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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 흉상
양기탁(1871~1938)은 1896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간부로 적극적 활동을 하다가, 그 해 말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될 때에는 한때 체포되기도 하였다.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선교사의 알선으로 3년간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여 견문을 넓히었다. 1902년에 이상재(李商在) 민영환(閔泳煥) 이 준(李儁) 이상설(李相卨) 이동휘(李東輝) 등과 개혁당(改革黨) 운동에 참가하였다. 1904년에 일제가 러 일전쟁을 일으키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내정에 간섭하면서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는 보안회(輔安會) 운동에 참가했고, 보안회가 해산 당하자 이상설 이준 등과 함께 그 후속단체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지방부장의 책임을 맡아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요구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1904년 7월에 영국인 베델(earnest thomas bethell)과 합작하여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였다. 당시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사장은 영국인 베델이 맡고, 총무를 양기탁이 맡았으나 실제로는 양기탁이 신문사를 총지휘하였다. 처음에는 1896년의 『독립신문』의 모범을 따라 1일 6면에 국문전용의 한글판과 영문판을 같이 수록하여 발간하다가, 1905년 8월 11일부터 국문판은 국한문혼용의 『大韓每日申報』로 바꾸고 영문판은 별도로 『korea daily news』라는 제호로 나누어 발행했으며, 뒤에 1907년 5월 7일부터 국문전용판으로서 『대한매일신보』를 역시 별도로 발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공식적으로 사장이 외국인(영국인) 이었으므로 일제통감부의 「신문지법」에 의한 검열을 받지 않고 발행할 수 있었다. 이 점을 활용하여 양기탁은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를 규탄하는 격렬한 필봉을 휘두르고 「을사조약」의 파기를 요구했으며,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논설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즉각 전재하고 영문판 『korea daily news』에도 영어로 번역 게재해서 세계에 알리었다. 특히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에서 의병운동을 상세히 보도하여 애국운동으로 높이 평가하고 의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당시 다른 신문들은 일제의 「신문지법」의 제약 때문에 의병운동을 보도하지 못하거나 보도하는 경우에는 「폭도」라고 표현하여 비난하면서 보도하는 실정이었다. 오직 양기탁이 제작하는 『대한매일신보』만이 「의병」이라고 당당하게 호칭하면서 이를 국권회복운동으로 높이 평가하고 지원하였다. 이 때문에 양기탁이 제작하는 『대한매일신보』는 애국계몽운동 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의 대변지까지 되어 이 시기의 모든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적 언론기관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1월에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지지하고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대한매일신보사 안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國債報償志願金總合所)를 개설하여 그 총무를 맡았다.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의 국권회복운동으로 양기탁을 극도로 증오하고 있었는데 국채보상운동까지 전국화하므로 이를 탄압하기 위하여 그를 근거도 없이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였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날조가 오래 갈 수는 없어서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이 법정에 서서 공소사실이 허위조작된 것임을 과학적으로 증거를 들어 부인함으로써 결국 양기탁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1907년 4월에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이회영(李會榮)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이 갑(李甲) 유동열(柳東說) 최광옥(崔光玉) 노백린(盧伯麟) 조성환(曺成煥) 등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여 총감독을 맡았다. 신민회는 전국의 주도적 애국계몽운동가 800여명을 입회시키어 한말 애국계몽운동을 실질적으로 배후에서 모두 지도하고 발전시켰다. 신민회의 본부를 대한매일신보사 안에 두고 전국적으로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을 지도하고 지휘하였다. 일제의 병탄이 가까워 오자 1909년 봄에 그의 집에서 신민회 전국간부회의를 개최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최고전략으로서 독립전쟁전략(獨立戰爭戰略)을 채택함과 동시에 그의 실천을 위하여 만주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기지를 창건하고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하여 1910년 8월에는 자신이 직접 독립군기지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하여 만주를 답사했으며, 1910년 12월에는 이동녕 이회영 등을 출발시키어 결국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일제는 황해도에서 안명근(安明根)의 군자금 모금사건이 일어나자 양기탁 등의 독립군기지 창건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1911년 1월 양기탁 등 16명을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또한 신민회를 탄압하고 해체하기 위하여 1911년 9월에는 신민회가 일제 총독 사내정의를 암살하려고 기도했다는 소위 「사내총독암살음모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이라는 것을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 800여명을 체포하고, 그 중 105명에게 실형을 선고했으며 양기탁에게는 최고형인 징역 10년을 선고하였다. 양기탁 등은 완강한 공판투쟁을 전개하여 항소심에서 징역 6년을 확정 받고 4년간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1916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동지규합에 노력하다가 중국 천진(天津)에서 또다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고국으로 압송되어서 2년간의 유배(거주제한)에 처하여졌다. 1919년 3·1운동 후 1920년 4월에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창간되자 언론계의 원로로서 유 근(柳 瑾)과 함께 그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1년 미국의원단이 서울에 오자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독립요청서를 제출하여 다시 일제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복역 중 어머니 인동 장씨의 별세로 일시 가출옥된 것을 이용하여 거듭 망명을 결행해서 만주로 갔다. 1923년에 편강렬(片康烈)·남 정(南正) 등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단체로서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였는데 의성단은 봉천(奉天)의 만철(滿鐵) 병원을 습격하는 등 장춘선(長春線)일대에서 활약한 용감한 독립군 단체였다. 1925년 1월에는 김동삼(金東三) 등 동지들과 함께 의성단, 길림주민회, 광정단(匡正團), 대한군정서 등을 통합하여 독립군단체로서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였다. 1926년 4월에는 정의부의 대표로서 소련에서 돌아 온 주진수(朱鎭洙), 천도교 혁신파인 고려혁명위원회의 김봉국(金鳳國),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 등 다수의 동지들과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여 그 위원장(당수)이 되었다. 고려혁명당은 주로 정의부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양기탁은 임시정부의 국무령 또는 주석으로 몇 차례 추대되었으나 거절해 오다가 1933년 10월에 국무령(국무위원)에 취임하여 1935년 10월까지 2년간 임시정부의 대표로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37년에는 조선혁명당의 대표로서 한국국민당 및 한국독립당과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다. 이렇게 조국광복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던 중 1938년 중국 강소성(江蘇省) 담양현(潭陽縣) 고당암(古堂庵)에서 병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끼친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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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폭파의거터 표지석
부민관폭파의거는 1945년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친일단체 대의당(大義黨)이 개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장에, 조문기(趙文紀) 등 애국 의사들이 폭탄을 설치, 일제 고위간부와 친일 민족반역자들의 제거를 기도한 의거이다. 1945년 5월 일제의 단말마적인 탄압정책과 수탈에 대항하기 위해 20세 안팎의 조문기·유만수(柳萬秀)·강윤국(康潤國)·우동학(禹東學)·권준(權俊) 등은 서울 관수동유만수 집에서 비밀결사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하였다. 이들 애국청년당원들은 일제의 고위간부나 친일파를 제거, 민족의 정기를 드높이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마침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朴春琴)이 대의당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태평양전쟁에서 아시아민족의 전쟁 수행을 강조하기 위해, 7월 24일서울 부민관에서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들은 대회에 참석하는 일제 고위간부와 친일도배들을 한꺼번에 폭사시키고자 부민관대회장의 폭파계획을 수립하였다. 애국청년당원들은 수차에 걸친 비밀회의를 통해 폭파계획에 만전을 기하며, 유만수가 서울 수색변전소(水色變電所) 작업장에서 입수한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폭탄 2개를 제조하였다. 이렇게 만든 사제폭탄 2개를 휴대하고 대회 전날 밤 자정이 지난 뒤, 부민관 뒷담을 넘어 부민관에 들어가 무대 뒤에서 화장실로 통하는 통로에 폭탄을 장치하고 거사시간만 기다렸다. 24일 저녁 주최자인 박춘금을 비롯해 조선총독·조선군사령관 등 일제 총독부 고관과 중국측 대표 정원간(丁元幹)·정유간(鄭維幹), 만주국 대표 강춘전(康春田), 일본측 대표 다카야마(高山虎雄) 및 국내 친일파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대회가 진행되었다. 주최자인 박춘금이 등단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매국매족의 궤변을 토하고 있던 순간, 요란한 폭음소리와 함께 장내가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대의당원 한 사람이 폭탄 선을 잘못 건드려 예정보다 빨리 폭발하였던 것이다. 비록, 침략자와 그들의 주구들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회의 자체를 좌절시키고 독립을 열망하던 대한인의 기개를 다시 한 번 과시한 사건이었다. 이 폭음에 놀란 일본 경찰은 황급히 모든 문을 잠그고 범인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으나, 조문기 등 애국청년당원들은 이미 그 자리를 피해 붙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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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학덕 추모비
이희승(李熙昇, 1896년 6월 9일 ~ 1989년 11월 27일)은 대한민국의 국어학자, 시인, 수필가이다. 자(字)는 성세(聖世), 호(號)는 일석(一石),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서기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1913년까지 주시경(周時經)의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에서 한글과 국문법을 학습하고 독립사상을 섭취하였다. 1929년에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중심이 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의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1935년의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朝鮮語標準語査定委員會)의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1월부터 1940년 6월까지 조선어학회(조선어연구회를 1931년 1월에 확대 개편)의 〈외래어 표기 및 보수문제 협의회〉의 책임위원으로 이극노(李克魯)·정인섭(鄭寅燮)과 함께 선임되어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하였다. 1934년 5월 국사와 국어국문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단체 진단학회(震檀學會)창립의 발기인이 되어 국학운동에 진력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와 한글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운동(朝鮮語學會運動)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의 선고를 받고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와 한글학회 이사를 역임하면서 국어국문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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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동상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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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동상
안중근(1879 - 1910)은 일제강점기 이토저격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의병장, 의사(義士)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신. 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안인수이다. 아버지 진사 안태훈(安泰勳, 安泰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의 3남 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다. 어려서는 안응칠(安應七)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안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해 자(字)가 되었다. 6, 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史記) 등을 읽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해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 수렵자)을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을 때 참가하였다. 다음 해에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한때는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다가 뒤에 만인계(萬人契: 1,000명 이상이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 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교회 신자들과 함께 만인계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등 수완을 발휘하였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교육 등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는 다음 해 귀국하였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해 석탄상회를 경영하였다. 정리한 뒤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학교 경영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이 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3, 4개월 뒤에는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 · 김기룡(金起龍)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 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김두성(金斗星) · 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 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 ·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 리를 다니면서 이상설(李相卨) · 이범석(李範奭) 등을 만났다.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 · 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 · 엄인섭 · 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 · 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사를 통해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오는 것을 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禹德淳, 일명 禹連後) · 조도선(曺道先) · 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침착하게 걸어가 이토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4발을 쐈다. 다시 이토가 아닐 것을 대비해 주위 일본인에게 3발을 쐈다. 처음 쏜 4발 가운데 3발은 이토, 1발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도시히코[川上俊彦]의 오른팔을 맞혔다. 이어서 쏜 3발은 비서관 모리타이지로[森泰二郞], 만주철도이사 다나카세이타로[田中淸太郞]를 맞혔다. 1발은 플랫폼에서 발견되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旅顺监狱)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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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창의군 탑
십삼도창의군은 1907년 경기도 양주에서 조직되었던 항일의병부대이다. 1907년 8월 군대해산을 계기로 활발한 의병운동이 재개되는 가운데 9월 강원도 원주 등지에서 활약하던 이은찬(李殷瓚) · 이구재(李九載, 본명은 求采)가 의병 500명을 모집하였다. 그 뒤 경상북도 문경으로 거유(巨儒)인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가 그를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인영은 원주를 거점으로 하는 관동창의대장에 오른 뒤 사방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김세영(金世榮)을 서울로 잠입시켜 격문을 등사해 각국 영사관에 전달함으로써 항일의병투쟁의 합법성을 국제적으로 호소하였다. 이인영은 원주를 떠나 횡성 · 지평(砥平) · 춘천을 횡행하며 8도의병 규합에 진력하면서 각 도의 의병부대에 격문을 띄워 11월 양주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에 호응한 각 도의 의군은 ‘13도창의대진소’를 설치했으며,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편성된 13도창의대진소의 부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13도의병 총대장 이인영 그 배하에 전라창의대장 문태수(文泰洙), 호서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교남창의대장 신돌석(申乭石), 진동창의대장 허위(許蔿), 아장 박정빈(朴正斌), 관동창의대장 민긍호(閔肯鎬), 관서창의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북창의대장 정봉준(鄭鳳俊)이었다. 그리고 총병력은 1만명에 이르렀고 그 중에는 정예군이라 할 수 있는 해산군인 3,0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뒤 원수부 13도창의대진소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호서창의대장 이강년, 교남창의대장 박정빈, 진동창의대장 권중희(權重熙), 관서창의대장 방인관, 관북창의대장 정봉준으로 개편되었다. 개편 후의 의병장은 모두 양반 유생 신분으로서 천민 출신의 용장인 신돌석이 배제되었다. 또한 홍범도(洪範圖) · 김수민(金秀民) 등 평민 출신 의병장이 연합전선에 참가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 이 13도연합의군이 폭넓은 대중적 기반을 형성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11월부터 서울 진격을 목표로 설정하고 진격을 개시해 경기 일대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908년 1월 말 총대장 이인영이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통수권을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문경으로 떠났다. 제2대 총대장이 된 허위는 제2차 서울탈환작전을 수행했으나 화력의 부족과 일본군에게 의병부대가 개별적으로 타격을 받아 결국 연합의병의 서울탈환작전의 목표는 달성할 수 없었다. 이로써, 13도창의군은 완전 해산해 각기의 연고지로 돌아가 독자적인 의병활동으로 환원하였다. 이인영은 1909년 6월 일본군에게 잡혀 9월에 순국함으로써 3년 종상(終喪: 어버이의 삼년상을 마침)의 꿈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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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규 구 묘
김정규(1993 - 1960)는 함남 함흥(咸興) 사람이다. 1913년 간도 용정촌(龍井村)에서 북장로파 계열의 영국인 목사 박걸(朴傑)이 혼춘(琿春)지회를 설립할 때 참여하여 박태항(朴兌恒)·한수현(韓秀鉉)과 함께 선교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20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혼춘지방의 독립만세운동에 있어서 주동자인 황병길(黃炳吉)의 뒤를 이어 연설하고, 시위에 모인 군중 800여명과 함께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들은 손마다 작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1919년 9월 11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회장인 문창범(文昌範)으로부터 "국제연맹회의에서 한민족의 독립문제를 논의할 때 세계 각국의 여론을 환기하기 위하여 군중들에 의한 시위를 거사하여야 한다."는 밀서를 받고 고일섭(高日燮)·안태국(安泰國)·김한익(金漢益) 등과 함께 협의하여 대한국민의회 본부에 시위운동 후원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시위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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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근 기념비
손명근(1871 - 1942)은 경기도 고양군 뚝도(高陽郡纛島)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길림성 관전현에서 박장호(朴長浩)를 도총재(都總裁)로 하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고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과 함께 동년 11월 국내에 파견되었다. 대한독립단은 국내 각군과 면에 그 지단(支團)을 설치하고 만주와 국내가 서로 연결하여 독립은 목적으로 하는 선전문을 인쇄 배포하고, 단원 및 군자금을 모집함과 아울러 독립군이 국내 진공시 무력항쟁에 호응하도록 하는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사명을 부여하고 김기한 등을 국내에 밀파하였다. 이에 그는 함경도와 강원도 지방에 보낼 '격고국내진신사림(檄告國內縉紳士林)'이라는 격문을 비롯하여 '경고 국내동포중 왜인 관리자', '경고 국내 경향 각부호' 등 인쇄물 다수를 볏자루에 넣어 자기 집으로 보내 보관하였다. 이들은 서울에 총기관인 중앙본부를 설치하고, 각도, 군지단을 설치하기 위하여 1920년 말까지 군자금 모집, 단원 모집 및 인쇄물 배포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1921년 6월 30일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도록 예심판결을 받았으나, 동년 9월 30일 옥고를 치르고 증거불충분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