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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27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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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구 묘
홍사구(1878~1896)의 자는 우용(又容)이며, 홍사구는 1895년 스승인 안승우가 제천(堤川)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그의 종사(從事)로 활약하였으며, 1896년 스승 안승우가 적의 탄환에 맞아 사로잡히자 홍사구만이 남아서 호위하였다. 안승우가 적에게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금수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각이 있다면, 충신·역적과 사람·짐승의 구별은 알 것이다. 우리가 대의(大義)를 의지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인데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며 몸을 돌리면서 감추어 두었던 칼을 빼 적을 내려쳤지만, 홍사구의 목숨을 빼앗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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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욱영 묘
최욱영(1854~1919)의 이명은 최태준(崔泰俊)이며, 1907년 원주(原州)의 의병대장 민긍호(閔肯鎬)로부터 총기를 받아 안강리(安康里)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후 10여 개의 군(郡)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나 횡성(橫城)에서 교전 중 대퇴부 상단에 총상을 입었다. 1907년 8월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입대하여 군사장(軍師將)에 임명되어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1908년 귀향하여 이름을 권태준(權泰俊)이라 변성명하여 은신하였다. 1913년 2월 중순 의병 김재성(金在性)으로부터 고종황제의 밀서를 받아서 군자금 모금을 계획하였고, 1914년 10월부터 안동(安東)·제천(堤川) 등지에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을 받았으며,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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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묘
김상태(1862~1911)는 1896년 이강년(李康秊)이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였고, 유인석(柳麟錫)이 영월(寧越)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 의진에 가담하여 싸웠다. 제천 의병장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가 순절하자, 유인석은 만주로 망명하였고, 김상태는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을 따라가 섬기다가 3년 뒤에 귀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상태는 동지 정운경(鄭雲慶)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7년 이강년의 의진과 합세하였다. 이강년과 김상태의 관계는 남다른 관계였는데,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되자 그의 군사지휘권을 인계 받아 단양(丹陽)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총독부는 그에게 상금 오백금(五百金)을 걸었고, 우중수(禹中守)가 그를 배신하여 고발하였으며, 결국 체포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적의 손에 욕보느니 차라리 자처하겠다" 는 결심을 하고 단식을 하였다가 1911년 9월 21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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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규 묘
이정규(1864~1945)는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유인석(柳麟錫)과 제천, 장담(長潭) 등지에서 거의하여 의진을 편성하였다. 제천의진의 참모장(參謀將)으로 임명되었고, 1896년 1월 충주성을 공격·함락하는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2월 유인석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제천·충주·단양·풍기·평창 등지로 행군하면서 군수품의 보충을 하였고, 북간도 통화현(通化縣)에서 유인석의 의병운동 재거를 보좌하였다. 또한 종의록(從義錄)을 저술하여 초기 의병운동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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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탄압지 제천향교
고려후기에 창건된 제천향교는 1389년(공양왕 1)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백운면 화당리에 창건되었다. 1590년(선조 23)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퇴폐되었으며, 그 뒤 1907년(순종 1) 의병장 이강년이 일본과 교전 중일 때, 일본의 의병말살 작전으로 제천 시내 전역이 붙타버렸으며, 그 당시 제천향교도 불에 타 버렸다. 1909년 대성전이 중건된 것을 시작으로 1922년에 명륜당, 1980년에 동재, 1981년에 서재 등을 중건하였다. 대성전은 제사 공간이며, 명륜당은 학습 공간,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갑오개혁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공자의 제사를 지내며, 초하루·보름에 향을 피운다. 1981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지방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설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운영하고 있다.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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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피체 유적비
이강년(1858~1908)의 자는 낙인(樂仁), 낙인(樂寅), 호는 운강(雲岡), 이명은 이강년(李康年)이다. 이강년은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용양위부사과로서 선전관이 되었지만,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제천으로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같은 해 4월, 관군과 제천에서 싸우다가 패한 유인석이 요동으로 가자, 이강년도 의병을 해산하고 유인석을 따라갔고, 그곳에서 3년 동안 지내고 돌아와 단양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907년 정미칠조약으로 한국 군대가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때마침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부대와 합세해 충주를 공격하였다. 1907년 12월에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양주에 집결해 13도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이에 참석하였다. 1908년 장병들을 독려하여 용소동전투(龍沼洞戰鬪), 갈기동전투(葛其洞戰鬪), 백담사전투(百潭寺戰鬪), 안동서벽전투(安東西壁戰鬪)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8년 6월 4일 청풍(淸風)·작성(鵲城)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결전에서 발목에 총알을 맞고 붙잡혔고,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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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전적추모비
이강년(1858~1908)의 자는 낙인(樂仁), 낙인(樂寅), 호는 운강(雲岡), 이명은 이강년(李康年)이다. 이강년은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용양위부사과로서 선전관이 되었지만,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제천으로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같은 해 4월, 관군과 제천에서 싸우다가 패한 유인석이 요동으로 가자, 이강년도 의병을 해산하고 유인석을 따라갔고, 그곳에서 3년 동안 지내고 돌아와 단양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907년 정미칠조약으로 한국 군대가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때마침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부대와 합세해 충주를 공격하였다. 1907년 12월에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양주에 집결해 13도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이에 참석하였다. 1908년 장병들을 독려하여 용소동전투(龍沼洞戰鬪), 갈기동전투(葛其洞戰鬪), 백담사전투(百潭寺戰鬪), 안동서벽전투(安東西壁戰鬪)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8년 6월 4일 청풍(淸風)·작성(鵲城)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결전에서 발목에 총알을 맞고 붙잡혔고,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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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경 집
정운경(1861~1939)은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유인석 의진에 참가하였고, 중군장에 임명되어 충주성(忠州城)을 점령하고 전공을 세웠다. 이후 전군장 겸 전군군사사(前軍軍事師)에 임명되어 충주·제천 등지에서 적군과 교전하였으며, 원주 대평교(大平橋)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의진은 일단 해산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단양(丹陽)일대에서 이규석(李圭錫)·김홍경(金鴻卿)·강수명(姜秀明)·지원영(池源永)·김지현(金知鉉)·정해훈(鄭解薰) 등과 더불어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투 태세가 정비되기도 전에 불의의 습격을 받아 장병들이 흩어지고 정운경은 영춘에서 체포되어 유배 15년형에 처해져 황주 철도(黃州 鐵島)로 유배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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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경 묘
정운경(1861~1939)은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유인석 의진에 참가하였고, 중군장에 임명되어 충주성(忠州城)을 점령하고 전공을 세웠다. 이후 전군장 겸 전군군사사(前軍軍事師)에 임명되어 충주·제천 등지에서 적군과 교전하였으며, 원주 대평교(大平橋)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의진은 일단 해산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단양(丹陽)일대에서 이규석(李圭錫)·김홍경(金鴻卿)·강수명(姜秀明)·지원영(池源永)·김지현(金知鉉)·정해훈(鄭解薰) 등과 더불어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투 태세가 정비되기도 전에 불의의 습격을 받아 장병들이 흩어지고 정운경은 영춘에서 체포되어 유배 15년형에 처해져 황주 철도(黃州 鐵島)로 유배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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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수 집
황학수(1877~1953)의 자는 필옥(弼玉), 호는 몽호(夢乎), 이명은 이국현(李國賢)이다. 1898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參尉)에 임관되었고, 이후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의 교관이 되었다. 1907년 8월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자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였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3·1운동 이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원 및 군무부 비서국장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0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장과 중앙집행위원 및 군사부장(軍事部長)을 역임하면서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 1922년 통군부(統軍府)가 조직되자 군사부장을 역임하였으며, 여러 일이 있은 후, 1923년 통의부로 돌아와 군사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한국노병회, 1927년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하였으며, 1930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도 참여하고, 1932년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참여하였으며 1938년 7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위원, 1939년에 임시의정원 의원에 재선되었다. 그 뒤 충칭[重慶]에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으며 생계부장(生計部長)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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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운, 정호섭, 서상무, 안춘홍, 전재규 창의기념비
백광운, 정호섭, 서상무, 안춘홍, 전재규 창의기념비는 충북 제천에 위치해있으며, 충북 제천 출신의 항일독립운동가인 다섯 명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백광운의 본명은 채찬이며, 1905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둔전제를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3·1운동 후 서로군정서에 가입 후 동지들과 국내에 잠입하여 일본기관 파괴, 경찰주재소 습격 등을 전개하였으며,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에 소속되어 일본총독 사이또를 습격하는 등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정호섭은 1914년 7월 북간도 연길현에 참모부를 설치하고 활동하였고, 무기를 소지하고 함경도에 잠입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서상무는 고종 때에 칙유상관이 되었지만 부관 김연식과 만주에 가서 유인석을 초청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안준홍은 1907년 이강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후에 의병을 양성하는 교관으로 독립운동에 크게 활약하였다. 전재규는 참봉벼슬을 지내다가 1896년 충주, 단양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체포되어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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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원 집
이만원(1867~1944)은 1896년에는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 의진의 독전장(督戰將) 겸 유격장(遊擊將)으로 활약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의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충북 제천(堤川)을 비롯하여 청풍(淸風) 까치성 싸움에 이르기까지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9년 1월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