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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만세운동 발상지 조화벽기도실
조화벽 선생은 강원도 양양(襄陽) 사람이다. 조화벽은 양양군 내의 감리교회에 많은 청년을 포섭하여 활발히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영순(趙英淳) 전도사의 딸이다. 전국적으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개성 호수돈여학교(開城好壽敦女學校) 학생으로서 선배인 권애라(權愛羅) 등 수명과 함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나누어 준 뒤, 헌병대에서 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후 1925년 4월 18일 교직생활을 하던 중 유우석(柳愚錫; 柳寬順의 오빠)과 결혼하였는데, 이후 유우석의 가족을 모두 양양에 은신시켰고, 유관순의 동생인 관복(寬福)과 관석(寬錫)을 양육하였다. 양양감리교회 1층에는 양양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조화벽의 나라 사랑과 그의 신앙을 기념하기 위한 『조화벽 기도실』이 있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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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 유적비
1919년 4월 4일부터 발발한 양양의 만세운동은 함홍기, 권병연, 김학구 등 3명이 경찰서 현장에서 일제 경찰의 총칼에 순국한 뒤 각 면으로 퍼졌다. 4월 9일 현북면에서도 궐기대회를 마치고 양양으로 들어가 합세할 계획이었으나 지체된 시간 관계로 기사문리 주재소를 공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여 〈관고개〉를 넘어 주재소 앞에 이르러 만세를 연호하다가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제 수비대와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현장에서 선두에 섰던 전원거·임병익·홍필삼·고대선·황응상·김석희·문종상·진원팔·이학봉 등 9명이 피살되고 11명이 중상을 당했다.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시위의 현장 만세고개에 2000년 3월 1일 유적비를 세웠으며, 태극기를 새긴 타원형의 주비(主碑)에는 만세를 부르는 주민들의 군상이 조각되어 있고, 왼쪽 비에는 만세고개의 유래, 오른쪽 비에는 당시 상황과 희생된 애국지사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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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사당(충절사)
김상태(1862 - 1911) 의병장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단발령이 내려지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이강년 의병장과 손잡고 중군장이 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유인석 대장의 휘하에 합세하여 경상, 충청, 강원 3개 도에 걸쳐 일본군 수백명을 무찔러 의병 사상 빛나는 공적을 세웠으며, 이강년, 민긍호 두 장군이 1908년대에 모두 사로잡혀 처형되자 이후 3년 간 수천명의 부하를 홀로 통솔하여 일군과 싸웠다. 신출귀몰하게 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대항하다가 1911년 6월 14일 오전 1시 풍기군 단산면 광암리 소백산 기슭에서 일본군 밀정의 제보로 체포되어 동년 9월 2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절하였으며, 충의사라는 사당이 있던 터에 삼척김씨 종친 등이 주축이 되어 김상태 의병장을 기리기 위한 『충절사』를 건립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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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전적비
김상태(1862 - 1911)의병장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단발령이 내려지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이강년 의병장과 손잡고 중군장이 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유인석 대장의 휘하에 합세하여 경상, 충청, 강원 3개도에 걸쳐 일군 수백명을 무찔러 의병 사상 빛나는 공적을 세웠으며, 이강년, 민긍호 두 장군이 1908년대에 모두 사로잡혀 처형되자 이후 3년간 수천명의 부하를 홀로 통솔하고 일군과 싸웠다. 신출귀몰하게 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대항하다가 1911년 6월 14일 오전 1시 풍기군 단산면 광암리 소백산 기슭에서 일본군 밀정의 제보로 체포되어 동년 9월 2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절하였다. 『白愚 金尙台 義兵將 戰蹟碑(백우 김상태 의병장 전적비)』는 폭 2.5m와 높이 5.5m 규모로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일제에 항거하며 평생을 바친 김상태 의병장의 충절과 항일의병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영월문화원에서 2021년 9월 21일 건립하였으며, 김삿갓면 아리랑장터 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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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억 추모비
정대억(1872 ~ 1908)은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 출신으로, 의병장 원용팔 의진에 들어가 1905년 9월 참모종사에 임명되어 의병활동을 했으며, 의병장 원용팔이 일제 헌병에게 체포되어 순국한 이후에는 독자적으로 의병 부대를 이끌고 강원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적의 배후를 기습하는 게릴라식 유격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이강년 의진에 들어가 참모종사가 되어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에서 벌어진 판운리 전투와 충청북도 충주에서 벌어진 가흥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08년 6월 4일 단양 까치성 전투에서 이강년 의병장과 함께 체포된 후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이송되던 중 감시병을 죽이고 탈출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영월수비대로 연행되었으며 6월 10일 일본헌병대는 눈을 빼고 목을 베어 죽여 3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폭 2.5m, 높이 6m 규모의 『경천 정대억 의병장 추모비』는 정대억의 출생지에서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평생을 살다간 그의 충절과 항일의병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2022년 11월 23일 영월군과 영월문화원에서 세웠다.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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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충절비
김상태(1862 - 1911) 의병장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단발령이 내려지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이강년 의병장과 손잡고 중군장이 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유인석 대장의 휘하에 합세하여 경상, 충청, 강원 3개 도에 걸쳐 일본군 수백명을 무찔러 의병 사상 빛나는 공적을 세웠으며, 이강년, 민긍호 두 장군이 1908년대에 모두 사로잡혀 처형되자 이후 3년 간 수천명의 부하를 홀로 통솔하여 일군과 싸웠다. 신출귀몰하게 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대항하다가 1911년 6월 14일 오전 1시 풍기군 단산면 광암리 소백산 기슭에서 일본군 밀정의 제보로 체포되어 동년 9월 2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절하였다.충의사라는 사당이 있던 터에 삼척김씨 종친 등이 주축이 되어 김상태 의병장을 기리기 위한 『충절사』를 건립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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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억 순국비
정대억(1872 ~ 1908) 은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 출신으로, 의병장 원용팔 의진에 들어가 1905년 9월 참모종사에 임명되어 의병활동을 했으며, 의병장 원용팔이 일제 헌병에게 체포되어 순국한 이후에는 독자적으로 의병 부대를 이끌고 강원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적의 배후를 기습하는 게릴라식 유격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이강년 의진에 들어가 참모종사가 되어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에서 벌어진 판운리 전투와 충청북도 충주에서 벌어진 가흥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08년 6월 4일 단양 까치성 전투에서 이강년 의병장과 함께 체포된 후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이송되던 중 감시병을 죽이고 탈출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영월수비대로 연행되었으며 6월 10일 일본헌병대는 눈을 빼고 목을 베어 죽여 3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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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을미의병 창의비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영월은 의암 유인석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영월을미의병창의지(寧越乙未義兵將倡義地)」이다. 제1차 의병인 유인석 의병장의 〈영월을미의병〉이 1895년 「복수보형(復讐保形)」이라는 깃발을 영월 관아 문루에 걸고 창의하였다. 제2차 의병인 원용팔 의병장의 〈영월주천을사의병〉도 1905년 영월군 주천에서 일어났으며, 이강년 의병장도 1907년 중군장 김상태 의병장과 주천면 강가에 단을 쌓고 제3차 의병인 〈영월주천정미의병〉을 창의하였다. 높이 5m, 폭 2.5m 규모의 『영월 을미의병 창의비』는 영월의 정체성 확립과 일제에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2018년 3월 1일 영월군과 영월문화원이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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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정미의병 창의비
영월은 항일의병의 중심지로, 1895년 유인석 의병장의 〈영월을미의병〉이 「복수보형(復讐保形)」이라는 깃발을 영월 관아 문루에 걸고 창의하였고, 1905년 삼계 원용팔 의병장은 격고문을 발표하고 주천에서 〈주천을사의병〉을 창의하였다. 이강년 의병장도 1907년 중군장 김상태 의병장과 주천면 강가에 단을 쌓고 제3차 의병인 〈주천정미의병〉을 창의하였다. 폭 2.5m, 높이 6m 규모의 『주천 을사·정미의병 창의비』는 구국의 일념으로 평생을 살다 가신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역사에 길이 빛내고 후세에 교훈으로 삼고자 2020년 11월 17일 영월군과 영월문화원이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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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은신처 기념비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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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래 기미만세독립기념비
강원도 원주 귀래리의 3·1운동은 천도교인 김현수·김현홍 유학자 서상균과 서당훈도 이정년에 의해 모의되었다. 고종 승하 시에도 망곡례(望哭禮)를 올렸으며, 1919년 4월 7일 평촌 주민 1백 명이 모였고, 8일에는 귀래리, 평촌, 고청, 새동말 등 여러 마을 사람이 모여서 그 수가 2백 명에 이르렀다. 마을 사람들은 망곡례를 올린 언덕에 모여 천막을 치고 큰 태극기를 세운 뒤, 김현수가 강연하고 모두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마을 사람들은 이틀 동안의 시위를 지금까지도 「만세식(萬歲式)」이라 부르고 있다. 만세식이 끝난 후 운남 헌병주재소에서 참가자를 체포하여 김현수·김현홍은 각각 징역 8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유학자 서상균은 “일본군에게 붙잡혀 가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하여 벙어리가 되었다. 『기미독립만세기념비』는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려 정신을 계승하고자 1996년 8월 15일 면민들이 원주시장의 지원을 받아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에 세웠으며, 이후 기념비가 있는 곳을〈귀래면 삼일공원〉으로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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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긍호 묘
민긍호(1865 - 1908)는 대한제국기 군대해산 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 1897년 33세의 나이로 원주진위대 고성분견대에 입대하여 1901년 특무정교가 되고 원주진위대에 전입되었다. 일제가 원주진위대를 해산하려 하자 원주의 장날인 1907년 8월 5일 병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원주진위대의 무기고를 부수고 1,600여 정의 소총과 탄약을 꺼내어 병사들에게 나눠주는 한편 읍민들을 규합하여 1,000여 명의 병력으로 4개 부대를 편성하여 원주 우편취급소와 일본경찰을 습격하고 원주읍을 장악하였다. 그 후 의병 부대를 많은 소단위 부대로 재편하여 제천·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이다가 1908년 2월 29일 치악산 강림전투에서 체포되어 4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민긍호의 묘는 원래 하평동(지금의 평원동)에 있었으나, 1939년 흥업면 무실리로 옮겨졌던 것을 1954년 5월 북부지구 경비사령관 권준 장군이 다시 현 위치인 원주시 봉산동으로 이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