월 27일 당시 기독교 남감리파 목사로 있던 신석구는 같은 남감리파 목사인 오화영(吳華英)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이 있음을 듣고, 오화영, 이승훈(李昇薰),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함태영(咸台永), 김창준(金昌俊), 박동완(朴東完) 등 10명의 기독교인과 함께 함태영이 최 린(崔麟)으로부터 받아 온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돌려보고, 모두 그 취지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중 함태영만이 다른 연명자가 체포될 경우 그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제외되고,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제출할 문서에 날인하기 위하여 9명의 인장을 모두 함태영에게 맡겨서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28일 밤에는 다른 민족대표들과 손병희의 집에 모여서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대한 최종 협의를 마쳤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급거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 및 연행되어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춘천(春川), 원산(元山) 등지에서 일본 경찰에 여러 번 체포되었다. 천안(天安)에서는 신사참배(神社參拜)와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하다가 검거되어 복역 중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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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안장터 3.1만세운동 시발지 동판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쌀안장터 3.1만세운동 시발지 동판이다.이 동판은 1919년 3월 30일 오후 2시경 쌀안장터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동판이 세워진 위치가 그 시발지이다. 2019년 4월, 쌀안장터 3.1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장일환 지사의 손자인 장기영이 기증하여 쌀안장터 3.1만세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본 동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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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안장터 만세운동기념비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30일 미원면 쌀안장터에서 신경구·이용실 등의 주도로 1천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헌병이 출동하여 신경구를 연행하자 이용실·윤인보·이성호 등이 시위대를 이끌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러자 청주에서 일본군 지원대까지 출동하여 발포하고, 주동자를 검거하였다. 이 때 이병선·장일환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숨지고, 최봉원은 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순국하거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분들은 다음과 같다. 김순구(金舜九, 1867~1919), 김재형(金在衡, 1890~1966), 김진환(金振煥, 1879~1934), 서정렬(徐正烈, 1882~1944), 성규원(成奎垣, 1862~1927), 신경구(申敬求, 1887~1948), 신성휴(申聖休, 1891~1955), 신정식(申鼎植, 1869~미상), 신학구(申學求, 1877~1968), 오교선(吳敎善, 1883~1948), 윤인보(尹仁甫, 1878~1951), 이병선(李秉善, 1882~1919), 이성호(李聖浩, 1873~1943), 이수란(李水蘭, 1862~1926), 이용실(李容實, 1878~1964), 장일환(張一煥, 1882~1919), 정무섭(鄭武燮, 1886~1960), 최봉원(崔鳳源, 1879~미상) 쌀안장터 만세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6년 3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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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곡마을 자랑비
용곡마을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에 앞장서서 1919년 3월 30일 미원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신경구를 비롯하여 이용실, 정무섭, 윤인보 등 많은 애국지사가 태어난 고장이다. 용곡마을 자랑비는 용곡마을의 자랑스러운 애국지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