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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 항일역사공원
연병호(1894-1963)는 충청북도 괴산(현 증평) 사람으로, 1919년 4월에 서울에서 이병철과 협의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조용주, 안재홍, 김홍식, 김연우, 김태규, 이의경, 조소앙 등이 합류하여 역할을 맡았다. 그중 연병호는 조용주와 함께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창립된 최초의 단체로, 임시정부에 대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통신하여 주는 것,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 그리고 선전활동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경상북도 도 경찰은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애국부인회와 연계하여 서울에 본부, 각 지방에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때 연병호도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다시 상해로 탈출한 그는 1921년 4월 한인대동(韓人大同)을 목적으로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世界韓人同盟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 김현구, 조소앙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수습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로의 의견이 부합되지 않자, 조소앙, 김용철, 조완, 이기룡 등과 함께 탈퇴하였다. 1929년 말에는 안창호, 이동녕, 김구, 엄항섭, 이시영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연계하여 조국광복운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2월에는 윤기섭과 함께 재남경(在南京) 한국혁명당 대표로서 재만(在滿)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홍면희, 김원식 등과 회합하고 독립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양 단체를 통합하여 새로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였다. 1935년 1월 재남경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집행위원이던 연병호는 정무(政務)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어, 의열단(義烈團)을 다시 통합하여 1935년 7월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그는 또한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 무렵에 독립공론(獨立公論)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그는 일제 앞잡이인 이갑녕(李甲寧)의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총영사관의 경찰의 추적을 받아 1937년 1월 7일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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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환 공적비
연병환(1878-1926)은 1908년 7월 이후 중국 길림성 연길현 해관(海關)에서 관리로 근무하면서 1919년 간도 용정(龍井)에서 일어난 3·13 만세시위운동에서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다가 일제 간도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2개월의 처벌을 받았다. 이후 상해(上海)로 이동하여 1920년 대한인거류민단(大韓人居留民團)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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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 구 묘
연병호(1894-1963)는 충청북도 괴산(현 증평) 사람으로, 1919년 4월에 서울에서 이병철과 협의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조용주, 안재홍, 김홍식, 김연우, 김태규, 이의경, 조소앙 등이 합류하여 역할을 맡았다. 그중 연병호는 조용주와 함께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창립된 최초의 단체로, 임시정부에 대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통신하여 주는 것,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 그리고 선전활동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경상북도 도 경찰은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애국부인회와 연계하여 서울에 본부, 각 지방에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때 연병호도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다시 상해로 탈출한 그는 1921년 4월 한인대동(韓人大同)을 목적으로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世界韓人同盟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 김현구, 조소앙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수습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로의 의견이 부합되지 않자, 조소앙, 김용철, 조완, 이기룡 등과 함께 탈퇴하였다. 1929년 말에는 안창호, 이동녕, 김구, 엄항섭, 이시영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연계하여 조국광복운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2월에는 윤기섭과 함께 재남경(在南京) 한국혁명당 대표로서 재만(在滿)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홍면희, 김원식 등과 회합하고 독립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양 단체를 통합하여 새로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였다. 1935년 1월 재남경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집행위원이던 연병호는 정무(政務)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어, 의열단(義烈團)을 다시 통합하여 1935년 7월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그는 또한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 무렵에 독립공론(獨立公論)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그는 일제 앞잡이인 이갑녕(李甲寧)의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총영사관의 경찰의 추적을 받아 1937년 1월 7일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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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 송덕비
연병호(1894-1963)는 충청북도 괴산(현 증평) 사람으로, 1919년 4월에 서울에서 이병철과 협의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조용주, 안재홍, 김홍식, 김연우, 김태규, 이의경, 조소앙 등이 합류하여 역할을 맡았다. 그중 연병호는 조용주와 함께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창립된 최초의 단체로, 임시정부에 대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통신하여 주는 것,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 그리고 선전활동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경상북도 도 경찰은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애국부인회와 연계하여 서울에 본부, 각 지방에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때 연병호도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다시 상해로 탈출한 그는 1921년 4월 한인대동(韓人大同)을 목적으로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世界韓人同盟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 김현구, 조소앙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수습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로의 의견이 부합되지 않자, 조소앙, 김용철, 조완, 이기룡 등과 함께 탈퇴하였다. 1929년 말에는 안창호, 이동녕, 김구, 엄항섭, 이시영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연계하여 조국광복운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2월에는 윤기섭과 함께 재남경(在南京) 한국혁명당 대표로서 재만(在滿)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홍면희, 김원식 등과 회합하고 독립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양 단체를 통합하여 새로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였다. 1935년 1월 재남경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집행위원이던 연병호는 정무(政務)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어, 의열단(義烈團)을 다시 통합하여 1935년 7월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그는 또한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 무렵에 독립공론(獨立公論)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그는 일제 앞잡이인 이갑녕(李甲寧)의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총영사관의 경찰의 추적을 받아 1937년 1월 7일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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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의 묘
이찬의(1878-1919)는 충청북도 괴산 사람으로, 1919년 3월 30일 청안(淸安) 장날을 기하여 김수백, 이태갑, 신강면 등이 주동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는 3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주재소와 우편소로 행진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점차 시위군중이 격렬해져서 우편소와 주재소 등을 습격하자, 이에 겁이 난 일본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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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무 공적비
임창무(1893-1944)는 충청북도 괴산 사람으로, 1919년 4월 4일 김제군 만경면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임창무는 당시 만경 보통학교 교사로서, 동료인 오연길, 장태석, 이석재 등과 함께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인근 익산군 오산면의 애국지사인 문용기와도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4일 정오, 그는 3, 4학년 학생 1백여 명을 교정에 모여놓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고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동하였다. 그러나 이때 김제경찰서에서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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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무 묘
임창무(1893-1944)는 충청북도 괴산 사람으로, 1919년 4월 4일 김제군 만경면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임창무는 당시 만경 보통학교 교사로서, 동료인 오연길, 장태석, 이석재 등과 함께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인근 익산군 오산면의 애국지사인 문용기와도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4일 정오, 그는 3, 4학년 학생 1백여 명을 교정에 모여놓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고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동하였다. 그러나 이때 김제경찰서에서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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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 의거 기념비
충청북도 증평에 위치한 3.1독립운동의거 기념비이다. 본 비는 1919년 3월 30일, 청안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젊은 주도자 이태갑, 장성원, 신강면, 함재원, 박래명, 김수백 등이 사전계략을 세워, 3월 30일 오후 2시경 거사가 일어났다. 괴산 연락원 이모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이태갑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군중들이 따라 외치며 행진했다. 시위군중이 주재소와 우편소를 엄습하려 하니 왜경과 주둔 일병이 총을 쏘아 대응하고 해산하는 군중을 마구 검거하였다. 그 결과 백여 명이 검거되었고, 주도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위와 같은 애국지사들의 공로를 기리어 충청북도 증평 삼일공원 내에 3.1독립운동의거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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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한 공적비
윤병한(1873-1932)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대한제국의 육군참위로서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군대가 강제해산을 당하자 의병에 참여하여 일제에 항쟁하였다. 경술국치를 당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고향인 농민계몽에 힘 쓰던 중, 전국적으로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광혜원(廣惠院)의 정관옥(鄭寬玉), 오은영(吳殷泳)과 의논하여 자신이 경영해 오던 회죽리 일대의 면유림(面有林)에 나무를 심는 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일인 4월 2일 식목 작업 중에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의하고, 거사일에 제일 먼저 앞장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정운화(鄭雲和), 남계홍(南啓弘), 백선옥(白先玉), 이영호(李榮鎬) 등 200여 명이 독립만세를 따라서 외쳤다.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마을 안을 행진하다가, 만승면(萬升面) 사무소에 이르러 면서기에게 같은 조선 사람으로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면서 면사무소에 투석하고 곡괭이 등으로 파괴하는 동시에 인근에 새로이 건설 중이던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공사 현장의 건축자재 등을 폐기시키고 벽을 곡괭이로 헐어버리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이튿날 광혜원 장날을 이용하여 계속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꾀하여, 4월 2일 저녁에 광신사(廣信社)에서 만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라는 경고문 등을 면사무소 소사인 박수문(朴壽文)에게 20여 매를 인쇄하게 하였고, 이를 장터 곳곳에 붙여놓게 하였다. 4월 3일 장터에 모인 2천여 명의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하던 중, 진천에서 온 10여 명의 일본 헌병이 무차별 발포함으로써 유치선(柳致先)과 그의 어머니가 적탄에 맞아 현장에서 희생된 것을 비롯하여 10여 명이 순국하고 많은 부상자를 낸 채 시위군중이 해산하였다. 4월 4일에 진천에서 일본 헌병 20명을 파견하여 광혜원 독립만세시위 주동자의 검거를 시작하였다. 결국 윤병한도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그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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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동상
이상설(1870-1917)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 시절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1904년 6월 일본이 전국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에 선임되고 이준(李儁)이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이상설은 그 늑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거듭하여 올렸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4월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북간도의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8월경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숙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간도 일대의 교육 구국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다는 칙명을 받았다. 비록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세 밀사들은 6월 27일에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결국 1916년 중병에 걸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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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복 사적비
충청북도 진천에 위치한 채수복의 비이다. 채수복(1910-1945)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이다. 서울 협성실업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독립운동이 확대되면서 서울까지 파급되자 1939년 1월에 같은 학교 학생들을 주도하여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일경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했다가 일본으로 잠입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1943년경에 채수복은 경도신문사의 기자로 근무하던 중, 알 수 없는 죄명으로 일경에 다시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3월 11일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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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 항일의거비
한봉수(1883-1972)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근무하다가 1907년 조선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그해 음력 8월에 의병장 김규환 의진에 가담하여 일본군의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였다. 1907년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병진을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라 칭하였다. 이후 강원으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고, 의병장 조운식(趙雲植)과 적과 맞설 계획을 논의하고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식량과 무기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점점 강해짐에 결국 의병을 해산하고,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1910년 소위 내란죄 및 강도·살인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았으나, 경술국치가 이루어짐에 따라 1910년 8월 29일 사면을 받아 면소 판결되어 석방되었다.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 즈음에 홍명희,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 7일 청주의 서문장터(우시장)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 다시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