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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하 추모비
박승하(1900-1973)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이명은 박승복이며, 청주농업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충북 청주군 청주면(淸州面)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쏟던 중. 1919년 3월 9일 사전 발각되어 붙잡혔다.청주에서의 만세운동은 일찍부터 모색되고 있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다음 날인 3월 2일에 독립선언서 286매가 전달되었다가 일경에 발각된 일이 있었다. 그리고 3월 7일에는 읍내 우시장에서 장꾼들에 의한 만세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의 장례에 참여하고자 상경했던 신영호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3월 9일 청주농업학교 학생 오석영에게 전달하면서 청주농업학교에서의 만세운동은 구체화되었고,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박승하는 이러한 사실을 접하면서 만세운동의 계획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3월 9일 김현구의 방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경고문 3백 매를 인쇄하면서 만세시위를 준비해 갔는데, 도중에 발각되어 박승하는 붙잡혔다.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5일 대구복심법원과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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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하 묘
박승하(1900-1973)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이명은 박승복이며, 청주농업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충북 청주군 청주면(淸州面)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쏟던 중. 1919년 3월 9일 사전 발각되어 붙잡혔다.청주에서의 만세운동은 일찍부터 모색되고 있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다음 날인 3월 2일에 독립선언서 286매가 전달되었다가 일경에 발각된 일이 있었다. 그리고 3월 7일에는 읍내 우시장에서 장꾼들에 의한 만세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의 장례에 참여하고자 상경했던 신영호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3월 9일 청주농업학교 학생 오석영에게 전달하면서 청주농업학교에서의 만세운동은 구체화되었고,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박승하는 이러한 사실을 접하면서 만세운동의 계획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3월 9일 김현구의 방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경고문 3백 매를 인쇄하면서 만세시위를 준비해 갔는데, 도중에 발각되어 박승하는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5일 대구복심법원과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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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명 의적비
임수명(1894-1924)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이다. 1912년 서울의 어느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환자로 위장하고 입원하고 있던, 통의부 군사 위원장 겸 사령관 신팔균과 알게 되어 1914년 결혼하였다. 그 후 북경으로 망명한 부군의 비밀문서 연락 등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1921년 밀명을 띠고 입국한 부군을 따라 만주로 가서 계속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1924년, 음력 8월 1일 신팔균이 통의부 사령관 소재지를 습격한 중국 마적과 전투 중 전사하자, 귀국하여 서울 종로구 사직동 자택에서 딸과 함께 자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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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식 흉상
신홍식(1872-1939)은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기독교인이다. 34세에 기독교에 입교한 후, 1913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공주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으며, 1917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로 전임되어 포교와 교육사업에 정진하였다. 1919년 2월 14일,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였던 신홍식은 동지 규합을 위해 평양에 온 이인환(李寅煥)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2월 20일 이인환의 집에서 오화영(吳華英), 정춘수(鄭春洙), 오기선(吳基善) 등의 동지와 모여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모아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협의하고, 이인환, 이필주(李弼柱),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오화영, 최성모(崔聖模),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박동완(朴東完),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길선주(吉善宙), 정춘수 등의 동지와 함께 기독교 측 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8일 밤에는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 총감부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인천, 원주 등지에서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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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취선 묘
어취선(1870-1936)은 1896년 을미의병 당시 유홍석의 의진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1911년 4월 의병 가족 50여 가구와 함께 중국 신빈현(新賓縣) 평정산(平頂山) 난천자(暖泉子)로 이주하여 의암 유인석이 추진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이어서 11월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중락 유봉석, 김경달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제천의진(堤川義陳)이 형성되어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자 이에 합류하여 사무를 관장하였다. 또한 유홍석의 휘하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05년 1월 춘천 가정(柯亭) 지역에서 유인석을 만나 그 문하에 들어갔으며, 을사늑약 이후 운강 이강년을 비롯하여 김상태 등 각처 의병장들과 교류하였다. 1911년 4월 평정산 난천자로 이주하여 유인석과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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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신건식 집
신규식(1880-1922)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대한제국의 군인, 한국의 공화주의 독립혁명가이다. 대한제국에서 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경술국치를 맞자, 이듬해인 1911년에 청나라 상해로 망명해 쑨원과 천치메이 등의 중국 동맹회 간부들과 친교를 맺어 중국 동맹회에 가입한 뒤 신해혁명에도 참여했다. 이어, 1912년에 7월에 '동주공제'(同舟共濟)라는 뜻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공화주의 독립혁명을 총괄 지도하였으며, 동해에 신해혁명계 인사들과 친교를 맺기 위해 신아동제사를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의 총재 박은식을 비롯해 김규식과 신채호 및 조소앙, 홍명희, 여운형, 조동호, 장건상 등이 가입해 있었다. 이들은 1917년 7월에 공화주의 독립선언서인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1918년에 여운형을 지도하여 신한청년당의 조직을 지원했다. 이듬해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이 되어 1921년 11월 3일에 쑨원이 이끄는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임정의 승인과 지원을 얻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2년에 단식으로 몸이 악화된 상태에서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신건식(1889-1963)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1912년 4월에 중국 절강성(浙江省) 성립(省立)의 항주 의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예관 신규식, 단재 신채호, 박찬익 등과 함께 생활부조와 국사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 만든 동제사(同濟社)와 대동보국단(大東輔國團)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3년 4월, 신건식은 중국군(中國軍) 중교(中校)로 항주 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중국군으로 복무하면서 우리 동포를 지원하여 임시정부의 활동을 조력하였다.1939년에 중경(重慶)으로 이전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에서 충청도 대표 의원으로 선임되어, 1945년 광복 때까지 입법 활동을 통하여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데 심혈을 경주하였다.1941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원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는데 진력하였고, 1943년 3월 4일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차장에 임명되었다. 1944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감찰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5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문제의 확충과 운영에 기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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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호 집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신영호의 고택이다. 1919년 당시 경성중앙학교(京城中央學校) 재학생의 신분으로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귀향하였다. 3월 9일에는 청주농업학교 기숙사(淸州農業學校)로 가서 학생들에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청주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제의하여, 독립선언문과 경고문 등을 제작하고 인쇄하는 등 거사 준비를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해 4월 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고 항고했으나 5월 5일 대구복심법원과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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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가묘
신규식(1880-1922)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대한제국의 군인, 한국의 공화주의 독립혁명가이다. 대한제국에서 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경술국치를 맞자, 이듬해인 1911년에 청나라 상해로 망명해 쑨원과 천치메이 등의 중국 동맹회 간부들과 친교를 맺어 중국 동맹회에 가입한 뒤 신해혁명에도 참여했다. 이어, 1912년에 7월에 '동주공제'(同舟共濟)라는 뜻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공화주의 독립혁명을 총괄 지도하였으며, 동해에 신해혁명계 인사들과 친교를 맺기 위해 신아동제사를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의 총재 박은식을 비롯해 김규식과 신채호 및 조소앙, 홍명희, 여운형, 조동호, 장건상 등이 가입해 있었다. 이들은 1917년 7월에 공화주의 독립선언서인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1918년에 여운형을 지도하여 신한청년당의 조직을 지원했다. 이듬해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이 되어 1921년 11월 3일에 쑨원이 이끄는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임정의 승인과 지원을 얻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2년에 단식으로 몸이 악화된 상태에서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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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 송공비
한봉수(1883-1972)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근무하다가 1907년 조선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그해 음력 8월에 의병장 김규환 의진에 가담하여 일본군의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였다. 1907년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병진을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라 칭하였다. 이후 강원으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고, 의병장 조운식(趙雲植)과 적과 맞설 계획을 논의하고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식량과 무기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점점 강해짐에 결국 의병을 해산하고,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1910년 소위 내란죄 및 강도·살인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았으나, 경술국치가 이루어짐에 따라 1910년 8월 29일 사면을 받아 면소 판결되어 석방되었다.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 즈음에 홍명희,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 7일 청주의 서문장터(우시장)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 다시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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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교선 묘
오교선(1883-1948)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1919년 당시 청원군 낭성면 성대리(琅城面 城坮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미원면(米院面)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동하였다. 1919년 3월 30일, 오교선은 같은 동리에 거주하는 박우동과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격문을 각 동리에 회송하며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4월 1일 거사 당일에 청원군 미원면 장터에서 인근 주민 다수를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오교선은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해 4월 2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6월 9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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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3.1운동 표지석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3.1운동 표지석이다. 본 비는 1919년 청주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으로, 2009년에 3.1운동 9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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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구 집
신학구(1877-1968)는 1919년 3월 30일 미원 장터에서 오후 1시부터 1,000여명의 군중이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앞장서서 시위운동을 주도한 14명이 붙잡히는 바람에 군중은 더욱 격앙되어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를 습격·파괴하였다. 신학구는 신정식(申鼎植)·서정열(徐正烈)등과 함께 장꾼들에게 정의의 독립만세운동 대열에 참가할 것을 설득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며,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