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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리출신 독립운동가 안내판
권태석(1895~1948)은 1919년 4월 최익환의 권유로 대동단에 참여하여 자금조달과 각종 선전문건의 인쇄 및 배포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1924년 10월에는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가담했으며 1926년 7월 조선민흥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27년 신간회 서무부장 및 총무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29년 4월 5일 조선공산당 활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6년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6월 10일 출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고한주(1895~1927), 김홍(1879~미상), 박동희(1896~1924), 박재호(1876~1947), 신업이(1899~미상)은 충북 옥천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옥천군 청산면의 만세시위는 3차에 걸쳐 일어났다. 3월 16일에 하계리 류석구(柳錫九)의 집 담에 ‘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벽보가 붙으면서 ‘만세시위운동’이 시작되었다. 1차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26일 수백명 군중이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벌인 뒤 해산하였다. 제2차 만세시위는 4월 2일 장날 하오 1시경부터 일어났다. 장꾼들은 읍민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 행진을 하다가 새벽 1시경 해산하였다. 제3차 만세시위는 4월 4일 밤 8시경부터 수천명이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고 다음날 새벽 해산하였다. 수천명의 군중이 굴하지 않고 시위를 전개하자, 일본 헌병들은 위협을 느끼고 헌병주재소로 피신한 일본인을 보호하면서 주재소를 지키다가 시위군중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5명이 순국하고 56명이 부상당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붙잡혔다. 잡힌 이들은 주재소 마당에서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는데, 비명이 며칠을 두고 계속되었다.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힌 김홍은 태 90도를, 박동희와 신업이는 태 60도를, 고한주와 박재호는 징역 1년형을, 안병하는 징역 1년 3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1983년 박재호에게, 2010년에 김홍에게 2018년에 박동희에게, 2021년 신업이에게 추서하였다. 또한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 박재호에게, 1993년 고한주와 안병하에게 추서하였다. 조동호(1892~1954)는 1914년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후, 1918년 8월 상하이에서 여운형·장덕수(張德秀)·김철(金澈)·선우혁(鮮于爀)·한진교(韓鎭敎)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윌슨대통령에게 제출하기 위한 ‘조선독립청원서’를 여운형 등과 함께 영문으로 작성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과 국무위원을 겸직하였고, 임시정부 임시사료조사편찬부 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 등과『한일관계사료집』4권을 완성해 국제연맹에 제출하였다. 1919년 차리석(車利錫)등과 함께 상해판『독립신문』발간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21년 한·중 친선 및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을 위한 상호협조를 목적으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고, 한국측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2년 김구(金九)·최석순(崔錫淳)·여운형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한국노병회를 창립하였다. 한국노병회는 ‘10년 동안 1만명의 노병 양성과 백만원 이상의 전비 확보’를 목표로 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1944년 8월 일본의 패망을 확신한 그는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으며, 선전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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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석 집
독립운동가 권태석 생가터 표지판은 권태석이 생전 살았던 집이 있었던 곳을 표시해주는 표지판이다. 권태석(1895-1948)은 이명은 이동산(李東山), 자는 경여(景汝), 호는 몽우(夢牛)이며, 1919년 서울에서 3 · 1운동을 겪고, 최익환(崔益煥)을 통해 조선민족대동단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격문 등을 작성해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20년 12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4년 10월 서울파 비밀결사 조직인 고려공산동맹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1926년 7월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결성을 주도하여 상무위원 등을 지냈고, 같은 해 10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2월 중앙위원회 조직부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2월 신간회가 결성될 때 민흥회의 신간회 합류를 주도하였고, 서무부 총무간사에 선임되었다.조선공산당은 ‘영남친목회사건’을 계기로 분열하였는데, 이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년 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는 공산주의운동과 거리를 두었다. 1945년 8 · 15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민족주의 세력 간의 협력에 앞장섰고, 1945년 12월 신한민족당 정치국 차장에 선임되었다. 1946년 1월 우익 비상정치회의주비회(非常政治會議籌備會)에서 활동하고 , 4월에는 한국독립당으로 합당에 찬성하였으며, 통합 한국독립당에서 조사부장이 되었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주장하다가 한국독립당 전당대회에서 제명당하였으며, 같은해 6월 모스크바 3상 결정을 지지하는 민주한독당을 창당하였다. 12월 민족자주연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상무집행위원, 총무국 차장에 선임되었지만, 1948년 남북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으로 가는 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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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희 집
박동희(1896-1924)는 1919년 4월 청산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태(笞) 60도(度)의 태형처분을 받았다. 청산면에서는 3월 26일 읍내에서 수백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박동희·김철수(金轍洙) 등은 시장에 모인 장꾼들과 면 소재지 일대를 활보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일본 헌병들은 위협을 느끼고 헌병주재소로 피신한 일본인을 보호하면서 주재소를 지키다가 시위군중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시위군중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56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나, 시위대는 굴하지 않고 3일 오전 1시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4일에도 오후 8시경부터 수천 명이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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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집
조동호(1892-1954)는 1914년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18년 8월 상하이[上海]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윌슨대통령에게 제출하기 위한 ‘조선독립청원서’를 여운형 등과 함께 영문으로 작성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충청도의원(忠淸道議員)과 국무위원을 겸직하였고, 임시정부 임시사료조사편찬부(臨時史料調査編纂部) 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 등과『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4권을 완성해 국제연맹에 제출하였다. 1919년 차리석(車利錫)등과 함께 상해판『독립신문』발간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21년 한·중 친선 및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을 위한 상호협조를 목적으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고, 한국측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2년 김구(金九)·최석순(崔錫淳)·여운형 등과 함께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립하였으며, 국내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3년 말 귀국한 후, 동아일보 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당할 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는데,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한 대표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다. 이후 경찰에 붙잡혀 4년의 옥고를 치렀다. 1932년 11월 출옥 후 조선중앙일보 논설부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이다가 다시 일경에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44년 8월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조직하였으며, 선전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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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청산3.1독립만세운동기념탑은 충북 옥천에 위치해있으며, 청산 3.1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탑이다. 청산 3.1독립만세운동은 충북에서 가장 치열했던 만세운동이었다. 고종의 장례일을 앞둔 1919년 3월 1일, 박재호 지사가 독립선언식을 보고 3월 26일 태극기 300장을 만들어 배포하면서 만세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청산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4월 2일 오후 1시 여러 지사들과 청산 주민,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규합하여 벌인 시위는 오후 9시경 1,20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청산초등학교 입구에서 장터까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3일 밤 8시경 수천 명의 시위군중이 헌시위 활동을 하다가 헌병주재소를 기습하여 기물을 파손하는 등의 시위가 격렬하였다. 이후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 발포로 김철수 지사 등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체포된 김인수 지사도 고문으로 순국하는 등 50~60명이 부상을 당했다. 4월 4일에는 수천 명의 군중들을 향한 일경의 무차별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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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주 공적비
애국지사 김한주선생 공적비는 충북 옥천에 위치하였으며, 김한주의 묘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고, 현재는 공적비만 존재한다. 김한주(1876-1962)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옥천군 청산면(靑山面)에서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4월 2일 청산 장날을 이용하여 운동을 벌이기로 약속하고 4월 4일 장터에 모인 군중을 규합, 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고 그는 일경에 붙잡혔다. 이후 징역 1년 3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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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곡리 마을 유래비
예곡리 마을자랑비는 충북 옥천에 자리하고 있으며, 1919년 4월 2일부터 4일까지 예곡리 출신인 순국선열 김철수, 김인수, 애국지사 김지수, 최남석 지사가 주축이 되어 이웃마을 주민들과 합세하여 펼친 만세운동이 청산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된 것을 기념하는 비이다. 청산만세운동은 김철수, 김인수, 김지수 열사 등이 중심이 된 예곡리 주민들과 김한주 열사가 중심이 된 인정·신매리 주민들이 합세하여 6백여명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5명이 순국하고 56명이 체포되어 12명이 형을 받은 운동이다.예곡리 마을자랑비는 예곡보건진료소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옆에는 애국지사 김철수 선생 공적비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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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공적비
애국지사 김철수 공적비는 충북 옥천에 있으며, 김인수, 김지수, 최남선 등과 함께 청산만세운동의 주역으로 불리는 김철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김철수(1878-1919)는 1919년 4월 3일 밤 8시경 수천명이 모인 청산면(靑山面)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현장에서 5명이 순국하고 수 십명이 부상 당하였다. 김철수는 일본 헌병의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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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바위 동학기념공원,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문바위 동학기념공원 안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비는 충북 옥천에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을 총지휘한 역사적인 장소인 한곡리를 기념하기 위한 비이다. 문바위 동학기념공원 동학농민혁명 기념비가 세워진 한곡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의 2세 교조 최시형이 대도소(大都所)를 두고, 전국의 동학도를 지휘하던 지역이다. 또한 1894년 9월, 전국 동학군에게 총기포령(총동원령)을 내리는 등, 동학농민혁명을 총지휘한 역사적 장소이다. 1893년 10월 이래로 이곳에서 제자 의암 손병희와 김연국 등 동학도들을 지도하였고, 이곳에는 최시형의 집이 남아 있고, 문바위에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새긴 이름 등이 남아 있다. 기념비는 힘차게 전진하는 옥천군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동학농민혁명 횃불을 형상화하기 위한 모양으로 제작되었고, 개혁 민족운동인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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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기념공원
김규식(1881-1950)의 호는 우사(尤史)이고, 이명은 김중문(金仲文), 왕개석(王介石), 위이민(余一民)이다. 6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선교사 언더우드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으며, 미국에서 공부한 이후,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 YMCA학교 교사, 경신학교(儆新學校) 학감으로 있었고,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191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약소민족대회 및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파리에 조선공보국(朝鮮公報局)을 설치하여 공보국 회보를 발간하고, 이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대표가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한국민족의 주장」 · 「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민족선언서를 작성, 배포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장, 학무총장 등에 선임되었으며, 1935년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그 주석이 되었고,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1945년 8 · 15 이후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의원 부의장, 3월 미소공동위원회 한국 대표를 했고, 1947년 10월 민족자주연맹 의장이 되었다. 1948년 2월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안에 반대하고, 김구와 연합하여 그 해 2월 남북협상을 제안하였으며, 남북협상 5원칙을 제시하고, 4자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북한측의 제2차 남북협상 제의를 거절하고,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하여 그 이전의 5 · 10남한단독총선거에 ‘불반대 · 불참가’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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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응삼 구 묘
조응삼(1875-1956)은 1907년 8월, 정봉준(鄭奉俊) 의진에 입진하였다. 당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에 이어서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서울의 시위대와 강화도의 진위대가 의병으로 전환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의병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보다 대중화되었다. 강원도 원주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의병장 이은찬(李殷瓚)·이구재(李九載)가 5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7월에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가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인영은 승낙한 후 원주에서 관동 창의 대장에 올랐고, 이리하여 원주를 중심으로 하여 13도 연합 의진이 구성되고 있을 때, 조응삼은 1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총기를 가지고 군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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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기미3.1독립만세추념비
음성 기미3.1독립만세추념비는 충북 음성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3년 3월 건립한 비이다. 1919년 4월 2일 오미장터에 모인 1,000여명의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고 관서를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했지만, 진천수비대의 내습으로 이성교, 임백규 등 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