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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공원비
삼일공원(三一公園) 유래 - 3.1운동 당시 여성 참가자였던 최은희씨가 "직접 일병의 총칼에 대결했던 홍안의 소녀들이 이제는 귀가 멀고, 눈이 어둡고,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되었으나, 나머지 기백을 다시 모아 망각속에 사그러져 가는 그날의 분노와 저항을 되새기면서 쇠잔한 몸이지만 나머지 생애에서 무엇을 조국에 바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1967년 4월 15일 동아일보에 "독립공원을 설립해야한다"는 글을 투고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정부는 1967년 5월 15일 공원을 지정하고 1989년부터 1990년까지 공원을 조성 현재의 3.1공원으로 개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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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기념관
조만식(1883 - 1950)은 일제강점기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회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고당(古堂)이고 평안남도 강서 출신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15세에부터 22세까지 평양성 내 상점에서 일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23세에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백남훈(白南薰) · 김정식(金貞植)과 함께 장로교 · 감리교연합회 조선인교회를 설립하였고, 간디(Gandhi, M. K.)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하여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동지인 이승훈(李承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가 되었으며, 2년 후인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3 ·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였으나 일본관헌의 탄압으로 제대로 재직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이 무렵 알게 된 평생의 심우(心友)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1923년 송진우(宋鎭禹) · 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탄압으로 실패하였고,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을 지내다가 1926년 일제에 의해 강제 사임당하였다. 1924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활동이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關西體育會) 회장으로 민족지도자 육성에 이바지하였고,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어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 기개를 펴는 데 앞장섰다. 1936년 전국적인 민족정신 앙양운동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을지문덕장군수보회(乙支文德將軍修保會)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에 평양조선인사회의 유일한 공회당이었던 백선행기념관(白善行記念館)을 개설하고 인정도서관(仁貞圖書館)을 세웠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해온 재조선군일본인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의 면담요청을 거절하여 한때 구금당하였다. 광복 직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소련군정당국이 그들이 만든 최고행정기관인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이 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1월 5일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하였다. 그 뒤 생사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1950년 6 · 25전쟁 직전 평양방송이 그와, 체포된 간첩 김삼룡(金三龍) · 이주하(李舟河)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공산군의 평양철수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평생을 기독교정신의 실천가로서 생활하였고, 일제에 대하여는 비폭력 · 무저항 · 불복종의 간디즘으로 대항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1991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유발(죽은 이의 머리카락)이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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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출신 독립유공자 추모비
이 추모비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숭실대학교 독립유공자를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2020년 10월 숭실대학교 개교 123주년을 맞이하여 건립하였다. 숭실대학교는 1897년 개교 이래 근대 문명 교육을 선도하며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와 독립에 앞장섰다. 관서지방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이로 인하여 일제로 부터 '불온사상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숭실대학교 출신의 독립유공자들은 을사늑약 반대, 신민회 및 조선국민회 활동 등을 전개하면서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추모비에 숭실의 독립유공자들이 추구했던 독립의 반석을 형상화하고, 추모벽에 독립유공자를 명각하여 그들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애국혼을 기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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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대섭 집
심훈(1901-1936). 본명은 심대섭(沈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서울 출생이다. 일제강점기 「상록수」, 「영원의 미소」, 「황공」 등을 저술한 소설가, 시인, 영화인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 · 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 · 영화 · 소설집필 등에 몰두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이해영과 이혼하였고 같은 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5년 조일제(趙一齊) 번안의 「장한몽(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일하여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집필 · 각색 · 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이며 영화제작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그 뒤 1928년 조선일보사에 다시 입사하였고,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다.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옮겼으나 사상 문제로 곧 퇴직하였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하였다.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동방의 애인」 · 「불사조」 등 두 번에 걸친 연재 중단사건과 애국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인텔리주4의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 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서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관류하고 있다. 특히, 농민계몽문학에서 이후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로서 의의를 지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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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유적지 마포형무소 표지석
1912년 일제가 경성형무소를 설치하여 항일(抗日)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옥고(獄苦)를 치렀던 유적지이다. 이 일대(공덕동 105번지)는 일제강점기 경성감옥이 있던 자리이다.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은 원래 1908년 10월에 신설된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으나, 1912년 9월 조선총독부가 마포 공덕리에 추가로 감옥을 짓고 이곳의 명칭으로 바꿔 부르도록 했다. 경성감옥은 장기수(長期囚) 위주의 남자 수형자를 수용하였으며, 일제에 의해 체포된 많은 애국독립지사들이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특히 1919년 3.1독립선언 사건 때는 최남선(崔南善), 한용운(韓龍雲), 오세창(吳世昌) 등 다수의 관련 인물들이 서대문감옥에서 이감되어 옥고를 겪었다. 마포삼성아파트 자리(도화동 7번지)에 있던 마포연와공장(麻浦煉瓦工場)은 노역장 시설로 사용되었다. 경성감옥은 1926년 경성형무소(京城刑務所)로 개칭 되었다가 해방 이후 마포형무소(麻浦刑務所, 1946년 4월)를 거쳐 다시 마포교도소(麻浦矯導所, 1961년 12월)로 변경되었다. 도시화의 여파로 1963년 마포교도소는 경기도 안양읍으로 옮겨 안양교도소(安養矯導所)로 전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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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 본적지
김익상(1895-1942)는 일제강점기 총독부폭파, 다나카암살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기독교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의 기계 감독으로 근무하였다. 1920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전근된 것을 기회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비행 학교가 있는 중국 광둥[廣東]으로 갔다. 그러나 중국 내전으로 인해 학교가 폐교되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상해에서 전차 회사의 전차 감독이 되어 잠시 일을 보다가 항일 운동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고 북경으로 가서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다. 1921년 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총독 암살 밀령을 받고 국내로 들어와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하고 9월 12일 총독부에 잠입하여 2층 비서과(총독실로 오인)와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였다. 총독부가 폭발로 인해 혼란 상태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현장을 빠져 나와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무사히 탈출하였다. 1922년 일본의 전 육군대신이며 육군 대장인 다나카[田中義一]가 필리핀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으로부터 다나카 암살이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를 위해 동지 오성륜(吳成崙, 본명 李正龍)과 같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1차 저격은 오성륜이 담당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2차 저격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8일 선편으로 황푸탄[黃浦灘]에 도착한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오자, 준비하고 있던 오성륜이 다나카를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발사 순간 신혼여행차 상해에 오던 영국 여인이 다나카의 앞을 막아섬으로써, 총탄은 영국 여인에게 명중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 계획에 따라 달아나는 다나카를 향하여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탄마저 불발하여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재빨리 현장을 탈출하려고 할 때 중국 경찰이 추격해 오자 공포를 쏘며 주장로[九江路]를 지나 쓰촨로[四川路]로 달아났으나, 즉사한 영국 여인의 남편이 쏜 권총에 맞고 쓰러져 붙잡히고 말았다. 4월 1일 상해 일본 총영사관에서 예심을 마치고 5월 3일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어 9월 25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검사의 공소로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누차 감형되어 21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귀향하였으나 일본 형사에게 연행된 뒤 소식이 없었고, 암살당하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었다. 196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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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마포전차종점)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 이후 서울 시내 각처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는 해질 무렵부터 교외로 번져나갔다. 오후 8시경에는 약 1천명의 군중이 마포 전차 종점 부근에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였고, 이날 시위는 밤 11시경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 학생 약 2백 명이, 밤 12시 20분경 약 4백 명의 군중이 종로 네거리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는 등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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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희 기념비
어윤희(1880-1961)는 일제강점기 개성에서 여성들에 의한 3, 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사업가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16세에 결혼하여 3일 만에 남편이 동학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죽어 청상과부가 되었다. 새로운 삶을 위하여 개성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1910년에 북부교회 교인이 되었다. 1912년 개성 미리흠여학교(美理欽女學校) 기예과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전도사로 외딴섬의 전도와 독립정신계몽을 자원하였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수백장이 북부교회 목사 강조원(姜助遠)에게 전달되었으나 그가 소심하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자, 어윤희가 보따리장사를 가장하고 대낮에 집집마다 독립선언서를 돌렸다. 이것을 본 호수돈여학교 사감 신관빈(申觀彬), 장님전도부인 심명철(沈明哲) 등이 합류하였다. 그 결과 개성의 만세시위운동은 여성들에 의하여 선도되었다. 만세시위 주모자로 잡혀 2년간 옥고를 치르는 가운데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고자 재감자들과 긴밀히 연락하여 일제히 옥중만세를 불렀다. 출감한 뒤에도 독립운동자들에게 비밀리에 여비를 마련하여주었으며, 육혈포탄환 등을 감추어 전달하기도 하였다. 노년에 개성에 유린보육원(有隣保育院)을 설립하여 고아사업을 하였으며, 6·25 때 부산으로 피난하여 1952년 서강교회 장로로 10년간 시무하였으며, 1953년 나이팅게일기장, 1959년 인권옹호공로표창을 받았다. 그 뒤 서울 마포에 서강유린보육원을 설립, 운영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1995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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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 묘,추모비
베델(1872~1909)S는 일제강점기 언론 활동으로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독립운동을 펼친 영국인 독립운동가다.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고종의 밀서를 보도하는 등 일본의 침탈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는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했다. 베델 선생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일제는 영국에 추방을 요구했다. 추방 소송 중 건강이 악화한 베델 선생은 결국 1909년 5월 1일 37세로 순국,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베델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1950)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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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 묘
헐버트(Hulbert, Homer B)(1863-1949)1863년 1월 26일 미국에서 태어났다. 1886년 내한하여 육영공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쳤다. 1905년 11월, 고종(高宗)의 비밀 특사로 미국을 방문하여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행정부에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일본의 보호조약 저지를 호소하였으며, 1906년에는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위한 고종의 비밀 특사로 임명되었다. 1907년 7월 초 헤이그에서 이상준과 이준, 이위종 특사를 돕고 그달 10일 ‘평화클럽[Peace Club]’에서 일본의 불법성을 폭로하였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나기 위해 헤이그를 출발하여 미국에 도착하였는데, 그해 8월에 고종이 퇴위하자 호머 헐버트는 일본의 저지로 미국에 남게 되었다. 그는 1907년부터 1945년까지 38년 동안 미국에서 기고와 강연, 회견 등을 열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9년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서 ‘한국 독립 호소문[What About Korea]’을 제출하여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한국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1942년에는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에서 한국인들의 단결과 대일 투쟁을 호소하였다. 1947년 7월에는 미국 신문 『스프링필드 유니언(Springfield Union)』과의 회견에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고 주장하였고, 한국의 3.1운동은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라고 설파하였다. 1949년 8월 5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195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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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기념관
신석구(1875-1950)의 호는 은재이며,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선 감리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33세 때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선교사 왕영덕(王永德)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서울 서대문 밖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서 3년간 수학하고 감리교목사가 되었다. 그 뒤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지에서 목회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오화영(吳華英)·이필주(李弼柱)·박희도(朴熙道)·최성모(崔聖模)·이승훈(李昇薰)·박동완(朴東完)·김창준(金昌俊)·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台永) 등과 회합,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신석구는 재판 도중 조선인의 행복과 자유가 점점 증가하고 있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조선사람으로서는(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한다 해도 그러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조선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피고는 조선의 국민성을 잃지 않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조선독립을 계획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항상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출옥 후에도 감리교 목사로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감리교단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를 행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천안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검거,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에는 신사가 없는 지역인 평안남도 용강군 신유리 교회에 가서 시무하다가, 1945년 2월 이른바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해 용강경찰서에 3개월간 구금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공산당과 대결, 3·1절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基督敎民主黨)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1949년에는 진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피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였다. 1963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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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학회 창립지 표지석
1908년 8월 31일 한힌샘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우리 말과 우리 글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국어연구학회를 만들었다. 우리 얼,말,글을 지키고 널리 펴려는 선각자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 모임인 국어연구학회가 개화의 요람기에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를 열게 됨으로써 배달말글몯음(1911)→한글모(1913)→조선어연구회(1921)→조선어학회(1931)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 한글학회(1949)의 터전이 되었다. 봉원사는 우리 말, 글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1908년 8월 31일 국어연구학회(지금의 한글학회)가 창립총회를 연 곳으로 그 높은 뜻을 길이 남기고자 세운 표지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