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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비
윤동주(1917-1945)는 일제강점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저술한 시인이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달라즈[大拉子] 중국인 관립학교를 거쳐 이듬해 가족이 용정(龍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에 편입, 졸업하였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귀향 직전에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송몽규와 함께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을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福岡刑務所]에서 생을 마쳤다. 교우 관계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함께 하숙 생활을 하였으며 윤동주의 자필 시집을 보관, 출간한 정병욱(鄭炳昱), 초간 시집에 추모시를 쓴 유령(柳玲), 연희전문학교 후배 장덕순(張德順), 고향 후배 문익환(文益煥), 평양 숭실중학교 동기 김형석(金亨錫) 등이 있다. 처녀작은 15세 때 쓴 시 「삶과 죽음」 · 「초한대」이며, 이 두 편의 수준이 상당한 것으로 미루어 습작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발표된 작품을 살펴보면 광명중학교 4학년 당시 간도 연길(延吉)에서 나온 『가톨릭 소년(少年)』에 동시 「병아리」(1936.11.) · 「빗자루」(1936.12.) · 「오줌싸개지도」(1937.1.) · 「무얼 먹구사나」(1937.3.) · 「거짓부리」(1937.10.) 등이 있다. 연희전문시절에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게재된 「자화상」 ·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경향신문』에 발표된 시 「쉽게 씌여진 시」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20세를 전후하여 10여 년간 전개된 시력여정(詩歷旅程)은 청년기의 고독감과 정신적 방황, 조국을 잃음으로써 삶의 현장을 박탈당한 동일성의 상실이 그 원천을 이룬다. 초기 시에서는 암울한 분위기와 더불어 동시(童詩)에 깃들인 유년적 평화를 지향하고자 하는 현실 파악 태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으로는 「겨울」 · 「조개껍질」 · 「버선본」 · 「햇빛 · 바람」 등이 있다. 후기 시로 볼 수 있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에 쓰여진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자아성찰의 시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 「자화상」 · 「또 다른 고향」 · 「별 헤는 밤」 ·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윤동주의 시는 한마디로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명령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하였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함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였다. 동시에 특정한 사회 · 문화적 상황 속에서 체험한 것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에 관련지음으로써 보편적인 공감대에 도달하였다. 유해는 고향 용정에 묻혔고, 1968년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 1990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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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동상
민영환(1861 - 1905)은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집안 출신으로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낸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 후 국가의 제반 제도의 개혁을 시도하였고, 친일적인 각료들과 대립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한일협약을 적극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5년 11월 종로 이완식(李完植)의 집에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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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선언기념탑(서대문구)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은 서울 중심지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함으로써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의 봉화를 올렸다. 3.1독립선언기념탑은 이날로부터 시작된 전 민족적인 항일 독립운동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8월 15일에 당시 재건국민운동본부 주관으로 온 국민의 성금을 모금하여 3.1독립만세운동 발발의 또하나의 중심 현장이었던 탑골공원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1979년 탑골공원의 정비사업으로 철거되어 12년간 방치되었다가 각 계에서 복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1992년에 항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과 고귀한 순국의 현장이었던 서대문 감옥 가까운 곳인 서대문 독립공원에 옮겨 세우게 되었다. 탑의 높이는 4.2m이며 탑 뒤에는 3.1독립선언문과 손병희 등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판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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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동상
서재필(1864~1951)은 1864년 1월 7일 외가인 보성(寶城)에서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7살 때 상경, 양외숙인 김성근(根)의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1882년 급제(及第)하여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 벼슬에 올랐다. 1883년 일본 동경의 육군 호산(戸山)학교에 유학하고 1884년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과 갑신개혁(甲申改革)을 주도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실패로 부모, 형, 아내는 자살하고 동생은 참형(慘刑)되었으며 어린 아들은 굶어죽는 참변(慘變)을 겪었다. 선생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워싱턴 대학에서 의학(學)을 공부, 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醫師)가 되었다. 1895년 귀국하여 1896년 중추원(中樞院) 고문(顧問)에 임명되었고,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하고 굴욕외교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獨立門)을 건립하는 등 민족의 자주정신을 고취하였다. 1898년 국내 수구파(守舊派)들의 반대로 다시 미국으로 떠나 문구 및 인쇄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전해듣고 한인회의 개최 및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임시정부(臨時政府)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 위원장을 맡는 등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쳤다. 그 후 성요셉병원 등에서 임상병리학자로 명성을 떨치다 1947년 미군정의 최고 고문이자 과도정부 특별의정관(特別議政官)으로 귀국하여 통일된 민주국가 건설에 매진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으나 정쟁에 휘말린 시국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5일 8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가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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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추념탑
순국선열추념탑은 애국지사들과 항일투사들이 가장 많이 옥고를 치른 조국수난의 현장이었던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우리 산하와 해외 각처에서 조국 광복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 장열히 순국하신 선열들의 얼을 되새기며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1992년 8월 15일에 건립하였다. 추념탑의 중앙에는 전국 14개도 전역에서 나타난 우리 민족의 드높은 독립의지와 기상을 상징하고 있는 태극기를 음양각한 조각상이 높이 22.3m로 축조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길이 40m로 독립투쟁의 역사적 활동상을 형상화한 모습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좌측에는 항일의병무장상, 윤봉길. 이봉창열사 상징상, 독립군의병 순국선열 처형상, 유관순열사 만세운동상이, 우측에는 3.1독립만세상, 안중근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상, 순국선열 의병체포 처형상, 청산리 전투상이 새겨져 있다. 또한 바로 아래의 순국선열추념탑기(殉國先烈追念塔記)에는 일제의 침챡부터 조국독립을 재취하기 위한 우리 선열들의 자주독립 의지와 끊임없이 계속된 항일투쟁사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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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위치한 국가보훈부 소속 박물관이다. 기념관은 이전에 서대문구의회 건물이 있었던 부지에 건설됐고, 본래 2021년 11월 23일[2]에 개관할 예정이었으나 추가 공사로 연기되어 2022년 3월 1일에 정식 개관했다. 지상 4층, 지하 3층 건물로 상설전시실 3개와 특별전시실 1개로 구성되어 있다. 2019년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계획이 추진됐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기념 시설들이 상하이, 충칭 등 중국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떨어졌다. 이에 국내에도 기념관을 건립해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제의 정신을 후대에 전승하는 것이 기념관 건립의 목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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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복 추모비
윤세복(1881-1960)의 자는 상원이며, 해방 이후 초대 총전교를 역임한 대종교인이다. 1910년 12월 서울에 올라와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다음 해 정월 시교사(施敎師)로 선임되자, 가산 수천 석을 정리하여 남만주로 옮긴 뒤 사재를 들여 환인현(桓仁縣)에 교당을 설립하여 시교에 힘쓰는 한편, 환인현에 동창학교(東昌學校), 무송현(撫松縣)에 백산학교(白山學校), 북만주 밀산당벽진(密山當壁鎭)에 대흥학교(大興學校), 영안현(寧安縣)동경성(東京城)에 대종학원(大倧學園)을 설립 또는 경영하며 5년 동안 교육에 진력하였다. 1916년 무송현 등 여러 곳에 교당을 설립하여 7,000여 명의 교인을 새로이 모으는 한편, 흥업단(興業團)·광정단(光正團)·독립단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4년 선종사(先宗師)인 무원종사(茂園宗師:金敎獻)의 유명을 받고 영안현 남관(南關)에서 교통(敎統)을 이어 제3대 도사교[敎主]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취임 후 4년 만인 1928년에 일본군부의 압력에 눌려 장쭤린(張作霖)이 체결한 이른바 삼시조약(三矢條約)의 부대조항에 의하여 대종교 금지령이 내려지자, 부득이 총본사를 밀산 당벽진으로 옮기는 수난을 겪었다. 이 금지령은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 박찬익(朴贊翊)의 외교활동으로 1930년 난징(南京)의 국민정부가 봉천·길림·흑룡강·열하 등의 동북4성에 대한 대종교 해금령을 내림으로써 한번 해제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31년부터 일본군의 만주침략이 격심해지면서 교단활동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동·서·북 3개의 도본사(道本司)가 해체되었고, 1930년에는 서울에 있는 남도본사(南道本司)마저 폐쇄되는 등 극히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무릅쓰고 교세확장을 위하여 분기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1934년 영안현 동경성으로 총본사를 옮겨 단군영정을 모신 천진전(天眞殿)을 세웠다. 또한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하얼빈에 선도회(宣道會)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교적간행사업(敎籍刊行事業)을 추진하면서 단군천진궁의 건축을 서둘렀다. 이런 활동을 벌이던 중 1942년 교단간부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혀 무기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사건을 교단내에서는 임오교변이라고 부른다.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여 이듬해인 1946년 귀국, 서울에 총본사를 설치하였다. 그뒤 교세확장을 위한 교당의 설치, 교단조직의 정비강화, 단군전의 봉안, 교적간행, 인재양성을 위한 홍익대학의 설립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교단체제를 민주화하여 전통적인 교통전수제(敎統傳授制)를 선거에 의한 총전교선임제(總典敎選任制)로 바꾸고, 현대사회에 맞는 조직체제로 정비, 강화하여 초대 총전교에 취임하였다. 196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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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헌 추모비
김교헌(1868-1923)의 자는 백유, 호는 무원, 보화, 이칭은 김헌이며, 일제강점기 대종교 제2대 교주이다. 1885년 정시문과에 급제, 한림옥당·병조참의·예조참의·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대중계몽운동을 하였고,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운동이 좌절되어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가 구속되자 대표위원으로 선정, 만민공동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03년『문헌비고(文獻備考)』 편집위원이 되었다.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東萊監理兼釜山港裁判所判事)와 동래부사로 재직하였다. 그 뒤 비밀단체인 신민회(新民會) 회원과 교우 관계를 맺었으며,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들어가 현채(玄采)·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고전간행사업에 참가하였다. 1909년에는 규장각부제학으로서 『국조보감(國朝寶鑑)』 감인위원(監印委員)을 겸직하였고, 1910년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일찍이 민족의 기원과 민족사의 연구에 뜻이 깊어, 대종교가 중광(重光)된 해부터 교인이 되어 각종 문헌을 섭렵, 교(敎)의 역사를 정립하였다. 한편, 영계(靈戒)를 받고 총본사(總本司)의 부전무(副典務)·경리부장을 지내고,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남도본사전리(南道本司典理)·총본사전강(總本司典講)을 역임하였다. 1914년 단군 관련 문헌자료를 모아 『신단실기(神檀實記)』를 편찬하였다. 1916년 9월 나철(羅喆)의 뒤를 이어 대종교의 제2대 도사교[都司敎: 교주(敎主)]에 취임하였다. 1917년 일본의 탄압을 피해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기고 교세 확장을 통한 독립운동 강화와 동포들에 대한 독립정신 교육에 전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3월 11일 경 길림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같은해 12월 대종교 교인만으로 구성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 총재에 교단(敎團)의 지도자인 서일(徐一)을 임명하는 등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전개, 1920년 9월 청산리에서 김좌진(金佐鎭)이 대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그 뒤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총본사를 영안현(寧安縣)으로 옮겨 선도포교사업(宣道布敎事業)을 통한 구국투쟁에 진력하였다. 1923년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출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만주 전역에 걸친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독립운동 및 교단의 기반이 크게 붕괴되자 병을 얻어 죽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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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 추모비
서일(1881-1921)의 호는 백포, 본명은 서기학이며,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이자 종교인이다.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교육구국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을 느끼고 만주로 건너갔다. 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청년동지들에 대한 민족정신과 한학을 가르쳐 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교육에도 뜻을 두어 간도지방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듬해 중광단을 토대로 군사적 행동을 위해 계화(桂和) 등과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대종교 2세교주인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이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려고 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 같은 해 8월현천묵(玄天默)·김좌진·계화 등과 함께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軍政府)로 만들고, 12월에는 다시 한 민족에게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이것을 토대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면서 총재에 취임하였다. 또한 틈틈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며 수도에 힘써 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포교활동도 하였다. 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고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정규병력 1,500명으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 또한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세워 중견사관을 길러내고,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찔렀고 병력을 북만(北滿)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시켰다. 이듬해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도독부군(都督府軍) 및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등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1921년 6월 27일 자유시 수비대 29연대, 2군단 기병대대, 라키친 저격연대가 동원되어 사할린 부대에 대한 무장해제에 들어갔다. 그러나 러시아 군인과 항일무장독립군 부대원 사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러시아 군인은 사할린 부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동원된 러시아 부대는 무장을 한 항일무장독립군에 대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청년장병 다수가 희생당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같은해 8월 27일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라는 글귀를 남기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 저서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그리고 계시를 받고 지었다는 『회삼경(會三經)』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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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 추모비
나철(1863-1916)의 호는 홍암, 이칭은 나두영, 나인영이며, 일제강점기 대종교의 초대 교조. 독립운동가이다.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 출신의 지사(志士)들을 모아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직전인 1905년 6월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扶助)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의 정객(政客)들에게 제시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이 각 신문에 발표되자, 나라 안에 있는 매국노들을 모두 제거해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단도(短刀) 두 자루를 사서 품에 넣고 귀국하였다. 교단에 전하는 말로는 서울에 도착하여 숙소로 걸어가는 도중에 한 백전 도인에게서 두 권의 책을 받았는데, 그 책이 바로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라고 한다. 1906년, 다시 한 번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관계에 있던 오카모토[岡本柳三助]·도야마(頭山滿) 등을 만나 협조를 구했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또한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선물상자를 구입하여 을사오적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7년 1월부터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오적의 주살(誅殺)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서창보(徐彰輔) 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 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崔寅植) 등과 함께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았다. 고종의 특사로 그 해에 풀려나서 190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통로에 의한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소득 없이 귀국하였다. 교단에 전하는 말로는 일본에 체류할 때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도인이 찾아와서 단군교를 포교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귀국하자마자 오기호, 강우(姜虞), 유근(柳瑾), 정훈모(鄭薰模), 이기, 김인식, 김춘식(金春植) 등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다. 이 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다. 곧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여 5대 종지를 공포하였다. 또한 단군의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하여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이라고 하였다. 1910년 8월에는 대종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11년에는 대종교의 신관(神觀)을 삼신일체의 원리로 설명한 『신리대전(神理大全)』을 발간하는 한편,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祭天壇)과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을 순방하고 만주 화룡현 청파호(靑波湖)에 교당과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교세의 급속한 확장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자 1916년 음력 8월 4일,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16일 새벽 이상스럽게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8월 15일 그는 자신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폐기법(閉氣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그의 유언에 의하여 청파호 언덕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그 후 대종교에서는 그가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경절(四大慶節)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196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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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기념관
김창숙(1879-1962)의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벽옹이며, 조선후기 『심산만초』, 『벽옹만초』, 『벽옹칠십삼년회상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 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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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탑
삼일탑은 이 탑은 3.1절 41주년(1960.3.1)을 맞이하여 당시 학생들이 모은 성금 2백만환으로 옛 경성중학교의 산사를 헐고 그 자리에 세워졌다. 숭고한 3.1정신을 기리고 학생들에게 민족의 얼인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건립된 이 탑은 당시 미술교사였던 윤성호 선생이 설계하였고, 탐 중앙의 '大韓獨立萬歲'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신 이갑성옹의 휘호이다. 이 탑의 상부에는 3.1운동의 상징인 태극기가 그려져 있으며, 하부에 있는 3개의 계단은 삼천리 강토를, 단 위에 높이 솟아 있는 4각혀의 기둥은 삼천만의 민족 정기를, 기둥 4면에 새겨져 있는 3조의 긴 선은 삼천만 우리 겨레를 상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