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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만세운동기념관
대포만세운동은 대포항 일대에서 1919년 4월 5일 물치장날을 맞아 벌였던 대규모 만세운동으로서, 당시 참여했던 시민이 원산감옥에 투옥되거나 태형을 받는 등의 옥고를 치른 대규모 독립운동이다. 당시 만세운동 대열에 합류한 중도문, 대포리, 물치리 주민들 1,000여 명이 대포리 일본 경찰 주재소를 찾아 시위를 이어갔으며, 당시 주재소 책임자로부터 침략 등에 관한 사과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100년 전 대포항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의미를 되새기고 시민들의 자긍심을 일깨우기 위해 당시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순사주재소(속초시 대포항1길 20, 옛 대포항개발사업소 부지) 자리에 「대포만세운동기념관」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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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만세운동기념마을
대포만세운동은 이석범의 주도로 시작되었는데, 고종 황제 인산식에 참석했다가 독립선언서를 버선 속에 숨겨와 동생 이국범 등과 만세운동을 계획 후, 만세운동 계획이 발각돼 이석범은 구속됐지만 김영경·박사집·이종순 등은 계획대로 1919년 4월 5일 중도문리, 대포리 등에서 만세운동을 진행했다. 당시 만세운동 대열에 합류한 중도문, 대포리, 물치리 주민들 1,000여 명이 대포리 일본 경찰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 책임자로부터 침략 등에 관한 사과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속초 대포지역에서 일어난 대포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대포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유공자 이국범(애족장, 2005), 이능렬(애족장, 1990), 이동렬(대통령표창, 2006), 이종국(애족장, 1992년), 이춘재(대통령표창, 1992년)의 생가 위치가 표시된 지도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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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집(속초 김종우 가옥)
이종국(1887 - 미상)은 강원도 양양(襄陽) 사람으로, 1919년 4월 5일 양양군 도천면 중도문리에서 등과 함께 물치장날에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여, 각 리마다 책임자를 배치한 후 태극기를 만들도록 책임지워 준비하였다. 물치 장날을 맞이하여 주민 800여 명을 규합, 대포리 일경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강현면(降峴面)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대포리주재소로 향하여 시위 행진하여 오는 500여 명의 시위대열과 합세한 후 주재소를 공격하여, 기물과 공문서를 파기하며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속초 김종우 가옥으로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으며, 이종국에 대한 관련된 사적이나 언급은 없는 상태이다. 1750년경 전주이씨가 이 집을 건립하여 6대가 살다가 현 소유자의 부친이 구입한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종우의 부친 때부터 지금 소유자 가족이 살고 있다. 전면 4칸, 측면 2캉의 'ㄱ'자 모양 건물로, 옆면에도 지붕이 뻗어 있는 팔작지붕을 올려 화려하다. 집의 본채인 안채가 있고 행랑채와 부속 창고가 딸려 있다. 안채는 대부분 온돌방이지만 앞쪽 2칸은 마루이다. 마루옆으로 사랑방이 있고 가장 오른쪽에 부억이 있다. 뒤쪽에는 안방, 뒷방, 뒷사랑방이 있다. 외양간이 본채 지붕과 같은 높이로 1칸 돌출되어 본채와 'ㄱ'자 모양을 이룬다. 외양간의 위쪽은 저장공간으로 사용한다. 부엌에 외양간이 이어져 있는 구조는 추운 겨울에 집 안에서 소를 키우기 위한 것으로, 이 지방의 전통 민간 형식을 보존하고 있다. 이종국 거주지이고 속초 김종우 가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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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환 묘
최도환(1851 - 1911) 의병장은 강원도 화천 사람으로, 을사늑약 이후 의병투쟁에 참여하여 강원도 서북부지역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본래 옹기점 보부상의 반수(班首)로 평민이었지만 각지로 다니며 일제 침략의 소식을 듣고 을사늑약 이후 의병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1906년 의병을 일으킨 그는 2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주로 양구를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이 점차 어려워지자 한때 중국 간도지역으로 이동하여 의병의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병이 들어 귀국하였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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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률 묘
동창률(1868 - 1943)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민족을 등졌던 과오를 반성하고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던 중, 대동단(大同團)이 결성하자 가입 후 독립의식의 고취를 위한 선전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의 배포 및 조직 확대에 힘을 쏟았다. 의친왕의 상해 망명을 추진했으나, 일경에 도중 탐지되어 11월 11일 만주 안동역(安東驛)까지 갔던 의친왕 일행이 모두 붙잡히며, 거사에 가담한 조직원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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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전적비
강원도 양구는 일제 침략에 항거한 의병 전쟁의 격전지로서 유인석은 1896년 7월 방산에 의진을 치고 조백룡을 선봉장으로 양구면 전투에서 대첩을 거둠으로서 전투에 항일의세를 떨쳤고 이 고장 출신 최도환은 1906년 이후 강원, 경기 등에서 일제 침략군을 격파하였다. 항일의병전적비는 팔도창의대장 유인석을 비롯하여 이강년, 최도환 등의 의병장이 이곳 군민과 더불어 침략군을 무찌른 애국선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8년 11월 15일에 강원도에 의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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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홍기 묘
함홍기(1895 - 1919)는 강원도 양양(襄陽) 사람으로, 1919년 4월 4일 양양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으며 경찰서로 몰려간 군중 일부는 전날 임천리에서 체포한 주민들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손양면 가평리 이장이던 그도 경찰서장실에서 항의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화로를 들고 경찰서장에게 덤벼들었고, 이때 옆에 있던 사법주임이 칼을 빼어 그의 팔을 자르고 허리를 찔렀다. 팔을 잃고 피를 흘리며 넘어진 그는, 계속 굴하지 않고 경찰서장을 꾸짖다가 끝내 순국하고 말았다. 그의 이와 같은 소식은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던 군중을 자극하여 격렬한 무장항쟁으로까지 번지게 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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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홍기, 권병연 추모비
함홍기(1895 - 1919)는 1919년 4월 양양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전날 임천리에서 체포된 주민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경찰서장에 항의하다가 일경에게 양팔이 잘리며 순국하였고, 권병연은 양양장터 3.1독립만세시위에 다수의 군중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함홍기의 죽음에 항의하다가 일경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3.1운동 의사 함홍기 권병연 추모비』는 양양의 독립운동가 함홍기와 권병연을 기리기 위해서 1963년 3월 1일 양양군 손양면 주민들이 세운 비석으로, 1963년 현산공원에 건립하였다가 1980년 손양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긴 후, 1991년 현 위치인 간리고개 도로변에 옮겨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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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홍기 기림비
함홍기(1895 - 1919)는 강원도 양양(襄陽) 사람으로, 1919년 4월 4일 양양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으며 경찰서로 몰려간 군중 일부는 전날 임천리에서 체포한 주민들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손양면 가평리 이장이던 그도 경찰서장실에서 항의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화로를 들고 경찰서장에게 덤벼들었고, 이때 옆에 있던 사법주임이 칼을 빼어 그의 팔을 자르고 허리를 찔렀다. 팔을 잃고 피를 흘리며 넘어진 그는, 계속 굴하지 않고 경찰서장을 꾸짖다가 끝내 순국하고 말았다. 그의 이와 같은 소식은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던 군중을 자극하여 격렬한 무장항쟁으로까지 번지게 하였다. 『독립운동가 함홍기 열사 추모비』는 양양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고 함홍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9년 3월 1일 손양면사무소 앞 게이트볼장 내에 손양면 중심지 위원회에서 건립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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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양양의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은 횡성과 함께 강원지방에서는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만세운동으로서 당시 만세운동에는 6일 동안 6개면 82동리의 주민 6,000여 명이 참가하여 13명의 사망자와 7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충렬사』는 1991년 건립된 사당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전면에 「충현사」 현판이 게시되어 있으며,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위패 30위(권광식, 고대선, 김성서, 김두영, 권병연, 김재한, 김사만, 김석희, 김종성, 김창환, 김학구, 김주열, 이창갑, 문종희, 김필선, 최영덕, 이학봉, 이원희, 최인식, 임병익, 이종엽, 이두형, 전원거, 김철기, 황선주, 진원팔, 노병례, 함홍기, 황응상, 홍필삼)를 모시고 제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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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
양양에서는 1919년 4월 3일부터 4월 9일까지 연 7일에 걸쳐 전체 6개 면 82개 마을에서 연 인원 1만 5천여 명이 참가하여 연속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양양경찰서에서 함홍기, 권병연, 김학구 등이 살해되었으며, 기사문리 만세고개에서는 전원거, 임병익, 홍필삼, 고대선, 황응상, 김석희, 문종상, 진원팔, 이학봉 등 9명이 피살되었다. 양양 3·1만세운동은 12명의 사망자와 43명의 부상자, 체포 142명 중 실형 73명, 태형은 수없이 많았을만큼 전국에서 가장 조적적이고 극렬하게 만세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희생되거나 투옥된 순국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74년 10월 3일 동아일보사와 양양군협찬회가 현산공원 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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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벽 거리
남문3리 주민들의 주도로 강원도에서 가장 활발하게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지역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3·1만세운동 당시 영동지역 만세운동의 중심지였던 양양군 양양읍 남문리에 여성 항일운동가 조화벽의 이름을 딴 테마거리를 조성했다.조화벽은 강원도 양양(襄陽) 사람이로서 양양군내의 감리교회에 많은 청년을 포섭하여 활발히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영순(趙英淳) 전도사의 딸이다. 전국적으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개성 호수돈여학교(開城好壽敦女學校) 학생으로서 선배인 권애라(權愛羅) 등 수명과 함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나누어 준 뒤, 헌병대에서 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후 1925년 4월 18일 교직생활을 하던 중 유우석(柳愚錫; 柳寬順의 오빠)과 결혼하였는데, 이후 유우석의 가족을 모두 양양에 은신시켰고, 유관순의 동생인 관복(寬福)과 관석(寬錫)을 양육하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