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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16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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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항쟁기념탑
화천지역 1919년 3․1만세운동은 천도교 김화교구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3월 23일에 천도교인들이 주도하여 500여명이 거사하였다. 그러나 주민의 내부 고발로 일본 헌병에게 발각되어 읍내로 향하던 시위대는 일본 헌병들의 총칼에 맞서 30분간 맹렬한 격투를 하였으나 읍내로 진입하지 못하였다. 또한 김창희의 지휘 하에 화천장터에 모인 논미리, 구운리, 노동리, 풍산리 등의 주민들도 후일을 도모하고 해산하였다. 3월 28일에는 유학자, 청년, 농민, 의병출신, 산림기수, 일부 구장 등이 주도하여 상서면민들과 더욱 적극적이고 격렬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화천장날이었던 이날 상서면 봉오리에 모인 천도교인들과 다목리, 파포리 주민 1,000여명은 만세를 부르며 상서면 주재소를 공격하였으며, 면장과 면서기를 사로잡아 만세를 부르게 하고 화천읍으로 진격하였다. 거사소식을 듣고 각지에서 모인 주민 2,000여명은 지금의 화천읍 신읍리에서 화천읍내로 향하던 중 신풍리에 도착한 일본헌병들이 군중에게 총격을 가해 격렬히 대치하다 4명이 즉사하고 부상자가 속출하였으며, 시위대는 그들을 저지하는 헌병에게 무력을 가하기도 하고 관공서를 공격·파괴하기도 하는 등 강렬히 저항하였다. 화천지역 3․1만세운동은 군민 3,500여명 이상이 참여하였고, 검거된 인원만 175명이 넘었다. 이들 피검된 숫자는 강원도에서 화천군이 가장 많았으며, 22명이 징역형을 받았고, 즉결재판으로 태형을 받은 인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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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이 묘
김순이(1878-1952)는 당시 주막을 경영하면서 푼푼이 벌은 돈으로 애국지사 최양옥의 독립운동을 도왔고 자금 모금에도 협력하였다. 특히 3.1운동 때에는 자신의 주막을 모의 장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하영현, 강달회, 강성순, 전한국, 강만형 의사가 순국하고 많은 지사가 투옥되었던 4월 1일 횡성 장날 독립만세사건 때에는 일경에 쫓겨 장터 술집에 숨어 든 동지를 규합했고, 군중을 진두지휘하다 투옥되었다. 가난과 세파에 시달리면서 애국의 일념으로 생활하다가 1952년 12월 19일 삶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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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옥 묘
최양옥(1893-1983)의 호는 추강이며, 일제강점기 대한독립군 공명단 단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7년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 진학 당시 3·1운동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그뒤 신덕영(申德永)·노형규(盧衡奎) 등과 동지가 되어 전라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임시정부에 조달하는 등 활약하다가 1920년 11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안창남(安昌男)·김정련(金正連)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피선되었다. 1927년에는 비행사 안창남·김정련 등과 함께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비행학교(飛行學校) 설립을 계획하고 그에 필요한 기금모집과 공명단 지부를 서울에 설치할 목적으로 김정련·이선구(李善九)와 함께 1929년에 국내로 잠입하였다. 잠입 후 이들은 서울 교외 망우리(忘憂里) 근처에서 일제의 우편차를 습격하여 돈을 빼앗은 뒤 강원도 쪽으로 향하였으나 이를 추격한 일본경찰과 항전을 벌이다가 붙잡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서울형무소 서무과장, 인천형무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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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옥 공적비
최양옥(1893-1983)의 호는 추강이며, 일제강점기 대한독립군 공명단 단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7년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 진학 당시 3·1운동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그뒤 신덕영(申德永)·노형규(盧衡奎) 등과 동지가 되어 전라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임시정부에 조달하는 등 활약하다가 1920년 11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안창남(安昌男)·김정련(金正連)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피선되었다. 1927년에는 비행사 안창남·김정련 등과 함께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비행학교(飛行學校) 설립을 계획하고 그에 필요한 기금모집과 공명단 지부를 서울에 설치할 목적으로 김정련·이선구(李善九)와 함께 1929년에 국내로 잠입하였다. 잠입 후 이들은 서울 교외 망우리(忘憂里) 근처에서 일제의 우편차를 습격하여 돈을 빼앗은 뒤 강원도 쪽으로 향하였으나 이를 추격한 일본경찰과 항전을 벌이다가 붙잡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서울형무소 서무과장, 인천형무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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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의병총
일본이 이 땅을 강점하면서 1907년 구 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자 이에 격분한 병사들과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일어선 백성들이 의병장 민긍호 휘하에 모여 봉기하였다. 이들 의병은 치악산을 중심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눈부시게 활동하며 조국의 수호신으로서 안흥면 강림월현에서 일제와 큰 싸움을 벌였다. 조국을 위해 싸웠지만 이름없이 쓰러져 간 의병들의 무연고 분묘는 피례한 상태로 강림면 전역에 산재되어 있었다. 1984년 10월 15일부터 같은 해 11월 27일까지 산재해 있는 의병 다섯분의 분묘를 발굴 수습하여 한곳에 모아 묘를 만들고 묘역을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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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긍호 전적비
민긍호 의병장의 본관은 여흥으로 1865년 경성에서 민치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7년 33세의 나이로 원주진위대 고성분견대에 입대하여 1901년 특무정교로 승진한 민긍호는 인품이 강직하고 공사가 분명하며, 부하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기골이 장대하고 지도력이 탁월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제가 원주진위대를 해산하려하자 원주 장날인 1907년 8월 5일 약 3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원주진위대 무기고를 부수고 1,600여정의 소총과 탄약을 노획하였다. 한편, 읍민들을 규합하여 1,000 여명의 의병부대를 4대 부대로 편성하고 원주 우편취급소와 일본 경찰을 습격 원주읍을 장악하였다. 그 후 제천, 죽산, 장호원,여주,홍천 등지에서 수 천의 의병부대를 이끌며 크나큰 전과를 올렸다. 민긍호 의병장이 거느린 의병부대는 단위부대로서는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전투력이 강했으며 모두 1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나 1908년 2월 29일 43세의 나이로 장렬히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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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렬 추모비
한상렬(1883-1926)는 대한제국 의병장이며,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를 당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를 일으켰다. 한상렬도 1907년 8월 횡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전군대장(前軍大將) 이창호(李昌五), 중군대장(中軍大將) 김화춘(金和春), 후군대장(後軍大將) 한상오(韓相五) 등의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홍천 · 횡성 · 원주 · 지평 · 평창 · 영월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민긍호(閔肯鎬)와 함께 충주성을 공격하는 등 많은 전투에서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1908년 3월 19일 홍천군 서석면 청양리에서 일본군과 첫 교전 이래 수차례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민긍호의 사후에 강원도 일대의 의병전이 위축되어 갔고, 일제의 탄압이 계속되면서 한상렬의 부대는 20명 정도의 규모까지 축소되었다. 국내에서 의병 항쟁이 어려워지자 의병 부대를 해산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로 건너가 이범윤 · 유인석 등이 조직한 성명회에서 활동하였고, 1915년 창의소(倡義所)를 조직하고 중대장이 되었다. 1920년 대한의용부의 참모로 활동하였고, 1926년에는 홍범도(洪範圖)가 조직한 대한독립단에서 보급품을 확보하고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군정부에서는 방화대(放火隊) 제2부장을 역임하면서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좌진(金佐鎭)이 설립한 성동무관학교 내의 조직인 동우회에서 선전계, 군자금모금계장으로 있었고, 중동선(中東線) 대표로 북만주 의용군에 참여하였다. 1926년 9월 19일 주중청년총연맹에 의하여 피살당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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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문 묘
강승문(1893-1919)은 강원도 횡성(橫城) 사람으로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919년 4월 1일의 횡성 장날을 기하여 천도교인들이 주동이 되어 일어난 대규모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가, 이날 밤 시위도중 헌병들의 발포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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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건 묘
조병건(1891-1971)은 경상북도 안동(安東) 사람이다. 1919년 3월 17일의 예안면(禮安面)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이 3월 11일 밤 9시에 이시교(李時敎)·이중원(李中元)·이남호(李南鎬)·백남학(白南鶴)·이광호(李洸鎬) 등을 면사무소 숙직실로 불러, 독립신문을 보여주면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의함으로써 발단이 되었다. 그들은 이에 뜻을 같이 하여 예안면 장날인 3월 17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이곳에서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대량으로 제작하고 이 계획을 인근의 각 동리로 연락하였다. 3월 17일 오후 3시 30분경, 장터에는 다른 장날과는 달리 수천명의 시위군중이 장꾼으로 위장하고 모여들자, 약속대로 30여명의 주동자들이 면사무소 뒷편의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본인들이 그곳에 세워놓은 대전기념비(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린 후 태극기를 높이 들고 장터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신호로 장터에 나와 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누비고 다녔다. 이때 주재소에서 일본 경찰 조전등길(曹田藤吉)이 출동하여 25명의 시위군중을 체포해갔다. 이에 격분한 그는 오후 7시경,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주재소로 달려가 그곳을 포위하고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무력으로 제지하자, 투석으로 맞서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고 일본 경찰 3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후 시위대열의 앞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면서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곧 안동 주둔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하여 공포를 쏘아대며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고, 이어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펼쳤다.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4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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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경 묘
김준경(1924-1973)은 1924년 4월 22일 강원도 횡성군(橫城郡) 갑천면(甲川面) 하대리(下臺里)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갑천(岬川)이다. 1943년 갑천면 서기로 근무하던 중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되어 중국 후난성(湖南省) 구이둥(桂東)으로 배치되었다. 1944년 11월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푸치현(蒲圻縣)에서 일본군 제3702부대를 탈출하여, 중국군 왕루지(王陸基) 휘하의 신편 제15사 유격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노재섭(盧在燮)·한장석(韓長錫) 등과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에 편성되었다. 중국군 제9전구사령부 정치부에 파견되어 포로 심문과 일본군 문서 번역, 전단·표어·벽보 작성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광복 직후 제3구대 대원들은 장시성(江西省) 펑청(豊城)에 집결하였다가, 한커우(漢口)에서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 채원개(蔡元凱)의 지휘 하에 편입되었다. 중국 허베이성 스자좡(石家莊)에서 광복을 맞이한 후, 1946년 환국하였다. 귀국 이후 한국독립당 행정위원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찰대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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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횡성)
횡성 3.1운동은 강원도 3.1운동의 효시이자, 진원지로서 어느 지역보다도 거센 만세시위가 있었다. 횡성 천도교회 이채일과 이동구에 의하여 독립선언서가 전해졌고, 최종하, 신재근, 장동훈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부하였다. 1919년 3월 27일 수 백명의 군민이 읍내 장터에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8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4월 1일에는 군민 1,300여명이 운집하여 장렬한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었고, 이어 2일까지 200여 명이 일본 헌병분견소에 모여 대한민국의 독립과 체포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4월 12일까지 각 면마다 거센 만세운동을 펼치던 중 하영현, 강달회, 전한국, 강승문의사는 현장에서, 강만형의사는 옥중에서 왜적의 총칼에 순국하였다. 횡성3.1운동기념비는 횡성의 3·1 운동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972년 8월 15일에 제막한 이 기념비는 동아일보가 창간 60주년 기념으로 세웠으며,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邑下里) 3·1공원 내에 있다. 비석 1기와 횃불을 든 조각 1기로 구성되어 있다. 비문은 이희승(李熙承)이 짓고 서희환(徐喜煥)의 글씨체로 김영중(金泳仲)이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