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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16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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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기념비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전국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던바, 원주시 매호리에서도 애국심에 불타는 선열들이 선봉이 되어 1919년 4월 12일 밤 9시경 주민 50여 명이 향산 뒷산에 올라 궐기를 시작하였으니 순식간에 온 주민 200여 명이 합세하여 수동, 상촌, 조항을 거쳐 섬강까지 돌진하여 만세운동을 펼쳐 상실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민들 중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송병기는 10월, 성태현와 박민희는 8월, 유정근은 7월, 이두연·이종우·이정헌·김옥봉은 각각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매호리 주민들이 독립운동에 기여한 역사적 사실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매호리 노인회에서 1989년 3월 1일에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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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업 기미독립만세 기념비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에서는 1919년(기미년) 4월 9일 낮과 밤 2차례에 걸쳐 시위가 전개되었는데, 원현복·김상익·윤산악·이재손·원성규·김성관·이현순·홍대성·홍학성·함원동 등 주민 550여 명이 강인한 응집력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낮에는 사제리 백사장에서, 밤에는 자감촌 뒷산 자지봉에서 일본사람을 쫒아내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미독립만세기념비』는 1919년 4월 9일 기미년 흥업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90년 4월 4일 흥업면민 일동이 건립하여 흥업초등학교에 세웠으며, 2005년 10월 5일 한라대학교 교정으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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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 간행 각판소터
최초의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을 비밀리에 간행한 곳인 〈동경대전 간행터〉는 〈각판소터〉와 〈공방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판소는 동경대전 간행 당시 동학의 주요 인물들이 관련 업무를 총괄하던 곳이다. 〈동경대전 간행터〉는 강원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 「동경대전」은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은 후 평생에 걸쳐 한문으로 쓴 동학의 기본 경전으로, 포덕문(布德文)·동학론(東學論)·수덕문(修德文)·불연기연(不然其然)의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념 뿐 아니라 실천을 통해 완성해 나가는 동학사상이 써 있다. 최제우가 사형될 때 이 책도 불태워졌으나, 후계자이자 동학의 2세 교주인 해월 최시형이 1880년(고종 17년) 5월 9일 인제 갑둔리 김현규 집에 각판소, 숙부댁에 공방터를 설치, 5월 11일부터 간행작업을 시작해 6월 14일 목판본으로 『동경대전(東經大全)』 초판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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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 간행 공방터
최초의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을 비밀리에 간행한 곳인 〈동경대전 간행터〉는 〈각판소터〉와 〈공방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방터는 동경대전 간행 당시 실제 목판 새기는 작업을 수행하던 곳이다. 〈동경대전 간행터〉는 강원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동경대전」은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은 후 평생에 걸쳐 한문으로 쓴 동학의 기본 경전으로, 포덕문(布德文)·동학론(東學論)·수덕문(修德文)·불연기연(不然其然)의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념 뿐 아니라 실천을 통해 완성해 나가는 동학사상이 써 있다. 최제우가 사형될 때 이 책도 불태워졌으나, 후계자이자 동학의 2세 교주인 해월 최시형이 1880년(고종 17년) 5월 9일 인제 갑둔리 김현규(김치운)의 집에 각판소, 숙부댁에 공방터를 설치, 5월 11일부터 간행작업을 시작해 6월 14일 목판본으로 『동경대전(東經大全)』 초판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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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흉상, 동상(만해마을)
만해문학박물관은 한국문학사의 대표적 시인이자 불교의 대선사, 민족운동가로 일제강점기 암흑시대 겨레의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민족혼을 불어넣어 준 만해 한용운(1879 - 1944)의 문학성과 자유사상, 진보사상, 민족사상을 높이 기리고 선양하기 위해 2003년에 설립한 백담 만해마을 내에 있으며, 만해의 일대기가 연대와 주제별로 당시의 생생한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외부에는 만해 한용운의 흉상과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불교인이자 저항 시인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 운동을 하다가,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겸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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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흉상, 시비, 만해당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불교인이자 저항 시인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 운동을 하다가,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겸임했다. 만해기념관은 백담사에 위치하고 있으며, 만해의 자취와 흔적이 점점 지워져가는 것이 안타까워 오현 스님이 1996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만들고 1997년 11월 9일 개관하였다. 만해기념관 내에는 한용운이 불교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저술한 책(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 세계지리, 영환지략, 음빙실문집) 등과 유묵과 시집 「님의 침묵」 초간본을 비롯한 각종 판본, 1962년 수여된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한용운 연구논문 등이 전시돼 있으며, 만해의 출가와 수행, 3·1운동과 옥중투쟁, 계몽활동, 문학활동, 신간회 활동 등을 분야별로 나누어 만해의 일생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기념관 밖에는 만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이 조각된 만해 시비와 만해 흉상 조각이 있으며 백담사 내에는 만해당, 만해적선당, 만해교육관 등 만해 관련 건물이 들어서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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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문 비
기미독립선언문 비는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후대들에게 계승하여 민족의 단결을 굳게 하며 애국심을 함양하고 자주독립과 자주 민족임을 되새기게 하여 자유 평화 통일의 정신을 굳건히 하고자 인제군청 앞마당에 세워진 비석으로, 2009년 10월 10일 건립되었다. 비석 전면에는 기미독립선언문 한글 번역문이 새겨져 있고, 비석 하단에는 3.1운동은 한국민족운동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새로운 전기를 들었다는 문구를 새겨져 있으며, 비석 후면에는 건립 취지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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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독공지비
해월 최시형(1827 - 1898)은 1871년 3월 교조신원을 명분으로 이필제가 주도한 영해의 봉기가 실패하고 많은 동학도들이 처형당하고 투옥되면서 교단은 산산조각이 나자, 무너진 동학을 일으켜야 하는 새로운 종교적 모색이 절실한 상황에서 1873년 10월 함백산 정암사(갈래사) 적조암(寂照庵)에서 수련을 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이곳은 해월 최시형이 동행한 강수, 유인상, 김해성, 전성문과 49일간 산중 수련을 했던 곳으로, 적조암에서의 수행을 통해 또 한 단계 종교적으로 성장했다. 적조암 경내에 있던 『天道敎 第二世 敎祖 海月神師 篤工址(천도교 제2세 교조 해월신사 독공지)』 표지석은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정선문화원과 천도교단에서 정암사 관계자의 협조를 구하여 2016년 11월 동학유허지 적조암터 표지석 옆에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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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조암(동학 유허지)
동학유허지 적조암은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의 기도터로, 1872년 10월 15일부터 12월 5일까지 49일의 특별기도를 드린 곳이다. 당시 해월 최시형은 적조암의 노스님 철수좌(哲首座)의 양해를 얻어 강수, 유인상, 전성문, 김해성 등 동학의 지도자들을 대동하고 특별기도를 행하였으며, 이필제의 난(1871년 3월)으로 풍비박산이 된 동학교문이 다시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특별기도 이후 강원도 정선과 영월, 충청도 단양 등 삼남일대로 교세를 넓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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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헌 행적비
유시헌은 해월 최시형이 이필재의 난으로 인해 영월 직동 박용걸의 집에 은거하고 있을 때 찾아가 1871년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그의 집에서 고천제(告天制)라는 제례의식을 행하기 전 도접주(道接主)로 임명되어 접주들을 관장했다. 이후 해월 최시형은 유시헌의 집에 머물며 동학 역사서 「도원기서」를 저술하는 것과 동시에 비밀포교를 시작했다. 그렇게 20년 세월이 흘렀고, 정선 일대엔 동학의 교세도 크게 성장했다. 이필제 난 이후 위기의 동학 교단을 삼남(三南)은 물론 전국적인 조직으로 키우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東學 道接主 旌菴 劉時憲 先生 行蹟碑(동학 도접주 정암 유시헌 선생 행적비)』는 유시헌의 장남 유택하의 며느리 유언에 따라 1999년 4월 5일 증손이 세운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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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은담 표지석
유시헌은 해월 최시형이 이필재의 난으로 인해 영월 직동 박용걸의 집에 은거하고 있을 때 찾아가 1871년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그의 집에서 고천제(告天制)라는 제례의식을 행하기 전 도접주(道接主)로 임명되어 접주들을 관장했다. 이후 해월 최시형은 유시헌의 집에 머물며 동학 역사서 「도원기서」를 저술하는 것과 동시에 비밀포교를 시작했다. 그렇게 20년 세월이 흘렀고, 정선 일대엔 동학의 교세도 크게 성장했다. 이필제 난 이후 위기의 동학 교단을 삼남(三南)은 물론 전국적인 조직으로 키우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동학유허지 무은담은 유시헌(劉時憲)이 살던 집터로, 한때 해월 최시형이 정선지역에 동학을 일으킨 곳이며, 나아가 동학이 그 교세를 삼남으로 펼쳐나가며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기반을 이룬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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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내
동학유허지 싸내는 동학 교조인 수운 최제우의 부인 박씨가 말년에 기거하던 곳으로, 수운 최제우가 1864년 참형을 받아 순도한 이후 부인 박씨가 단양 접주 민사엽(閔士葉)의 도움으로 정선 문두곡에서 살다가, 민사엽이 환원하자 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 고통스럽게 살았다. 그 후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이 정선지역에서 자리를 잡게 되자, 도접주 유인상(劉寅常) 등의 주선으로 1872년 이곳으로 정착하게 되었으며, 정선 동학도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다가, 1873년 12월 10일 향년 49세로 환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