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279건
-
대소 기미독립만세기념비
1919년 4월 1일 이곳 대소면 오류리 뒷산에서 이성교, 임백규, 임경순, 김달년, 김동식, 송인식, 박병철, 박제성, 이철우, 유해길, 이용학, 민병철, 박영록 등이 모여 4월 2일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결의하였고, 4월 2일 오미장터에서 천여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앞장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만세운동을 주도한 주요 인물들은 모진 고초와 옥고를 치렀다. 임백규, 김동식, 김달년은 징역 6월형, 송인식, 박병철은 벌금형, 이철우는 징역 3월형, 이용학, 민병철, 박제성, 박영록은 태형을 선고받았다. 기미독립만세기념비는 위와 같은 대소면 오류리 출신 선열들의 독립의지와 민족정기 후세에 널리 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건립되었다.
-
안재헌 묘
안재헌(1900-1977)은 충청북도 음성(陰城) 사람으로, 1919년 4월 1·2일에 걸쳐 양재옥(梁在玉) 등과 함께 안성군 죽산(安城郡竹山) 지방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죽산공립 보통학교 학생으로서 4월 1일 이 학교에서 학생 50여 명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치고, 4월 2일 전교학생들을 동원하여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
손병희 흉상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김원조 묘
김원조(1884~1922)는 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때 이천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 군정부(軍政府)의 연락기관을 서울에 설치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1920년 12월 28일(음)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천3.1만세사적비
1919년 4월 1일, 한내장터에서 일제의 총칼 앞에 맨주먹으로 항쟁했던 것을 기리는 비다. 한내장터에서는 1919년 당시, 음성 지역에서 가장 치열하게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이 운동을 주동한 김을경, 이중곤, 권재학, 이용호, 추성열, 이교필, 안창렬, 안인흥, 안효양, 이태수, 유치수, 권중전, 박기범(朴箕範), 서홍기, 피춘호, 15명의 우국, 충절열사들의 거룩한 독립정신을 선양하고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2002년 3월에 본 비가 건립되었다.
-
장현근 신정숙 집
본 사적은 충북 음성에 위치해있으며, 1929년 안창호의 부름을 받고 함께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상해 교민단 서기, 의경대 간사, 한인청년단 이사 겸 서무부장, 김구의 비서로 근무한 장현근, 신정숙 부부가 생전에 살았던 집이다. 장현근(1909~1969)은 1926년 9월에 개성상업학교(開城商業學校)에 재학하던 중 일본인 위주로 하는 것에 저항하다가 퇴학 처분을 당한 뒤, 1927년 토리교회의 주일학교(主日學校) 교사를 하며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931년 11월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상해 교민단의 서기, 의경대(義警隊) 간사, 한인청년당 이사 겸 서무부장 등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1932년 윤봉길의사의 의거 뒤, 상해(上海) 불조계(佛租界)에서 안창호(安昌浩) 김덕근(金德根) 등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7년 이후에는 상해,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민족사상 고취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신정숙(1910~1997)은 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광복군에 입대하여 1941년 3월 1일 임시정부 청사에서 제3분처 징모위원 임명식을 갖고 신정숙은 제3분처위원 겸 회계조장으로 파견되어 활약하였으며, 1942년 10월에는 광복군 제2지대 3구대 3분대에 편성되었다. 그후 제3분처는 본부를 연산현 하구진(鉛山縣河口鎭)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신정숙은 김문호(金文鎬)와 함께 전선과 후방에서 중국 유격대와 합동 공작으로 정보, 선전공작을 활발하게 전개하며 또 포로심문을 통하여 적의 일선 및 후방에 관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여 공작에 활용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이헌표 공적비
이헌표(1841-1909)는 1882년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1892년에 접주를 하였으며, 이후 여러 지역의 접주를 하다가 1905년 정월에는 충청도 수접주의 대임을 받았다. 1899년 동학농민혁명이 분기하게 되었고 충청도 전역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이 크게 발호하였는데, 최시형 교주는 이헌표 접주에게 동학혁명군을 구원하도록 명했고, 이헌표 접주는 즉시 창의기병하여 1896년 보은 장내리와 종곡리 등 전투현장에 수백명의 원군을 보냈는데, 동학혁명군은 패전하고 말았다. 그 결과 전지에서 희생된 수많은 의병들의 유족들이 가족의 생환과 보상을 강청하였고, 관아와 조정에서는 온갖 박해를 받았지만, 혁명단심과 포교를 통한 개혁운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자 교세가 날로 확산되어 가고 민심과 천심이 개혁의 편에 서게 되자 이를 질시한 사람들이 이헌표를 질시하였고, 이로 인해 1903년과 1904년에 억울하게 악형과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
박세화 배향 사당 (충용사)
박세화(1834~1910)의 자는 연길(年吉), 호는 의당(毅堂)이며,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태백산으로 피하였고, 1893년 조정에 추천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이후에도 개혁정치에 반대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문경 산중으로 들어가 거의할 것을 의논하던 중 문경병참소에 붙잡혔으며, 8개월간 구금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남현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청풍에서 교전 중 붙잡혔고,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단식하여 23일 만에 ‘예의조선(禮義朝鮮)’이란 글을 쓰고 자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윤응선 사적비
윤응선(1853~1925)은 1895년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湖左義陣)에서 활동하였고, 1905년 박세호(朴世和)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논의하다가 체포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윤응선은 스승인 박세화와 함께 경북 문경(聞慶)의 산중으로 들어가 거의하기로 계획하였으나, 호좌의진이 충주(忠州)에 도착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05년 초에는 충북 청풍(淸風)에서 향약을 조직하고 일진회를 배척하였다. 이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월악산(月岳山) 용하동(用夏洞)에서 의거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병으로 귀가하였고, 결국 제천시(堤川市) 덕산면(德山面) 광천(廣川)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김영익 의열추모비
김영익(1898~1957)의 이명은 김영위(金榮韋), 김삼봉(金三鳳)이다. 김영익은 1919년 3월 28일 음성시장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초천리(草川里) 서당에 다니고 있던 김영익이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정민영(鄭玟永)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면서 추진되었다. 3월 27일 그들은 우선 서당에 함께 다니던 최만득(崔萬得)·정대영(鄭大永) 등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만세운동을 추진할 것을 권유하였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 제작하면서 준비하였다. 3월 28일 오후 4시경 선언서와 태극기를 운집한 군중에게 배포하였고, 김영익이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터에 모인 군중들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가행진을 전개하였다. 이후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3.1독립만세운동 유적비
충북 음성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3월 18일과 3월 28일 그리고 4월 6일 세 번 있었는데, 그중 3월 28일은 김영익의 소식에 의하여 서당생도 정민영, 최만득, 정대영 등이 음성장날에 만세운동을 할 것을 계획하였고, 장날 음성시장에에서 이들은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6일 밤 10시, 수백명의 군중이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를 주도한 주동자들은 왜경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지사들의 공훈을 널리 알리고자, 1987년 8월 15일에 본 비가 건립되었다.
-
의병7의사총
의병7의사총은 김용이, 김재관, 추성손, 우재봉, 우규하, 박원용, 오원용 등 7명의 의사가 함께 안장된 묘이다.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항일의병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는데, 7의사는 제천 의병진에 참여하여 충주성을 함락시키고, 수안보 전투에서는 정운경의 휘하에서 용감히 싸워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박달재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잡혀 1896년 2월 순국하였는데, 일본군은 처형한 칠의사의 시신을 불태웠으나 동료 의병들이 이를 거두어 남산 후록 갈마골에 합장하여 칠의사총(七義士塚)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