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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한 창의숭모비
김상한(1842-1917)은 1907년 김상한은 십 수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강년 의진에 나아가 의진의 별진장(別陣將)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이강년 의지에서 독립하여 경북지방 일대의 의병장이 되고 부하 7백 명과 함께 문경령(聞慶嶺) 산 아래에서 적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때에 따라 운강 의진과 연합전략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907년 3월 1일 경북 조령(鳥嶺)에 포진, 11월 문경 동로면에서 적 8백 명과 교전등 많은 전투를 벌이다가 1917년 10월에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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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한 숭모비
김상한(1842-1917)은 1907년 김상한은 십 수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강년 의진에 나아가 의진의 별진장(別陣將)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이강년 의지에서 독립하여 경북지방 일대의 의병장이 되고 부하 7백 명과 함께 문경령(聞慶嶺) 산 아래에서 적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때에 따라 운강 의진과 연합전략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907년 3월 1일 경북 조령(鳥嶺)에 포진, 11월 문경 동로면에서 적 8백 명과 교전 등 많은 전투를 벌이다가 1917년 10월에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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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규 묘
김석규(1888-1929)는 마정삼(馬正三)의 아들 마만봉(馬萬奉)·마뇌병(馬雷炳)·마도현(馬道賢) 등과 박영관(朴泳寬)의 아들 박순구(朴順九) 등이 원수를 갚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일경을 살해할 목적으로 장총단(長銃團)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였다. 1921년 9월 어은리(於隱里)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이후 마남룡(馬南龍)·전봉학(全鳳學) 등과 군자금 모집과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7년 11월 붙잡혔다. 이후 사형이 선고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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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일 창의공로숭모비
권용일(1884-1971)은 1907년 의병에 투신하여 의병장 이강년의 우군선봉(처음), 도선봉(후)를 맡아 청풍과 충주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6월, 제천, 보평, 연풍 유치산, 죽령, 안동 서벽 등지의 전투에서 좌군선봉 백남규와 함께 다대한 공을 세우고 수백명의 왜적을 도륙 포로하였다. 이강년이 체포된 후, 전승지 김규환, 이범구, 김규철 등과 모의하여 고종에게서 원세개(袁世凱)에의 청병조서(請兵詔書)를 받아 출국 중 발각되어 타 삼인은 체포되고 혼자 망명에 성공하였다. 이후 해방 때까지 망명 생활하다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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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승 묘
이주승(1868-1946)은 1905년 을사조약의 늑결 이후 단양(丹陽)에서 이강년(李康秊)이 재거(再擧)하게 되었고, 입진(入陣)하여 좌종사(坐從事)에 임명되어 제천·문경(聞慶) 등지를 전전하며 일군과 싸웠다. 1908년 6월, 까치성〔鵲城〕전투에서 이강년 의병장이 부상을 입고 붙잡힐 때 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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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승 묘
이조승(1873-1900)은 유인석(柳麟錫)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진에서 스스로 종사관으로 참가하여 의병대장을 보좌하였다. 1896년 400명의 병력으로는 부족하여 사방에 통문을 보내어 병력을 강화하였는데, 이조승은 승지로서의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5백명의 민병을 거느리고 대진에 합세하여 군세를 크게 떨치게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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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승, 이조승 의병공적 숭모비
이주승(1868-1946)은 1905년 을사조약의 늑결 이후 단양(丹陽)에서 이강년(李康秊)이 재거(再擧)하게 되었고, 입진(入陣)하여 좌종사(坐從事)에 임명되어 제천·문경(聞慶) 등지를 전전하며 일군과 싸웠다. 1908년 6월, 까치성전투에서 이강년 의병장이 부상을 입고 붙잡힐 때 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조승(1873-1900)은 유인석(柳麟錫)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진에서 스스로 종사관으로 참가하여 의병대장을 보좌하였다.1896년 400명의 병력으로는 부족하여 사방에 통문을 보내어 병력을 강화하였는데, 이조승은 승지로서의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5백명의 민병을 거느리고 대진에 합세하여 군세를 크게 떨치게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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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의병광장
제천의병광장은 남산전투에서 순국한 이름 모를 수많은 의병들의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5년 만들어진 광장이다. 제천의병광장은 충북 제천에 위치하고 있으며, 제천 야외음악당 일부를 제천의병광장으로 부르고 있다. 을미사변 이후 제천에서는 을미의병이 창의되며 의암 유인석 대장이 이끄는 제천의병이 시작되었다. 현재 제천시 화산동의 제천교육지원청에서 야외음악당, 실내체육관, 공설운동장 일대가 1896년 5월 25일에 남산전투에서 안승우 중군장과 홍사구 종사관을 비롯한 수많은 제천의병들이 죽음을 맞이한 남산성전투 전적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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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병 남산 전투지
제천의병 남산전투지 안내판은 충북 제천에 있으며, 충청북도제천교육지원청 앞에 위치하고 있다. 제천의병 남산 전투지는 1896년 5월 25일 제천의병이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의병장 안승우와 홍사구가 여기서 순국하였다. 제천의병은 일제의 압력으로 출동한 관군과 제천 고장숲(현 영천동 역사마을)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전투 초기 의병은 관군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 기세를 올렸으나, 갑작스런 비바람으로 화승총을 쏠 수 없게되자 남산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남산에서 관군을 막고 있던 중군장 안승우는 대세가 기우는 상황에서도 의병들을 독려하다가 관군의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안승우의 곁을 지키던 종사 홍사구도 이때 함께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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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병 남산 격전지
제천의병 남산 격전지 안내판은 충북 제천에 위치하며, 정봉산 정상에 올라가면 볼 수 있다. 1895년 일제 침략에 맞서 제천의병 일만 병력이 충주성을 점령후 물러나 제천을 본부로 삼아 주둔하면서 계속 투쟁하였다. 1896년 5월 25일 일본군과 친일파 관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맞서 고장숲(현 영천동 역관사마을) 전투에서 3차례나 적을 물리쳤으나 오후에 갑자기 흙비가 쏟아지면서 의병들의 중요장비인 화승총이 비에 젖어 사격을 할 수가 없어 전투력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남산에서 항전을 하게 되었는데 중군장 안승우와 종사 홍사구는 의병들을 독려하며 분투하였지만 전세가 불리하자 주변의 의병들은 모두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남산에서 항전한 이곳을 남산 격전지라고 한다. 그 후 총격을 받은 안승우는 회유하는 적을 매섭게 꾸짖으며 순절하고, 홍사구 역시 스승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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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군 독립만세 발원지 기념비
증평군 독립만세 발원지 기념비는 충북 증평에 있다. 1919년 4월 10일 도안면 광덕리 구계마을에서 오후 5시경부터 약 300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일제 경찰이 무력 탄압하여 1명의 순국자가 발생한 독립만세시위의 역사적 사실을 알리기 위해 건립한 기념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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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 집
연병호(1894-1963)는 충청북도 괴산(현 증평) 사람으로, 1919년 4월에 서울에서 이병철과 협의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조용주, 안재홍, 김홍식, 김연우, 김태규, 이의경, 조소앙 등이 합류하여 역할을 맡았다. 그중 연병호는 조용주와 함께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창립된 최초의 단체로, 임시정부에 대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통신하여 주는 것,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 그리고 선전활동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경상북도 도 경찰은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애국부인회와 연계하여 서울에 본부, 각 지방에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때 연병호도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다시 상해로 탈출한 그는 1921년 4월 한인대동(韓人大同)을 목적으로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世界韓人同盟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 김현구, 조소앙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수습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로의 의견이 부합되지 않자, 조소앙, 김용철, 조완, 이기룡 등과 함께 탈퇴하였다. 1929년 말에는 안창호, 이동녕, 김구, 엄항섭, 이시영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연계하여 조국광복운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2월에는 윤기섭과 함께 재남경(在南京) 한국혁명당 대표로서 재만(在滿)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홍면희, 김원식 등과 회합하고 독립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양 단체를 통합하여 새로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였다. 1935년 1월 재남경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집행위원이던 연병호는 정무(政務)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어, 의열단(義烈團)을 다시 통합하여 1935년 7월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그는 또한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 무렵에 독립공론(獨立公論)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그는 일제 앞잡이인 이갑녕(李甲寧)의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총영사관의 경찰의 추적을 받아 1937년 1월 7일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