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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서 구 묘
정춘서(1885-미상), 일명 춘서(春西)는 청주에서 한봉수 등과 의거하여 의병항쟁을 하다가 피체되어 순국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1907년 군대해산령이 내리자 고향 청주에서 한봉수(韓鳳洙)와 함께 의병으로 봉기하였다. 이 때 9명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하였는데 5월 10일(음력)에는 괴산군 서면 모래재[沙峙]에서 한봉수와 함께 일본 수비대 2명이 우편물을 호위하며 통과하는 것을 확인하고 습격하여 일본군 2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물품을 노획하였다. 한편 청주군 북강내이면 화죽리에 거주하는 박내천(朴來舛)이라는 자가 일경에게 의병활동을 밀고하자 8월 15일 그를 처단하였고, 10월 동리(東里)에서 김덕보(金德甫)·이주사(李主事)로부터 군자금 50원을 모금하였다. 12월에는 동료 이종칠(李鍾七) 외 1명과 총 2정으로 무장하고 16일에 청주군 북강외이면 양청리(陽淸里) 유주사(柳主事)집에서 44원 10전을 군자금으로 모금하였으며 계속해서 충남 목천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일제에 피체되어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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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팔균 집
신팔균(1882-1924)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2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로서 강계진위대에서 활약하다가, 같은 해 7월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낙향하여 후진 육성에 진력하였다. 1909년에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안희제, 이원식, 윤세복, 서상일, 김동삼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 해외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에는 동삼성의 지도자로서 여준, 정안립, 박성태, 박찬익, 정신, 김동삼, 손일민, 김좌진, 서일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오광선, 이범석, 김경천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2년에는 의군부, 광복단, 광한단, 흥업단 등 8개 단체가 합류하여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에는 사령관에 취임하여 양세봉, 문학빈, 심용준, 박응백 등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 300여 명이 통의부사령부 소재지인 왕청문 이도구를 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1924년 7월 부하들을 이도구 높은 산에 매복시킨 후 그들과 결전을 행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전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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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팔균 사적비
신팔균(1882-1924)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2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로서 강계진위대에서 활약하다가, 같은 해 7월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낙향하여 후진 육성에 진력하였다. 1909년에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안희제, 이원식, 윤세복, 서상일, 김동삼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 해외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에는 동삼성의 지도자로서 여준, 정안립, 박성태, 박찬익, 정신, 김동삼, 손일민, 김좌진, 서일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오광선, 이범석, 김경천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2년에는 의군부, 광복단, 광한단, 흥업단 등 8개 단체가 합류하여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에는 사령관에 취임하여 양세봉, 문학빈, 심용준, 박응백 등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 300여 명이 통의부사령부 소재지인 왕청문 이도구를 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1924년 7월 부하들을 이도구 높은 산에 매복시킨 후 그들과 결전을 행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전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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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직 묘
이상직(1878-1947)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목표로 1909년 진천에 문명학교(文明學校)를 설립하고 교육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상직은 3월 15일 진천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고자 자택에서 각 마을 대표 수십 명과 회합하여 준비했으나 이튿날 새벽에 일제 경찰에 구속되었고, 결국 이상직을 제외하고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석방된 후 4월 2일, 이상직은 제2차 진천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켜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다가 다시 일경에게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중병으로 석방되었다. 1925년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리는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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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집
조명희(1894-1938)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호는 포석(砲石) 또는 조생이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1919년 가을경 일본 도쿄 연교학관에 들어갔고, 일본 유학생 모임이 동우회에서 활동했다. 1921년 여름방학 때는 문화선전을 목적으로 연극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각 지역을 순회하며 연설가로 활동했다. 12월 17일 조명희는 황석우 등이 소속된 의권단(義拳團)에 가입했는데, 의권단은 사회주의자와 연계를 맺어 재경친일자(在京親日者)와 밀정(密偵) 등을 징계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조명희는 희곡 작가, 연극운동가, 시인, 소설가로 작품 활동을 하며, 1925년 여름에는 무산계급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몸담았다. 1927년 7월에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낙동강」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일제의 수탈과 착취로 고향과 농토를 빼앗기고 도시근로자로 흘러가거나 북간도 등으로 유랑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한국 농촌의 궁핍한 생활상을 날카롭게 묘사하였다.1928년 6월 5일 자신의 창작집 『낙동강(洛東江)』과 이기영의 작품집 『민촌(民村)』이 출판되자, 한국 최초로 창작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또한 7월 27일에는 서울 공평동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회관에서, 본 동맹의 경성지회 설립대회 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항일과 카프 활동을 계속하자 일제의 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생활상의 곤란도 심하였다. 결국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교원이 되었다. 1928년 10월에는 연해주에서 「짓밟힌 고려」라는 산문시를 발표했다. 「짓밟힌 고려」는 일제 식민지하에 한국인의 궁핍과 민족의 비참상을 묘사했다. 항일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서 계급해방의식을 형상화했다. 1929년에는 연해주 푸칠로프카(육성촌) 농업화훼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쳤다. 한글 신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 등을 통해서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다. 1935년 7월에 연해주 스꼬또브 구역 뽀두쓰까 초급 중등학교가 10년제의 중등학교로 승격되자, 조명희는 이 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었다. 조명희는 연해주 지역 학교에서 교원으로 한인 2세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소비에트 문사 동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6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었을 때, 매월 6일에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였다. 9월 27일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자 이곳에서도 문인들을 지도했다. 스탈린 대 탄압이 시작되면서 1937년 9월 18일 일본 첩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조명희는 1938년 5월 11일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후 1956년 7월 20일 극동주 군법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조명희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사형을 당하였지만, 연해주에서 문학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수많은 문학인을 길러낸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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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문학비
조명희(1894-1938)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호는 포석(砲石) 또는 조생이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1919년 가을경 일본 도쿄 연교학관에 들어갔고, 일본 유학생 모임이 동우회에서 활동했다. 1921년 여름방학 때는 문화선전을 목적으로 연극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각 지역을 순회하며 연설가로 활동했다. 12월 17일 조명희는 황석우(黃錫禹) 등이 소속된 의권단(義拳團)에 가입했는데, 의권단은 사회주의자와 연계를 맺어 재경친일자(在京親日者)와 밀정(密偵) 등을 징계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조명희는 희곡 작가, 연극운동가, 시인, 소설가로 작품 활동을 하며, 1925년 여름에는 무산계급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몸담았다. 1927년 7월에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낙동강」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일제의 수탈과 착취로 고향과 농토를 빼앗기고 도시근로자로 흘러가거나 북간도 등으로 유랑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한국 농촌의 궁핍한 생활상을 날카롭게 묘사하였다. 1928년 6월 5일 자신의 창작집 『낙동강(洛東江)』과 이기영의 작품집 『민촌(民村)』이 출판되자, 한국 최초로 창작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또한 7월 27일에는 서울 공평동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회관에서, 본 동맹의 경성지회 설립대회 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항일과 카프 활동을 계속하자 일제의 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생활상의 곤란도 심하였다. 결국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교원이 되었다. 1928년 10월에는 연해주에서 「짓밟힌 고려」라는 산문시를 발표했다. 「짓밟힌 고려」는 일제 식민지하에 한국인의 궁핍과 민족의 비참상을 묘사했다. 항일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서 계급해방의식을 형상화했다. 1929년에는 연해주 푸칠로프카(육성촌) 농업화훼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쳤다. 한글 신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 등을 통해서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다. 1935년 7월에 연해주 스꼬또브 구역 뽀두쓰까 초급 중등학교가 10년제의 중등학교로 승격되자, 조명희는 이 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었다. 조명희는 연해주 지역 학교에서 교원으로 한인 2세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소비에트 문사 동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6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었을 때, 매월 6일에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였다. 9월 27일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자 이곳에서도 문인들을 지도했다. 스탈린 대 탄압이 시작되면서 1937년 9월 18일 일본 첩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조명희는 1938년 5월 11일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후 1956년 7월 20일 극동주 군법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조명희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사형을 당하였지만, 연해주에서 문학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수많은 문학인을 길러낸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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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시비
조명희(1894-1938)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호는 포석(砲石) 또는 조생이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1919년 가을경 일본 도쿄 연교학관에 들어갔고, 일본 유학생 모임이 동우회에서 활동했다. 1921년 여름방학 때는 문화선전을 목적으로 연극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각 지역을 순회하며 연설가로 활동했다. 12월 17일 조명희는 황석우(黃錫禹) 등이 소속된 의권단(義拳團)에 가입했는데, 의권단은 사회주의자와 연계를 맺어 재경친일자(在京親日者)와 밀정(密偵) 등을 징계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조명희는 희곡 작가, 연극운동가, 시인, 소설가로 작품 활동을 하며, 1925년 여름에는 무산계급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몸담았다. 1927년 7월에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낙동강」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일제의 수탈과 착취로 고향과 농토를 빼앗기고 도시근로자로 흘러가거나 북간도 등으로 유랑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한국 농촌의 궁핍한 생활상을 날카롭게 묘사하였다. 1928년 6월 5일 자신의 창작집 『낙동강(洛東江)』과 이기영의 작품집 『민촌(民村)』이 출판되자, 한국 최초로 창작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또한 7월 27일에는 서울 공평동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회관에서, 본 동맹의 경성지회 설립대회 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항일과 카프 활동을 계속하자 일제의 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생활상의 곤란도 심하였다. 결국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교원이 되었다. 1928년 10월에는 연해주에서 「짓밟힌 고려」라는 산문시를 발표했다. 「짓밟힌 고려」는 일제 식민지하에 한국인의 궁핍과 민족의 비참상을 묘사했다. 항일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서 계급해방의식을 형상화했다. 1929년에는 연해주 푸칠로프카(육성촌) 농업화훼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쳤다. 한글 신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 등을 통해서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다. 1935년 7월에 연해주 스꼬또브 구역 뽀두쓰까 초급 중등학교가 10년제의 중등학교로 승격되자, 조명희는 이 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었다. 조명희는 연해주 지역 학교에서 교원으로 한인 2세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소비에트 문사 동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6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었을 때, 매월 6일에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였다. 9월 27일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자 이곳에서도 문인들을 지도했다. 스탈린 대 탄압이 시작되면서 1937년 9월 18일 일본 첩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조명희는 1938년 5월 11일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후 1956년 7월 20일 극동주 군법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조명희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사형을 당하였지만, 연해주에서 문학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수많은 문학인을 길러낸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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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집
이상설(1870-1917)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며 아버지는 이행우(李行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고 7세 때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었다.이상설은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 시절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1904년 6월 일본이 전국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에 선임되고 이준(李儁)이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이상설은 그 늑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거듭하여 올렸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4월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북간도의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8월경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숙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간도 일대의 교육 구국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다는 칙명을 받았다. 비록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세 밀사들은 6월 27일에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결국 1916년 중병에 걸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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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묘
이상설(1870-1917)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며 아버지는 이행우(李行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고 7세 때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었다.이상설은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 시절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1904년 6월 일본이 전국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에 선임되고 이준(李儁)이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이상설은 그 늑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거듭하여 올렸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4월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북간도의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8월경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숙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간도 일대의 교육 구국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다는 칙명을 받았다. 비록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세 밀사들은 6월 27일에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결국 1916년 중병에 걸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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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학교 터(삼수초)
문명학교는 이상설 선생의 사촌형제인 이상직 선생이 항일 구국 계몽 운동으로 세운 학교로 지금의 진천상산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이상직 선생은 어려서부터 서울의 큰아버지 댁에서 독립운동가인 이상설 선생과 숙식과 수학을 같이 하면서 기틀을 다졌고 이성훈, 이시영, 이회영, 정인보, 이범세 등과 사귀며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진천으로 낙향하여 사립·보통상산학교를 건립했다. 이상직 교장과 남진우 선생이 교육을 담당하여 학생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교실이 협소하여 향교의 명륜당으로 전전하며 재정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후 교명을 ‘널리 학생을 모집해 신학문을 가르치다’라는 뜻이 담긴 <광명학교> 또는 <문명학교>라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학교는 한일합방 후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으로 폐지되고 1911년 6월 진천군에 공립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그해 10월 진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게 된다. 1913년 현재의 삼수초등학교 부지에 교실2, 교무실 1개로 교사를 건축했다. 또 같은 해 제 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때 졸업생 수는 모두 19명이었다. 1941년 4월 1일에는 학교 이름을 <진천상산공립보통학교> 라 개칭하고 진천 지역 민족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1940년대 현재의 삼수초등학교 터에 있던 진천상산초등학교는 급격하게 늘어나는 학생 수를 감당하기 어려워 교사 증축이 시급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부지가 좁고 재정 형편에도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 같은 어려운 환경을 접한 당시 진천의 최대 갑부로 알려졌던 이호신 선생이 토지 500석 지기의 부지를 희사해 지금의 위치에 부지 7천 여 평을 마련했다. 선생이 내놓은 부지에 교사 2동과 부속 건물을 지어 1940년 11월 이사하게 된다. 이로써 비교적 제대로 된 교육시설이 갖춰진 새로운 배움의 전당을 마련하게 됐다. 당시 이호신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교정에 장학비가 현재의 은행나무 아래 세워져 있다. 이 후 1941년 진천상산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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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직 집
이상직(1878-1947)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목표로 1909년 진천에 문명학교(文明學校)를 설립하고 교육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상직은 3월 15일 진천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고자 자택에서 각 마을 대표 수십 명과 회합하여 준비했으나 이튿날 새벽에 일제 경찰에 구속되었고, 결국 이상직을 제외하고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석방된 후 4월 2일, 이상직은 제2차 진천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켜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다가 다시 일경에게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중병으로 석방되었다.1925년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리는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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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하 집
박승하(1900-1973)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이명은 박승복이며, 청주농업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충북 청주군 청주면(淸州面)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쏟던 중. 1919년 3월 9일 사전 발각되어 붙잡혔다. 청주에서의 만세운동은 일찍부터 모색되고 있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다음 날인 3월 2일에 독립선언서 286매가 전달되었다가 일경에 발각된 일이 있었다. 그리고 3월 7일에는 읍내 우시장에서 장꾼들에 의한 만세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의 장례에 참여하고자 상경했던 신영호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3월 9일 청주농업학교 학생 오석영에게 전달하면서 청주농업학교에서의 만세운동은 구체화되었고,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박승하는 이러한 사실을 접하면서 만세운동의 계획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3월 9일 김현구의 방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경고문 3백 매를 인쇄하면서 만세시위를 준비해 갔는데, 도중에 발각되어 박승하는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5일 대구복심법원과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