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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 동상
윤희순(1860~1935)는 1895년 의병장 유홍석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안사람 의병가(義兵歌)", "의병군가(義兵軍歌)", "병정가(兵丁歌)" 등을 작사·작곡하여 부르게 해서 의병운동을 고취하고 부녀자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했으며, 친일파와 일본군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들의 죄상을 꾸짖었다. 1907~1908년의 의병운동 때에는 강원도 춘성군 가정리 여우천 골짜기에서 여자의병 30여명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아서 의병운동을 지원하였다. 1911년 4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柳濟遠)의 독립운동을 돕다가 1935년에 봉천성 해성현 묘관둔(廟官屯)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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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3.1운동 본거지 표지석
춘천은 관공서가 밀집되어 있고, 강원도 경무부를 맡고 있던 헌병사령부가 위치해 삼엄한 감시를 펼치던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독립만세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지는 못하였다. 일찍부터 천도교 평강교구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와 만세운동을 준비하기는 하였으나, 일제의 철저한 감시에 독립선언서를 춘천지역에 배포하려던 임종한(林宗漢)과 신윤철(申允喆)이 1919년 3월 4일 체포되고 독립선언서가 압수당하였다. 3월 7일에는 춘천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있었으나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9년 3월 10일경부터 천도교 봉훈(奉訓)인 윤도순(尹道淳)· 천도교 교구장(敎區長)인 이준용(李俊容)·박순교(朴順交) 등 천도교인들이 비밀리에 만세시위를 추진하였으나, 윤도순이 만세시위를 추진하기 위해 북면 만천리(北面 萬泉里)·가연리(佳淵里)·송암리(松岩里)를 돌아다니면서 주민을 계몽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됨으로써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 이후 3월말 경에 이르러 이준용·박순교·허기준(許基俊) 등이 3월 28일 춘천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28일 일제 헌병과 수비대가 춘천 시내를 삼엄하게 경계하였지만, 이들은 태극기를 숨겨가지고 춘천 장터로 들어가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장터를 경계하던 헌병보조원 허현(許鉉)은 총을 버리고 만세시위에 가담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일제 수비대가 이준용·박순교·허기준·허현 등 주도인물들을 체포하자, 만세시위는 끝나고 말았다. 박순교(1869~1946), 윤도순(1860~1930), 이준용(1860~1945), 허기준(1886~1961), 허현(1886~1955)은 1919년 3월 28일 춘천읍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천도교인 수명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수십명의 시위군중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4월 25일 박순교, 이준용, 허기준, 허현은 징역 6월형을, 윤도순은 징역 10월형을 선고받는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박순교, 허기준, 허현에게 추서했고,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 윤도순에게, 1992년 이준용에게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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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서원
식량부족에 허덕이고 있던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토지를 폭력적으로 수탈하고, 일본 농민을 이주시켜 농업권을 장악하기 위해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전국적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을 담당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의 악랄한 수탈과 농민착취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간도지방 등 해외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농촌경제 수탈에 대하여 전국 곳곳에서 농민들의 항쟁이 이어졌는데 강원도의 경우 삼척 임원리의 농민항쟁을 대표적인 사건으로 들 수 있다. 삼척의 향토지와 나이 드신 분들의 고증에 근거하여 임원리 임야측량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13년 4월에 임원리에서 국유림과 사유림에 대한 경계측량을 하는데 사유림을 부당하게 국유림으로 편입시키는 일이 있었다.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상황이므로 국유지는 결국 일본정부의 소유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개인 소유의 임야를 국유지로 만드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부당함을 지적하고 항의할 목적으로 원덕면 주민 5백여 명이 운집하였습니다. 임원리 김치경(金致卿)의 지휘로 재측량을 요구하며 궐기하여 수일간 시위를 벌였습니다. 당시 삼척군수 심의승(沈宜昇)과 원덕면장 김동호(金東鎬)가 일본인 측량기수 화장(花藏)을 대동하고 민중을 설득시키기 위해 임원리에 왔는데, 이 때 뒷산에서 몰래 사진촬영하는 자를 발견하고 군중들은 격분하여 측량기수를 죽이라고 외치며 몰려들어 타살하고 불에 태웠다. 그러자 일본 헌병 20여 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군중들은 재빠르게 해산했지만 3명이 죽고 많은 부상자를 내게 된다. 일제는 향후 군중시위의 뿌리를 뽑기 위해 본보기로 주동자 김치경을 비롯하여 조정원(趙正元) 이락서(李洛書) 김문식(金文植) 김평서(金平書) 등 70여 명이 끌려가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김평서는 옥사하고, 남은 사람들은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5년간 복역하고 풀려났으나 모진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모두 사망했다. 이 사건 뒤에 원덕면의 유림들은 한 목소리로 간악한 일본 헌병들의 만행을 맹렬히 규탄하고 비난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헌병대는 대규모 민중봉기로 이어질 것을 염려하여 1913년 5월 유림들의 본거지인 원덕면 산양리의 산양서원(山陽書院)을 방화했고, 그 결과 건물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묘정비(廟庭碑)만 남게 되었다. 1971년 유림들의 정성으로 묘정비각은 중건하였으나 서원 본 건물은 아직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으니, 원덕주민들은 지금까지 잊지 못할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1998년 4월 18일에 산양서원 묘정비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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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진녀 집(최시형 피체지)
원진녀의 집은 최시형이 1898년 원주에서 붙잡힌 바로 그 장소이다.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당시 최시형은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된 후 관군의 추적을 피해 고산리 송골마을 원진녀의 집으로 피신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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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규 순교비
최인규 권사(1881~1942)는 강원도 삼척군 북삼면(현 동해시)에서 태어났다. 마흔 살이 된 1920년, 마을에 찾아온 서양인 선교사의 헌신에 감동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최인규 권사는 1933년 당시 교역자가 없었던 천곡교회를 이끌기 위하여 가족과 함께 샘실마을(천곡동)로 이주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가 오자, 최인규 권사와 천곡교회 사람들은 ‘신사참배는 곧 우상숭배’라며 신사참배에 동참하지 않았다. 감리교단은 이미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해 받아들였지만 그는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신사참배는 물론 창씨개명과 동방요배 등 일제의 모든 압박을 거부하며 믿음을 지켰다. 결국 최인규 권사는 신사참배 거부 주동자로 몰려 1940년 5월 구속되었다.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자 일제는 그에게 창피를 주기 위해 똥지게를 지고 마을을 돌게 하였으나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는 그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함흥에서 열린 재판에서도 최인규 권사는 “신사참배는 절대 할 수 없다. 예수를 박해하던 로마도 망했다. 일본도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호통을 쳤고, 결국 2년형을 받았다. 1941년 사상범을 수감하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이곳에서도 끈질긴 회유가 이어졌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같이 수감되어 있던 어느 목사가 “일단 신사참배하겠다고 말하고 나가라”고 조언하자 최 권사는 ”당신이 목사인 줄 알았는데...“라며 돌아앉아 다시는 마주보지 않을 정도로 확고한 믿음을 지켰다. 결국 계속되는 고문에 1942년 12월 16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천곡교회는 1943년 최인규 권사가 순교한 후 일제의 강압과 주민들의 이주 등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 대전 인근 야산에 가매장되었던 최인규 권사의 유해는 해방 후에야 친척의 손에 의해 고향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1947년 3월에는 삼척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삼척제일교회 마당에 인근 7개 지역 교회가 함께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또 1986년 11월에는 최인규 권사의 유해를 새로 복원한 천곡교회 마당으로 옮겼고, 순교기념비를 새로 세웠다. 최인규 권사의 순교기념비는 삼척제일교회와 천곡교회 두 곳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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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묵 묘
횡성의 만세시위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3월 27일 횡성 장날에 신경묵을 포함한 천도교인들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나 주도인물 12명이 검거되면서 끝났다. 다음 장날인 4월 1일 다시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천도교인이 계획을 추진하였지만, 횡성청년회 윤태환(尹泰煥)과 횡성감리교회 정해경(鄭海景)도 참여하였다. 횡성군수가 직접 면사무소에서 폭동에 대비하라는 훈시까지 하는 등 일제 관헌의 대비가 엄중한 가운데 4월 1일 천도교인들은 횡성의 길목을 지키고 상점을 미리 폐쇄하였다. 원주 소초면 둔둔리 천도교인인 하영현(河永賢)과 강사문(姜士文) 등이 주민을 인솔하여 횡성으로 왔다. 4월 1일 횡성 장터에 모인 1,3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몽둥이·돌·장작으로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관공서 앞의 광고판, 군청의 건물 등을 파괴하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그러나 일제 관헌들은 시위에 미리 대비해 관공서의 중요 문서를 숨겼으며 직원들도 오후에 모두 도망쳤다. 시위가 진행되던 중 일본헌병 상등병인 고지마[小島了]가 말을 타고 거리에 나타났다. 군중은 헌병을 보자 격분하였다. 최동수(崔東壽)가 그를 말에서 끌어내려 밟고 때렸다. 이 때 총소리가 울리자 군중의 움직임은 일단 멎었다. 저녁 무렵에 다시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분견소로 향하였다. 헌병들이 원주로부터 출동한 일제보병의 지원을 받고 뒷산에 매복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군중의 선두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제의 총격으로 법주리 강승문, 둔둔리의 하영현·강달회 등 5명이 즉사하고, 8명 이상이 부상당하였다. 4월 2일에도 만세시위를 계속 전개하며 검거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제는 4월 2일부터 시위 주도자를 검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가혹한 고문과 태형 등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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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화지 묘
박화지(미상~1907)는 춘천 남면 후동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정미의병 당시 류홍석, 유영석, 유제곤, 바선명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였다. 이때 맡은 역할은 의병 소모장 이었다. 의병 소모장은 의병들을 모으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류홍석을 비롯한 춘천의병은 약 6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6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신동면 증리 진병산과 가평 주길리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이 싸움에서 의병장 유영석이 전사하는 등 패전을 했다. 이에 류홍석 의병진이 패하자 박화지는 집에 돌아와 숨어 지냈다. 이때 일본인들이 박화지를 잡으려고 후동리 마을을 급습해서 주민들을 모아놓고 “의병들이 숨어있는 곳과 박화지가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 고 협박을 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박화지는 “내가 나가 죽으면 주민 모두가 살아날 것이다.” 라고 말하며 동리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왜적 앞에 나타나 체포되었다. 그는 갖은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의기를 지키다가 끝내 일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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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의숙 표지석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독립운동가ㆍ언론가ㆍ정치가. 호는 몽양(夢陽).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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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해안초등학교)
홍순창(1904~1956)은 강원도 명주 사람이다. 1938년 양구의 매동공립소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일제의 한국병탄의 부당성과 일제 식민지정책 및 한국인교원에 대한 차별대우를 비판했으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38년 4월부터 1940년 2월까지 국사 시간에 일제의 왜곡된 교과서대로 수업을 하지 않고 한말의 항일투쟁과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가르치는 등 독립사상을 배양하는 국사교육을 하고,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와 공출 등 식민정책을 비판하다가 1940년 3월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41년 8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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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원주초등학교)
원주보통학교 학생운동지 1926년 6월 13일 원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순종황제 승하 후 망곡례 및 망곡제 등을 거행하기 위해 시위하고 동맹휴학을 한 곳이다. 원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1926년 5월 순종이 승하한 직후 학교 측이 휴교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맹휴학을 모의했다. 이로 인해 학교측은 1926년 5월 3일에 정식으로 망곡례(望哭禮)를 실시한 후 이틀간 휴교했다. 이후 순종의 인산일인 1926년 6월 10일에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평소 학생들의 신망을 받던 김용형(金容亨) 교사는 6월 13일에 서울의 인산과 만세운동 소식을 전해주며 학생들의 궐기를 자극했다. 이에 6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수업거부와 함께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일본인 교장은 사태를 수습하고자 궁여지책으로 학교에서 망곡제를 거행했고, 학생들은 전원 등교하여 망곡례를 치렀다. 이 사건으로 일본인 교장은 문책받아 좌천되었고 김용형 교사도 전출되었다. 이후, 원주공립보통학교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1930년 1월에 상급생들이 동맹휴교를 계획하다 검거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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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인제초등학교)
3월 28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인제 읍내에서 독립 유인물이 배포되고 약 1,000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28일 미명에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인제 읍내에 각 곳에 ‘이번의 소요는 군수와 학교장 등의 설유에 기대할 것이 아니다. 각자 그 뜻하는 바를 향해 돌진하면 가능하다’는 독립만세운동을 격려하는 유인물이 붙여졌다. 또한 약 1,000명의 군중들이 집합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인제헌병분대 헌병들이 출동해 진압했고 춘천수비대 병력들이 응원대로 인제에 파견됐다. 4월 18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인제 읍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사전에 제지되었다. 4월 18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인제 읍내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인제헌병분대 헌병들이 사전에 탐지하고 출동해 제지함으로 독립만세를 외치지 못했다. 서병선(1900~1973)은 강원도 인제 사람이다. 1919년 3월 중순 당시 인제군청에 재직 중 춘천에 있는 감리교회 목사 이병찬(李柄燦)으로부터 독립선언문 수십 매를 건네 받고 3월 29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그는 인제군 인제읍내를, 이종근(李鍾根)은 합강리, 심한구(沈漢龜)는 덕산리, 이성종(李聲鍾)은 보통학교를 각각 담당, 군중동원의 책임을 맡아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한편 시위참여를 촉구하는 선전문을 각지에 붙이는 등 준비를 하다가 3월 27일 밤 사전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리하여 같은 해 6월 2일 경성지방법원 춘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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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철원초등학교)
철원군은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3월 10일·11일·18일에 전개된 철원읍 만세운동, 3월 12일갈말면 만세운동, 4월 8일내문면 만세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최병훈(崔炳勳)은 이웃 평강(平康) 천도교 대교구로에서 독립선언서 200여 장을 가져와 철원의 천도교인에게 전해 주었다. 천도교인들은 곧 군내에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주모자 11명 전원이 붙잡히면서 일단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뒤 기독교측에서 청년단원과 각 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3월 7일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청년단측에서 서울의 정황을 살핀 뒤 전개하자고 주장하여 10일로 연기되었다. 3월 10일박연서(朴淵瑞) 목사를 중심으로 철원농업학교·보통학교 학생들과 교회·지방청년 등의 두 갈래로 나뉘어져 추진되었다. 철원군청에서 합류한 뒤, 시위군중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나 독립만세를 부르며 일본헌병대로 몰려가 전날 붙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오후 4시경 군청으로 몰려가 일본인 서무주임과 직원들을 위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고, 또 윤태항(尹泰恒) 집으로 도망친 군수를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이날 운동이 끝난 뒤에도 200여 명의 청년들은 철원역으로 행진하여, 마침 정차하고 있던 열차 안의 승객을 향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때 열차 안에 있던 조화벽(趙和璧 : 柳寬順의 올케)을 비롯한 승객들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은 독립연설회를 개최하고, 친일파 박의병(朴義秉)을 찾아가 협박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3월 18일 이병준(李炳準)이 철원 장날을 이용하여, 수 백명의 천도교인을 주동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갈말면에서는 3월 12일신성규(申聖奎)·김칠룡(金七龍) 등이 1,000여 명의 시위군중을 주도하여 청양주재소와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때 면장 황희수(黃熙秀)도 대열에 합류하여 새벽까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내문면의 독립만세운동은 최재명(崔在明)·재청(在淸) 형제 등 독검리 천도교인이 주동하여 4월 8일에 일어났다. 이때 모인 700여 명의 군중은 북창리의 사무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석교리 헌병파견대에서 헌병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자 해산하였다. 박용철(1904~197)은 강원도 철원 사람으로 1919년 철원농업학교 재학 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경고문 및 호소문 등을 유인 배포하고 군청 앞 등에서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으나 연소자이기 때문에 1919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임응렴(1900~1940)은 강원도 철원 사람이다. 1919년 3월 10일 철원군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인, 지방청년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이규정(李圭貞) 등과 함께 북간산(北看山)에 모인 250여명의 학생들을 지휘하여 거리로 나와 군중과 합세 철원군청 앞으로 몰려가서 만세를 불렀으며, 다음날인 3월 11일에도 군중과 함께 철원역앞 광장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로 징역 4월 형과 벌금 20원(圓)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