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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용규 의병순절숭모비
주용규(1845~1896)는 15세에 과장(科場)에서 시문으로 이름을 날리고, 향시(鄕試)와 성시(省試)에 연이어 합격하였으나, 국가가 점점 혼란스러워지자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895년(고종 32) 장담(長潭)에서 『성재집(省齋集)』 간행에 종사하다가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성재집』 간행을 중지하고 유인석(柳麟錫)을 주석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유인석의 휘하에서 참모로 활약하면서 팔도(八道)와 백관(百官), 각 국 공사(公司)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짓기도 하였는데, 이듬해인 1896년 충주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주용규의 아들인 주현오(朱鉉五)와 주현삼(朱鉉三)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이강년(李康䄵)과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모두 절사(節死)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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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태, 이용준 추모비
이용태(1890~1966)는 제천군 백운면장(白雲面長)으로 재직하였고, 1928년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39년 4월 만주로 망명하여 제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으로부터 대종교에 관한 해설을 듣고 전교로 승진하였으며, 경의원장(經議院長)이라는 중책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1월 일제의 대종교 말살정책으로 간부 24명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8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이용준(1907~1946)은 신간회(新幹會)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30년 동아일보 봉천(奉天)지국 보급원으로 만주로 건너갔고, 1931년 5월 상해(上海)에 있는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무력적인 항일투쟁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백정기(白貞基)의 권유에 의거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에 입단하여 엄순봉(嚴舜奉)·김성수(金聖秀)와 함께 활동하였다. 1932년 상해사변이 발생하자 일시 피신하였다가 유기석(柳基石)의 권유로 천진 일본총영사관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큰 피해는 입히지 못하고 일부를 파괴하는데 그쳤다. 1933년 3월, 상해에서 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의 암살계획을 수립하였으며, 1935년 3월, 정화암(鄭華岩)과 함께 엄형순·이규창(李圭昌) 등으로 하여금 상해 거류민회 부회장인 친일파 이용로(李容魯)를 총살, 처형하도록 하였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가입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8년 12월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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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태 흉상
이용태(1890~1966)는 제천군 백운면장(白雲面長)으로 재직하였고, 1928년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39년 4월 만주로 망명하여 제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으로부터 대종교에 관한 해설을 듣고 전교로 승진하였으며, 경의원장(經議院長)이라는 중책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1월 일제의 대종교 말살정책으로 간부 24명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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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준 흉상
이용준(1907-1946)은 신간회(新幹會)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30년 동아일보 봉천(奉天)지국 보급원으로 만주로 건너갔고, 1931년 5월 상해(上海)에 있는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무력적인 항일투쟁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백정기(白貞基)의 권유에 의거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에 입단하여 엄순봉(嚴舜奉)·김성수(金聖秀)와 함께 활동하였다. 1932년 상해사변이 발생하자 일시 피신하였다가 유기석(柳基石)의 권유로 천진 일본총영사관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큰 피해는 입히지 못하고 일부를 파괴하는데 그쳤다. 1933년 3월, 상해에서 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의 암살계획을 수립하였으며, 1935년 3월, 정화암(鄭華岩)과 함께 엄형순·이규창(李圭昌) 등으로 하여금 상해 거류민회 부회장인 친일파 이용로(李容魯)를 총살, 처형하도록 하였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가입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8년 12월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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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삼 묘
이맹삼(1867-1919)의 이명은 이희민(李喜敏)이며, 묘비에도 본명인 이맹삼이 아닌 이명 이희민이 적혀있다. 1919년 4월 17일 제천군 제천면(堤川面)에서 이범우(李範雨)·장용근(張用根)·이기하(李起夏)·권종필(權鍾弼)·전필현(全弼鉉)·조명구(趙明九)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제천 남부지역의 책임자로 많은 주민을 이끌고 시위하던 중 일군 수비대의 위협으로 해산하였으나, 오후 6시 쯤 다시 군중을 규합하여 경찰주재소로 향하여 시위행진하다가 일경의 무차별 사격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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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섭 제단비
윤정섭(1845-1913)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 공포되자 유인석(柳麟錫)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충북 제천에서 진용을 재편성하였는데, 이때 윤정섭도 의진편성에 참여하여 참모로 선임되었다. 1896년 2월 충주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떨쳤고“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이란 격문을 관리들에게 보내어 각성을 촉구하였고, 윤정섭은 동생인 윤양섭(尹陽燮)과 함께 충주성에서 힘을 다해 의진을 도왔다. 이후 유인석을 수행하여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심양에서 중국 정부와 군사제휴를 협의하는 등 항전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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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철 공적비
김규철(1881-1929)은 1907년 8월 1일 군대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고, 김규철은 단양을 근거지로 이명상(李明相)과 더불어 의거를 일으켜 중군장(中軍將)이 되었으며, 대체로 단양 청풍(淸風) 충주(忠州)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9월 죽령(竹嶺) 지역에서 4백여 명을 인솔하고 적과 전투를 전개하여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후 1922년 군자금(軍資金)을 모금하여 독립군에게 전하기 위하여 상해(上海)로 가던 도중 인천(仁川)에서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5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한편 이강년의 '창의 일록'을 간행하는 사업에 참여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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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철 묘
김규철(1881-1929)은 1907년 8월 1일 군대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고, 김규철은 단양을 근거지로 이명상(李明相)과 더불어 의거를 일으켜 중군장(中軍將)이 되었으며, 대체로 단양 청풍(淸風) 충주(忠州)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9월 죽령(竹嶺) 지역에서 4백여 명을 인솔하고 적과 전투를 전개하여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후 1922년 군자금(軍資金)을 모금하여 독립군에게 전하기 위하여 상해(上海)로 가던 도중 인천(仁川)에서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한편 이강년의 '창의 일록'을 간행하는 사업에 참여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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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한 묘
김상한(1842-1917)은 1907년 김상한은 십 수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강년 의진에 나아가 의진의 별진장(別陣將)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이강년 의지에서 독립하여 경북지방 일대의 의병장이 되고 부하 7백 명과 함께 문경령(聞慶嶺) 산 아래에서 적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때에 따라 운강 의진과 연합전략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907년 3월 1일 경북 조령(鳥嶺)에 포진, 11월 문경 동로면에서 적 8백 명과 교전 등 많은 전투를 벌이다가 1917년 10월에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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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묵 공적비
신광묵(1872-1949)은 1896년 유인석(柳麟錫) 의병장이 거의하자 입진하여 활동하였고, 유인석 의병장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자 은신 중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정미7조약 이후 이강년(李康秊)의진에 참여하였고, 신광묵은 좌종사(坐從事)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강년 의병장이 순국하자 의진은 와해되었지만, 신광묵은 계속해서 일제에 항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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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묵 묘
신광묵(1872-1949)은 1896년 유인석(柳麟錫) 의병장이 거의하자 입진하여 활동하였고, 유인석 의병장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자 은신 중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정미 7조약 이후 이강년(李康秊)의진에 참여하였고, 신광묵은 좌종사(坐從事)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강년 의병장이 순국하자 의진은 와해되었지만 신광묵은 계속해서 일제에 항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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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옥 묘
최대옥(1866-미상)은 1907년 의병운동에 투신하여 동료 20여 명과 함께 화승총을 휴대하고 충북 제천군 근우면 부근에서 활동하였고,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비치리에서 소 1마리를 징발하는 등 군수품 보급에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