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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당 대선사시비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불교인이자 저항 시인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 운동을 하다가,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겸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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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독립운동 기념현판(양양보통학교)
양양초등학교(양양보통학교)는 남궁억 선생이 1906년 양양군수로 부임하면서 설립한 현산학교(현 양양초등학교의 전신)가 그 시작으로 이후 1920년대 강원지역의 학생중심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26년 12월, 교사 자격이 없고 불친절했던 일본인 교사를 몰아내기 위해 5학년 160여명의 학생이 다함께 수업을 받지 않는 동맹휴학운동에 앞장선 것을 계기로 이듬해인 1927년 2월 9일 또 다시 수업 참석을 거부하며 단식 항쟁을 벌여 일본인 교사가 학교를 떠나는 일이 있었다. 1920년대 강원지역의 학생 독립 운동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 양양보통학교(양양초등학교) 학생들의 독립 운동 정신을 기억하고 이어가기 위해 2021년 11월 3일 제 92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에 광복회 강원도지부와 강원도교육청에서 세운 기념 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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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선생상(양양초등학교)
남궁억(南宮檍)은 1905년 12월 26일 양양군수로 임명받고 1906년 2월에 부임하였다. 이것이 양양에 일찍이 신문화 교육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궁억은 근대의 대표적인 개화파 지식인으로 독립협회와 황성신문을 통하여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서는 민중의 자각과 교육을 통한 역량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한 인물이었다. 남궁억은 부임하자 학교를 세우기 위해 기부금을 모으기로 하였으나, 유교를 숭상하는 대부분의 지방 유림들은 비협조적 일수 밖에 없었다. 남궁억 군수는 국권 회복과 민족 부강을 위해서는 반드시 교육의 필요성을 호소하며, 본인의 사재(私財)와 문중을 설득하여 기부금을 모으니, 결국 유림에서도 1만량의 기금을 출연했고 이를 기본금으로 현산학교를 세웠다. 1906년 9월 8일 현산학교가 인가 되었고, 1910년 4월 1일 양양 공립보통학교로, 1951년 9월 1일 양양 국민학교로, 1996년 3월 1일 양양초등학교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00년이 넘는 역사를 계승한 영동지역의 초등교육의 산실인 것이다. 이렇게 강원도 최초의 사립학교인 현산학교를 세우고 학생을 모집하였으나 입학을 지원하는 학생이 없어 호별 방문을 통해 설득해 보았고, 자녀가 있는 집마다 의무적으로 한 명씩 학교에 강제로 보내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고성과 강릉, 삼척 등 각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어 약 20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게 되었고, 학제는 3학년 과정으로 학생들의 나이는 17~8세까지 상투를 튼 학생도 있었다. 남궁억 군수는 학생들에게 직접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고 산수, 역사, 일어, 체조, 국문과 한문도 가르쳤다. 수업료는 없었고 공책과 연필을 무상으로 공급하였다. 국권갱생(國權更生)의 길은 오직 교육 밖에 없다며, 민족주의 정신을 함양 시키는데 교육의 목표를 두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여 후일 양양 3·1만세운동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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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 만세공원
횡성만세공원은 횡성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던 횡성 시장 터에 건립된 공원이다. 횡성 만세 시위는 3월 27일, 4월 1일과 4월 2일 3차에 걸쳐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내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이다. 강원도내 최초이자, 최대의 만세운동이다. 횡성천도교회 이채일과 이동구에 의하여 독립선언서가 전해졌고, 최종하, 신재근, 장동훈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부하였다. 1919년 3월 27일 수 백명의 군민이 읍내 장터에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 운동을 전개하여 8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4월 1일에는 군민 1,300여명이 운집하여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었고, 이어 2일까지 200여명이 일본 헌병분견소에 모여 대한민국의 독립과 체포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4월 12일까지 각 면마다 거센 만세운동을 펼치던 중 하영현, 강달희, 전한국, 강성순 의사는 현장에서, 강만형 의사는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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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원 추모비
김덕원(1876~1946)은 강원도 홍천(洪川) 사람으로, 동학에 입도 후 갑오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하여 물걸리 동창을 습격해 동학혁명군의 군자금과 군수품을 확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동학군의 마지막 항전지인 홍천 서석 자작고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3일 내촌면 물걸리(동창마을의 비석거리, 현 팔열각 일대)에서 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내면, 인제군 기린면 등지의 주민 수천 명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던 중 일본 헌병이 시위대열에 무차별 발포하여 현장에서 8명이 순국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게 되자 시위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하고 피신하였다. 일본 헌병들은 물걸리 마을로 덮쳐 그의 본가에 불을 질러 가재를 전소시키고 계속 추적하므로 3년간 피신 생활을 하던 중 일경의 검속에 체포되어 4년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양 눈을 실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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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만세 암각유적
김덕원(1876~1946)은 강원도 홍천(洪川) 사람으로, 동학에 입도 후 갑오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하여 물걸리 동창을 습격해 동학혁명군의 군자금과 군수품을 확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동학군의 마지막 항전지인 홍천 서석 자작고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3일 내촌면 물걸리(동창마을의 비석거리, 현 팔열각 일대)에서 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내면, 인제군 기린면 등지의 주민 수천 명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던 중 일본 헌병이 시위대열에 무차별 발포하여 현장에서 8명이 순국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게 되자 시위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하고 피신하였다. 일본 헌병들은 물걸리 마을로 덮쳐 그의 본가에 불을 질러 가재를 전소시키고 계속 추적하므로 3년 간 피신 생활을 하던 중 일경의 검속에 체포되어 4년 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양 눈을 실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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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만세운동 유적비
기미만세운동 유적비 1919년 4월 4일부터 발발한 양양의 만세운동은 함홍기, 권병연, 김학구 의사 등 3명이 경찰서 현장에서 왜경의 총칼에 피살된 후 연일 각 면으로 확산되었다. 동년 동월 9일 현북면에서도 궐기 대회를 마치고 양양으로 들어가 합세할 계획이었으나 지체한 시간 관계로 기사문리 주재소를 공격하기로 당초 계획을 변경하여 "관고개"를 넘어 주재소 앞에 이르러 만세를 연호하다가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제 수비대와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현장에서 9명이 피살되고 11명이 중상을 당하였다. [ 피살자 ] 현북면 하광정리 - 전원거, 중광정리 - 임병익, 명지리 - 홍필삼, 명지리 - 김석희, 어성전리 - 고대선, 어성전리 - 황응상, 미곡리 - 문종상도천면 동초리 - 진원팔, 동초리 - 이학봉 [ 부상자 ] 현북면 하광정리 - 이봉우, 하광정리 - 김응옥, 상광정리 - 오세관, 상광정리 - 오문환, 상광정리 - 오세풍, 상광정리 - 황중칠, 어성전리 - 함병원, 어성전리 - 강춘실, 어성전리 - 정홍엽, 어성전리 - 김봉구, 미곡리 - 홍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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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원 묘
유제원(?~?)은 춘천 의병장 외당 유홍석의 장남이며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로, 아버지인 유홍석의 의병 활동을 적극 도왔으며, 1911년 4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요녕성 동남부 압록강 변에 자리하고 있는 관전현에서 항일활동을 하였다. 의암 유인석의 지시에 따라 의병을 거느리고 환인현과 관전현의 접경지대인 혼강 양안, 관전현 보달원과 소고령지, 그 주변 등지에서 향약계, 농무계 등 반일 단체를 조직하여 황무지 개간, 후진양성 등에 진력하였으며, 의병을 거느리고 의진 밀영(密營)을 건립하여 비밀리에 의병훈련장을 만들어 놓고 의병 훈련을 시키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도왔다. 1915년(을묘년) 10월 2일 사망 후 중국 요녕성 해성시 회인현 대아하에 안장되었다가 1930년 아들 유돈상이 춘천시 남면 관천리 선영하에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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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 묘
윤희순(1860~1935)은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이면서 독립운동가로 유제원의 아내이다. 군자금 모금 및 무기와 탄환을 제조‧공급하는 탄약 제조소 운영,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대 조직, 〈안사람 의병가〉 등 8편의 의병가 작사·작곡, 4편의 경고문 제작·배포하는 등 여성들의 의병 활동을 이끌어내기에 적극 앞장섰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조선독립단 활동, 노학당이라는 학교를 세워 항일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장남 유돈상이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 후 11일 만인 1935년 8월 1일(음) 서거하였으며, 중국 요녕성 해성시 묘관둔 북산에 안장되었다. 사후 59년 만에 손자 유연익에 의해 발굴된 유해는 1994년 10월 17일 고국으로 봉환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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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돈상 묘
유돈상(1894~1935)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1년경 할아버지 유홍석과 아버지 유제원(柳濟遠), 어머니 윤희순(尹熙順)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만주, 몽고, 중원에 흩어져 있는 애국자들을 모집한 끝에 음성국, 음성진 등 180여 명의 동지를 얻어서 복벽운동 단체인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일명 조선독립단)을 조직하였으며, 이후 홍익단(弘益團)과 합세하여 일본 당국을 공격하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기밀이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군대 양성의 절실함을 깨닫고 음씨 형제 및 중국인 장경호와 함께 학교를 세우고 민족정신 교육과 인재 양성을 위한 군사훈련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8년에는 귀국하여 강원도 춘천, 충청북도 제천 등지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931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무순(撫順)에서 독립단을 재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고문 끝에 42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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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대리 의병총
1907년 조선군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고종황제를 폐위한 일제의 만행에 분노를 금치 못하며 의병으로 봉기 한 분들중 이지역 전투에서 순국하신 세분의 무연고 의병을 모신 묘역이다. 1907년 11월에서 12월 까지 이 곳 서원면에는 700여 의병이 대부대를 이루고 일본군 보병 제 51연대와 대치하던 강원, 경기, 충청도 의병의 거점으로 연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장렬히 전사하신 의병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후손에 전하고자 1989년 12월 5일 묘역을 정비하고 비를 세웠다. 2009년 4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묘역 정비사업을 완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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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삼순 묘
안삼순(1894~1941)은 강원도 춘천 사람이다.춘천 일대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1907년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한 외삼촌 마정삼(馬正三)의 아들인 마도현(馬道賢)·마만봉(馬萬奉) 형제와 역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1908년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한 박영관(朴永寬)의 아들 박순구(朴順九)가 장성한 뒤 서로 협력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고 일제 침략세력을 토멸키로 맹약하고 1921년 9월경부터 화승총과 사냥총으로 무장하여 홍천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그의 형제인 안이순(安二淳)·안귀봉(安貴鳳)과 외사촌 마남룡(馬南龍), 사돈지간인 전봉학(全鳳學) 등이 그들과 뜻을 같이하여 잇달아 가담하면서 장총단(長銃團)을 구성하여 인제 가리산 을 본거지로 하고 홍천·춘천·인제·양구 등지를 무대로 전후 19회에 걸쳐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경을 사살 처치하며, 부호층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 또는 징수하는 등의 활동을 벌여 나가자, 그도 같이 가담하여 주로 군자금 모금을 위한 부호층의 자산상태 정보 수집, 행동대원에 대한 길 안내 등의 지원활동을 하였다.그러나 1927년 11월 일제 군경의 대규모 토벌작전으로 다른 단원들과 함께 붙잡혀, 1928년 10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