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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원 창의구국기념비
이만원(1867~1944)은 1896년에는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 의진의 독전장(督戰將) 겸 유격장(遊擊將)으로 활약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의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충북 제천(堤川)을 비롯하여 청풍(淸風) 까치성 싸움에 이르기까지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9년 1월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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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재
제천 박약재는 충북 제천에 위치해있으며, 기존 명칭이던 념수재(念修齋)에서 박약재로 명칭이 바뀌었다. 박약재는 진주강씨 문중 강당으로, 조선 중기 처음 세워졌다. 1905년 삼월 을미일에 의암 유인석이 만주로부터 창의열사를 이곳으로 회합하였고, 이때 수많은 열사들이 의병재기를 맹세하고 념수재 현판을 박약재로 고쳐 유인석의 친필로 게시하였는데, 이는 선생의 창의를 전국으로 알리자는 뜻을 지닌다. 1910년 중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의병사 기록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강년 선생의 '운강창의일록'을 이곳에서 강순희, 박정수 등이 1907년에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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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희 묘
강순희(1868~1929)는 1896년 유인석(柳麟錫) 의진에서 활동하였으며, 1905년 9월 정운경(鄭雲慶) 의진에 참가하였는데, 원주진위대의 불의의 습격을 받고 정운경 의병장이 붙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강년이 1907년 7월 「정미7조약」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자, 이강년(李康秊) 의진에서 사서(司書)로 활약하였다. 이 기록들이 이강년 의병장의 창의록인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을 저술 편집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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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우 추모비
이범우(1892~1971)는 제천 장터에서 권종필·이기하(李起夏)를 만나서 구체적인 독립만세 시위운동 거사를 협의하고 있었는데, 전날 제천 공립보통학교 졸업생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다 누설되어 주동자가 검거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분하여, 즉석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뜻을 모았다. 전필현(全弼鉉)이 가세하여 이날 오후 6시쯤 제천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수차례 선창하니 모두 호응하였고, 그러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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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탑
충북 제천 의림지에서 용두산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비룡담 저수지 아래에 위치한 솔밭공원을 만날 수 있다. 솔밭공원의 끝자락에 의병탑, 충혼탑, 충혼의 빛, 반공위령탑, 월남참전기념탑, 대한민국무공수훈자 공적비 등 6개의 기념탑이 나란히 들어서 있다. 제천은 의병의 고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제천의병의 역사적 의미가 크다. 솔밭공원 내 의병탑은 그러한 제천의병의 활동을 알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마련됐다. 제천 솔밭공원은 저마다의 의미를 담은 6개의 탑이 한 데 모여 나라를 지키기 위한 선열들의 정신을 기리면서 시민들에게 편안한 휴식을 주는 곳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현충일 추념식이 거행되고, 수시로 많은 참배객들이 다녀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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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우 묘
이범우(1892~1971)는 제천 장터에서 권종필·이기하(李起夏)를 만나서 구체적인 독립만세 시위운동 거사를 협의하고 있었는데, 전날 제천 공립보통학교 졸업생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다 누설되어 주동자가 검거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분하여, 즉석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뜻을 모았다. 전필현(全弼鉉)이 가세하여 이날 오후 6시쯤 제천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수차례 선창하니 모두 호응하였고, 그러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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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의병장 집결지 (영호정)
영호정은 제천 의병장 집결지였으며, 1807년 이경집이 건립한 후, 6.25 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그의 후손이자 3.1운동 때 제천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범우가 1954년에 중건하였다. 화강암 주춧돌 위에 건축된 목조단층 정자리 건평이 13㎡(4평) 팔작지붕에 정면2칸, 측면 2칸으로 되어있다. 동쪽 우측 칸에 ‘영호정(暎湖亭)’이라 쓴 현판을 걸었으며, 누마루로 오르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4면에는 난간을 만들지 않은 대신 한 자 높이 정도로 머름을 만들었다. 정미의병 당시, 이강년이 제천천남전투에서 승리 후 영호정에서 부하 장수들과 정치를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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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응 창의숭모비
이소응(1852~1930)의 이명은 이선민(李宣愼)이고, 호는 습재(習齎)이다. 이소응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나자, 1896년 춘천에 집결한 유생 유중락, 이만응 등과 농민 1,000여 명에 의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병항쟁을 독려하는 격문을 8도에 보냈고 유인석의 의진으로 입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1930년 3월 순국하였다. 춘천의 의병운동과 의암 의진의 활동 상황을 기록하여 「습재연보」「습재선생문집」 등의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 활용되고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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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병창의지 (자양영당)
제천 자양영당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유중교(柳重敎)[1832~1893]가 후진을 양성할 목적으로 1889년(고종 26)에 창주정사(滄州精舍)를 세운 강학처를 기반으로, 1906년 이소응(李昭應)의 주도하에 화서학파에서 존중하는 선현들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면서 창건되었다. 1977년에 있었던 제천 자양영당 전면 보수 공사 전에는 지붕이 돌기와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1984년 12월 3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1995~2001년에 제천 자양영당 보수, 의병 사당인 숭의사 신축, 의병 전시관과 의병 탑 건립 등 제천 자양영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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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성 묘
박여성(1860-1908)의 이명은 박성렬(朴成烈)이며, 1907년 8월 평양진위대(平壤鎭衛隊)가 해산당한 후 청풍(淸風)으로 내려와 조동교(趙東敎)·황대성(黃大成)·조동규(趙東奎)·방필성(方必成)·박덕준(朴德峻)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했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였으며 충주(忠州)로 퇴각시켰고, 다음날에도 기습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 양재원(梁在遠)과 합세, 인제(麟蹄)를 공격하여 군청과 주재소(駐在所)·우편소(郵便所)를 습격하고 일진회원(一進會員)을 응징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08년 10월 13일 충주 하달천(下達川)에서 일군과 교전하던 중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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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응 묘
이소응(1852~1930)의 이명은 이선민(李宣愼)이고, 호는 습재(習齎)이다. 이소응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나자, 1896년 춘천에 집결한 유생 유중락, 이만응 등과 농민 1,000여 명에 의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병항쟁을 독려하는 격문을 8도에 보냈고 유인석의 의진으로 입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1930년 3월 순국하였다. 춘천의 의병운동과 의암 의진의 활동 상황을 기록하여 「습재연보」「습재선생문집」 등의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 활용되고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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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이 묘
김선이(미상~1896)은 서상렬(徐相烈)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충청·강원도에서 활약하였다. 일제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삼국개입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일제는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극악한 방법까지 동원하였고, 마침내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을미개혁(乙未改革)을 실시하면서 단발령까지 강행하였다. 이렇게 되자, 경기도 양평지방의 유인석의 제자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하여 거의를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서상렬(徐相烈)을 중심으로 이필희(李弼熙)·안승우(安承禹)·이춘영(李春永) 등이 거병하였다. 이 때 김선이는 처음부터 서상렬 의병장을 따라 다니며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러던 중 제천전투에서 유인석 의진이 패한 후 유인석은 1896년 7월 11일 강원도 대화에 이르러 서상렬·이강년과 함께 평안도 방면으로 갈 것을 결정하고 관서지방 이동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이에 서상렬은 전군, 이강년은 후군으로 한 서행장정(西行長征)의 행렬이 태백산맥을 따라 북으로 이어졌다. 서상렬은 강원도 양구(楊口) 교내(橋內)에서 적을 만나 싸우다가 군사를 이끌고 7월 22일 낭천(狼川:지금의 華川)으로 들어갔는데, 이 때 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 순국하였다. 당시 서상렬 의병장을 보좌하던 김선이도 서상렬의 시신을 붙들고 적을 꾸짖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전투가 끝나자 그 고을 수령이 서상렬 의병장과 김선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함께 길가에 묻었다. 그 후 석달이 지나서 사람들이 시신을 찾아 반장(返將)하고자 하였으나, 적의 기세가 너무 포악하여 수습할 수가 없었다. 이 때 의거를 같이 한 사람인 채국보(蔡國輔)가 적중으로 뛰어들어 서상렬 의병장과 김선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반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