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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사기념비(오의사기념비)
1919년 당시, 홍천에서도 성동리 최승혁, 한용섭과 능평리 김복동이 주동이 되어 4월 1일 자주독립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논의하였다. 도로 부역을 가장한 화동리, 중화계리, 하화계리, 능평리의 농민 2백여 명을 결운리에 집결시킨 후 일제에 항거하는 자주독립운동을 선봉에서 주도했고, 도망친 군수를 잡아 그가 차고 있던 칼을 꺾었으며 김복동은 군수의 왼팔을 꺾고 굴복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모두 일본 헌병에 잡혀 옥고를 치뤘고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순국하였다. 광복의 초석이 되었던 이 다섯 의사의 업적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독립의사기념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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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묘
이춘재(1878 -1929)는 강원도 양양(襄陽) 사람이다. 1919년 4월 5일 양양군 도천면(道川面)에서 이석범(李錫範)·이종황(李鍾黃)·이종인(李鍾寅)·이능렬(李能烈)·김영경(金英經)·장세환(張世煥) 등과 같이 물치(沕淄) 장날에 모인 5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대포리(大浦里)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강현면(降峴面)에서 시위행진해 온 군중과 합세하여 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활동 중에 일경에 붙잡혀 이해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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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남궁억 기념관
남궁억 선생은 1896년 7월 서재필(徐載弼) ·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고위급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 9월에는 나수연(羅壽淵) · 유근(柳瑾)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면서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친로 수구파의 모함으로 인해 1898년 11월, 독립협회 지도자 17명과 함께 그는 붙잡히게 된다. 독립협회가 해산 당한 뒤인 1900년 7월에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촉구하는 논평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1903년 모함으로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진상이 밝혀져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5 뒤 귀경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에 임명된 후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특사사건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사임한을 구실 삼아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면서 정미칠조약을 체결하고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였다. 1907년 11월 권동진(權東鎭) · 여병현(呂炳鉉) · 유근 · 이우영(李宇榮) · 오세창(吳世昌) · 윤효정(尹孝定) · 장지연(張志淵) · 정운복(鄭雲復) · 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창립한 대한협회(大韓協會)의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기관지로는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1918년에는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로 낙향하였다. 1919년 9월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한 뒤 1933년 11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하며 활동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 간 투옥되었다.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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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묘
남궁억 선생은 1896년 7월 서재필(徐載弼) ·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고위급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 9월에는 나수연(羅壽淵) · 유근(柳瑾)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면서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친로 수구파의 모함으로 인해 1898년 11월, 독립협회 지도자 17명과 함께 그는 붙잡히게 된다. 독립협회가 해산 당한 뒤인 1900년 7월에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촉구하는 논평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1903년 모함으로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진상이 밝혀져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5 뒤 귀경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에 임명된 후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특사사건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사임한을 구실 삼아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면서 정미칠조약을 체결하고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였다. 1907년 11월 권동진(權東鎭) · 여병현(呂炳鉉) · 유근 · 이우영(李宇榮) · 오세창(吳世昌) · 윤효정(尹孝定) · 장지연(張志淵) · 정운복(鄭雲復) · 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창립한 대한협회(大韓協會)의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기관지로는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1918년에는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로 낙향하였다. 1919년 9월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한 뒤 1933년 11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하며 활동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 간 투옥되었다.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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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천루(김덕원 기림 터)
김덕원(1876 - 1928) 의사는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마을에서 태어났다. 1894년 19세 되던 해에 동학에 입도해 동학군으로 활동했다. 민족정신이 투철한 가문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던 중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패망하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구국일념으로 당시 상당한 가재(家財)를 항일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비밀조직을 결성해 항일운동을 하던 중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 함성이 국내외로 퍼지고 홍천까지 여파가 밀려오자 김 의사는 4월 3일로 거사일을 정하고 인근 2개군 5개면에 밀서를 전달, 만세운동에 가담하도록 했다. 드디어 4월3일이 되자 물걸리 동창마을에는 대형 태극기가 높이 걸리고 5개 면민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비석거리 다리목 시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인파는 3000명을 헤아렸다.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일본 헌병대가 무차별 발포, 8명(지금의 팔렬사)이 숨지고 사상자와 체포자도 수백에 이르렀다. 김의사는 뒷일을 도모하기 위해 야산을 전전하며 외딴집 다락방에도 은신했으나 결국 검거돼 춘천형무소에서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실명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4년 만에 풀려나지만 3년 후 53세의 일기로 쓸쓸한 생애를 마쳤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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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군 위령탑
동학혁명군 위령탑은 1894년에 궐기한 동학혁명군의 업적을 기리는 사적이다. 구국제민의 기치를 높이 든 동학농민군은 총궐기하여 혁명을 요구하였다. 홍천에서는 그 해 11월, 접주 차기석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싸웠고, 홍천읍 및 횡성 방면의 관군에 맞서며 내촌면 물걸리에서 혁명의 횃불을 올렸다. 그 후 두촌, 화촌, 동면과 홍천읍에서 격전을 벌렸으며, 내면에서는 여러 차례의 공방전이 발생했다. 일본군의 침략적 출동으로 혁명군에게는 패색이 완연하던 때, 경기, 충청 그 외 여러 고을에서 모여든 동학군과 연합한 홍천의 동학농민군은 끝까지 싸우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수천 군중이 이곳 서석에 모여 항전하다가 30일(음력10월 23일)에 그 힘을 다하였다. 그 동학혁명군의 정신과 애국혼을 오늘날 되새겨 길이 기념하고자 본 탑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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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 3.1운동기념비
홍천 3.1운동기념비는 1919년 4월 1일부터 10일에 걸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홍천읍에서는 차봉철, 서상구, 오창섭이 주도하였고 도로공사 부역꾼으로 가장한 북박농민 300여 명이 이에 합세하였다. 하지만 동면에서는 민병숙, 민병태 의사가 피살되었고 내촌면 동창리에서는 천여명의 군중이 무자비한 오적의 총탄으로 팔연사(이순극, 전영균, 이기선, 연의진, 김자희, 전기홍, 양도준, 이려선)이 장렬하게 숨지고 말았다. 또한 5천여 명의 시위자 중 백여 명이 투옥되어 실형을 받았고 그 외 수많은 양민이 고문을 당했다. 위와 같은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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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선언서 기념비
3.1독립선언서 기념비에는 독립선언문의 내용과 함께 조선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후손들에게 길이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홍천군 원로회가 2019년 3월 1일에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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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고향 표지석
우사 김규식(1881-1950)은 일제강점기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의 탄원서를 제출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학자, 종교인이다. 1911년 일본의 교회 탄압이 시작되자,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도착한 그는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파리에 조선공보국(朝鮮公報局)을 설치하여 그 해 4월 10일 공보국 회보를 발간하는 한편, 젊은 층을 흡수하여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그 대표가 되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한국민족의 주장」 · 「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민족선언서를 작성하고 배포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장, 학무총장 등에 선임되었으며, 1921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창설하고, 1927년에 그 의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東方民族)』을 창간하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그 주석이 되었고,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1945년 8 · 15광복이 되자 11월 23일 환국한 그는 그 해 12월 27일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문을 국민에게 발표하고 즉각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의원 부의장, 3월 미소공동위원회 한국 대표, 5월에 좌우합작 준비작업을 추진하고, 그 해 6월부터 7월까지 ‘미군정 좌우합작위원회’ 예비회담에 참가하였고, 12월 입법의원 의장, 1947년 10월 민족자주연맹 의장이 되었다.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서울 도착을 계기로 더욱 자기의 정치노선에 정열을 쏟아, 남북협상의 정치활동을 펼쳤다. 한편, 교육가와 학자로서 여러 학교에서 강단생활을 하였으며, 1950년에 6 · 25전쟁이 일어나면서 납북되어, 그 해 12월 10일 만포진 근처에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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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선 묘
이창선(1859-1939)은 1919년 3월 28일 화천군 상서면(上西面) 봉오리(峰吾里) 구장으로서 마을 회의에서 오는 장날에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하고 옥양목으로 태극기를 만든 후 통문을 보내어 인근 마을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이날 이른 새벽에는 뒷산에 올라가서 봉화를 올리고 3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상서면사무소를 향해 시위 행진하여, 면사무소 앞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1,000여명의 시위군중이 집결되어 면장과 직원들에게 시위에 참가하도록 요구하며 활동하다가 일군 헌병의 총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붙잡혔다. 같은 해 9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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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선 묘 표지석
이응선(1884-1962)은 1919년 3월 28일 화천군 상서면(上西面) 봉오리(峰吾里)에서 이창선(李昌善)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인근 마을에 격문을 배포하며 주민들을 규합, 300여명에 달하는 시위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상서면사무소로 시위행진하여 면사무소 직원들에게 시위에 참가하도록 권유하는 등 활동하다가 일군헌병에 붙잡혔다. 1919년 7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로 예심이 종결되어 동년 9월 18일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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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록 묘
박성록(1891-1938)은 강원도 화천(華川) 사람이다. 화천면의 3·1독립운동은 천도교인에 의해서 추진되었는데 화천면 신읍리(新邑里)의 천도교인 김창의(金昌義)가 주동인물이었다. 그는 김창의를 중심으로 이은규(李殷奎)·강석대(姜石大)·김한식(金漢植)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계획을 결의하여 3월 23일 화천읍 장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하남면 논미리(河南面 論味里) 와 구운리(九雲里)·상서면 노동리(上書面 蘆洞里), 그리고 화천면 풍산리(豊山里)에도 연락하여 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거사 전날 밤 풍산리 주동인물이 붙잡혀 23일 장날 화천읍의 일제측 경비는 철저하게 되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신읍의 여러 마을에서는 계획대로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였고 주민들에게도 알리었다. 그는 이날 주민 10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기(大韓獨立旗)'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신읍리에서 화천읍으로 시위행진하던 중 핑구고개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헌병에게 붙잡혔다. 그는 이해 5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죄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았으나 7월 7일 공소를 제기하여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