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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비(윤동주문학관)
윤동주(1917 - 1945)는 일제강점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저술한 시인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아명은 해환(海煥).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이며, 어머니는 김룡(金龍)으로 기독교 장로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아우 윤일주(尹一柱)와 당숙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다. 함께 자란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는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이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달라즈[大拉子] 중국인 관립학교를 거쳐 이듬해 가족이 용정(龍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에 편입, 졸업하였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귀향 직전에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송몽규와 함께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을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福岡刑務所]에서 생을 마쳤다. 교우 관계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함께 하숙 생활을 하였으며 윤동주의 자필 시집을 보관, 출간한 정병욱(鄭炳昱), 초간 시집에 추모시를 쓴 유령(柳玲), 연희전문학교 후배 장덕순(張德順), 고향 후배 문익환(文益煥), 평양 숭실중학교 동기 김형석(金亨錫) 등이 있다. 처녀작은 15세 때 쓴 시 「삶과 죽음」 · 「초한대」이며, 이 두 편의 수준이 상당한 것으로 미루어 습작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발표된 작품을 살펴보면 광명중학교 4학년 당시 간도 연길(延吉)에서 나온 『가톨릭 소년(少年)』에 동시 「병아리」(1936.11.) · 「빗자루」(1936.12.) · 「오줌싸개지도」(1937.1.) · 「무얼 먹구사나」(1937.3.) · 「거짓부리」(1937.10.) 등이 있다. 연희전문시절에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게재된 「자화상」 ·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경향신문』에 발표된 시 「쉽게 씌여진 시」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20세를 전후하여 10여 년간 전개된 시력여정(詩歷旅程)은 청년기의 고독감과 정신적 방황, 조국을 잃음으로써 삶의 현장을 박탈당한 동일성의 상실이 그 원천을 이룬다. 초기 시에서는 암울한 분위기와 더불어 동시(童詩)에 깃들인 유년적 평화를 지향하고자 하는 현실 파악 태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으로는 「겨울」 · 「조개껍질」 · 「버선본」 · 「햇빛 · 바람」 등이 있다. 후기 시로 볼 수 있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에 쓰여진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자아성찰의 시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 「자화상」 · 「또 다른 고향」 · 「별 헤는 밤」 ·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윤동주의 시는 한마디로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명령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하였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함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였다. 동시에 특정한 사회 · 문화적 상황 속에서 체험한 것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에 관련지음으로써 보편적인 공감대에 도달하였다. 유해는 고향 용정에 묻혔고, 1968년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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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여성상
항일독립운동여성상 건립은 서울 정동 배재어린이공원에서 첫 발걸음을 디딘 이후, 같은 해 12월 충청남도 홍성군 홍예공원에 건립되었으며, 배화여자고등학교에 세 번째로 세워졌다. 김서경·김운성 작가가 제작한 항일독립운동여성상 ‘혁명전야’는 100년 전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이 교복을 입은 오늘의 여성에게 등불을 밝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특히 배화여고에 건립된 항일독립운동여성상에는 1920년 3·1운동 1주년 만세운동에 참여한 배화여고 출신 2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배화여고에 설치된 항일독립운동여성상은 1920년 3월 1일에 일어난 ‘배화여고 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건립됐다. 배화여고 만세운동은 3·1운동 1주년이 되던 1920년 3월 1일 새벽, 배화여고 소속 두 학생이 빨래를 너는 척 하며 학교 뒷산에 올랐고 순식간에 40여명의 학생이 태극기를 들고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날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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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서거지 표지석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독립운동가ㆍ언론가ㆍ정치가. 호는 몽양(夢陽).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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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추모비
김규식(1881 - 1950)은 일제강점기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의 탄원서를 제출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학자. 종교인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부산 동래 출신. 중방파(仲房派) 23세손으로 1881년 김지성(金智性)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우리나라에 파견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주1가 내정간섭을 단행하자, 동래부사의 막료로 있던 그의 아버지 지성은 일본과의 관계설정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귀양갔다. 더욱이 1887년에는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6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마침 미국 북장로파의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H.G.)주2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으며, 그 때 요한이라는 교명을 받았다. 1906년에 조순환(趙淳煥)의 딸 은수(恩受)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얻었으나, 차남 진동(鎭東)만 남았다. 1917년에 첫부인과 사별하고, 1919년에 김순애(金淳愛)와 재혼하여 장녀 우애(尤愛)을 얻었다. 1897년부터 1903년까지 미국 버지니아주의 로노크대학교(Roanoke University)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듬해 프린스턴대학원(Princeton Academy)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 YMCA학교 교사, 경신학교(儆新學校) 학감으로 있었고,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교회활동으로는 1910년에 새문안교회의 헌당식을 보게 되었고 장로가 되었으며, 1911년에는 경기 · 충청장로회 서기로 뽑혔고, 1912년에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11년 일본의 교회탄압이 시작되자,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화북(華北)과 몽골 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1916년에 앤더슨마이어회사(Anderson &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올란바토르 지점장을 지냈다. 정치적 활동으로는 191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약소민족대회 및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의 해외활동을 들 수 있다.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한 그는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파리에 조선공보국(朝鮮公報局)을 설치하여 그 해 4월 10일 공보국 회보를 발간하는 한편, 젊은층을 흡수하여 신한청년당을 조직, 그 대표가 되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한국민족의 주장」 · 「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민족선언서를 작성, 배포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장, 학무총장 등에 선임되었으며, 1921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창설하고, 1927년에 그 의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東方民族)』을 창간하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그 주석이 되었고,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1945년 8 · 15광복이 되자 11월 23일 환국, 그 해 12월 27일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문을 국민에게 발표하고 즉각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의원 부의장, 3월 미소공동위원회 한국 대표, 5월에 좌우합작 준비작업을 추진하고, 그 해 6월부터 7월까지 ‘미군정 좌우합작위원회’ 예비회담에 참가하였고, 12월 입법의원 의장, 1947년 10월 민족자주연맹 의장이 되었다.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서울 도착을 계기로 더욱 자기의 정치노선에 정열을 쏟아, 남북협상의 정치활동을 펼쳤다. 그 해 2월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안에 반대하고, 김구와 연합하여 그 해 2월 남북협상을 제안하였다. 3월 15일 김일성 · 김두봉의 회신에 따라 남북협상 5원칙을 제시하고, 4월 21일 38선을 넘어 평양을 방문, 4자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성과 없이 돌아온 이들은 5월 14일 북한측의 제2차 남북협상 제의를 거절하고, 5월 21일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하여 그 이전의 5 · 10남한단독총선거에 ‘불반대 · 불참가’했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건국기초작업에 대한 그의 정치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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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 집
베델(1872~1909) 1904년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영국 언론인이다. 코리아 데일리 뉴스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일제의 부당한 행위를 비판하는 글과 사진을 보도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언론을 통한 그의 반일적 행동은 일제의 미움을 샀고 통감부는 주한 영국영사관에 강력한 항의를 하게 된다. 그 결과 베델은 두 차례에 걸쳐 영사관 재판을 받고 상하이에 있던 영국영사관 형무소에 이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서울에 돌아온 이후에도 일제는 베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견제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그의 건강은 악화되고 말았고 결국 1909년 5월 1일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5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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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회관터 표지석
조선어학회는 각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주시경(周時經)의 제자들이 1921년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설립한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이다. 조선어 연구회는 주로 한글 철자법을 연구하였고, 동인지 『한글』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아 훈민정음 반포일을 ‘가갸날’ 혹은 ‘한글날’로 명명하고 기념식을 개최하는 등 한글 보급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조선어 연구회는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정확한 한글 사전 편찬을 통해 우리말과 우리글의 의미를 정리하고 체계화시키며, 민족의 글과 정신을 일깨워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갱생을 꾀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사전 편찬을 위해서는 통일된 표준어와 맞춤법 등이 필요하였다. 이에 1930년 12월 조선어 연구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1931년 1월 조선어 연구회를 “조선어문의 연구와 통일”을 위한 기관인 조선어 학회로 개편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한글 사전 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조선어 학회는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시작으로 ‘조선어 표준어 사정안’,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차례로 확정하였다. 1940년에는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수정 발간하였으며, 본격적으로 한글 사전 편찬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글 사전은 1940년 조선 총독부에 『조선어대사전』 출판을 허가받았고, 1942년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 간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1942년 10월에 발생한 이른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한글 사전 편찬은 중단되었고, 원고와 서적은 전부 압수되었다. 조선어 학회 사건은 일제가 사전 편찬에 참여하던 교사 정태진(丁泰鎭)에게서 강제로 조선어 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내면서 시작되었다. 일제는 1942년 10월부터 1943년 4월까지 조선어 학회 핵심 회원과 사전 편찬을 후원하는 찬조 회원을 대거 검거하였다. 이들에게는 치안유지법의 내란죄가 적용되었고, 재판 과정에서 이윤재(李允宰)와 한징(韓澄)은 옥사하였으며, 이극로, 최현배(崔鉉培), 이희승(李熙昇), 정인승(鄭寅承), 정태진의 5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 학회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해방 후 석방된 조선어 학회 회원들은 조선어 학회를 재건하고, 한글날 행사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일제의 탄압으로 결실을 맺지 못한 한글 사전 편찬은 1945년 10월 서울역 창고에서 일제에 압수되었던 사전 원고를 되찾으며 다시 추진되었다. 조선어 학회는 1947년 한글날을 기해 『조선말 큰사전』 1권을 간행하였으며, 이후 1957년 6권 발간을 마지막으로 한글 사전 편찬을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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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집
해공 신익희(1894 - 1956) 선생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1919년 김시학,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다가, 4월 10일에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6월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 선생은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되어 조소앙, 엄항섭, 유림 등과 함께 선전 계획 수립, 선전 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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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수 집 터(김상옥 순국지)
1923년 1월 12일,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일로 김상옥 의사를 검거하기 위한 수사대가 꾸려졌다. 당시 동아일보의 기록에 따르면(2면 전면 호외/1923.03.15) 김상옥 의사는 본래 김상옥 의사와 이웃으로 알고 지내던 효제동 이태성의 집으로 숨어들었는데, 이태성 선생의 장녀가 바로 이혜수 선생이시다. 1923년 1월 22일 새벽 일제는 군경 1,000여 명을 동원 효제동 73번지 이혜수 집 주변을 4중으로 포위하였다.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쥐고 효제동 73, 74, 75, 76-2, 72번지 집들의 담을 넘나들면서 3시간여 동안이나 혼자서 지붕 위와 담벼락 등에서 공격해오는 일제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16명을 사상케 했다. 그러나 탄환이 다해 가자 상하이를 떠나오면서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라고 했던 말처럼,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34세, 그곳 효제동 72번지는 김상옥의 순국 장소가 되었다. 일제 경찰들은 지난 열흘 동안 계속 신출귀몰한 김상옥에 혼비백산해 온지라 두 손에 권총을 쥐고 벽에 기대선 채로 숨을 거둔 그의 죽음을 감히 다가가 확인하지 못하고 어머니 김점순을 불러와 사망 여부를 확인하게 하였다. 유해는 이문동 뒷산 공동묘지에 묘비도 없이 묻혔다. 서울 한복판에서 단신으로 수백 명의 무장경찰과 3시간이나 총격전을 벌인 예는 일제 35년 동안 전후무후한 일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김상옥 의사의 장렬한 죽음이 알려지자 1923년 2월 17일 상하이의 삼일당에서 추도식을 거행하고, 3월 1일자 『독립신문』에 그의 생애와 장렬한 서거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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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사비, 김상옥 어록비
김상옥(1876 - 미상)은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다음 해에는 풍기 시절부터의 동지인 한훈,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이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당시 종로경찰서가 독립 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김상옥은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000여 명의 일본 군경과 3시간 동안 접전을 벌이며 저항하다가 자결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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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집
이동녕은 본관 연안(延安). 호 석오(石吾). 자 봉소(鳳所). 충청남도 천안(天安)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 체결로 국권이 위축되자 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 등과 상동(尙洞)청년회를 조직, 계몽운동을 벌였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폐기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해 북간도로 가서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 등과 용정(龍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교포교육에 힘썼다. 1907년 귀국,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총무로서 활약하였다. 1910년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 소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과 교포교육에 힘썼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대동신문(大東新聞)》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발행하였으며, 1913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1919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議政院) 의장·내무총장, 1921년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 중 파벌싸움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안창호·여운형(呂運亨)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단결을 촉진하였다. 1924년 재차 국무총리가 되어 군무총장(軍務總長)을 겸직하고 이어 대통령대리가 되었으며, 1926년 국무령(國務領), 1927년 주석(主席)이 되었다. 1929년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 이사장에 피선되고, 같은 해 재차 의정원 의장이 되었으며, 임시정부 주석은 계속 역임하였다. 1935년 양우조(楊宇朝) 등과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가 되었는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에 가담하여 항일전을 구상하며, 1939년 김구와 전시내각을 구성,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다가 쓰촨성[四川省]에서 병사하였다. 임시정부 국장(國葬)으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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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선은전 광장)
선은전광장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를 부르며 남산 조선총독부를 향해 행진하던 수천 명의 시위대가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오후 3시경 고종 황제의 빈전이 마련된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연설을 한 시위대의 일단은 만세를 부르며 장곡천정(현 소공로)을 거쳐 남산 조선총독부를 향해 행진하였다. 행렬이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앞 광장에 이르자 학생과 시민들이 합류하여 인파가 3천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총독부를 향해 본정통(현 충무로)으로 들어서며 이를 저지하는 일제 군경과 맞섰다. 일부는 저지선을 뚫기도 했으나, 용산 조선군사령부에서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를 긴급히 배치함으로써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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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서울시가전투지
대한제국군 서울시가전투지는 1907년 대한제국 군인들이 일제의 강제적인 군대 해산에 항거했던 곳이다.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데 이어 1907년 8월 1일 군대마저도 강제 해산시켰다. 군인들의 무장봉기는 군대해산식 당일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군대 해산에 반대하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8월 1일 오전 8시경 장병들이 무장해제된 상태로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는 훈련원으로 출발하려 할 즈음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자, 격분한 장병들은 탄약과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하고 병영 주위에 초병을 배치한 뒤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서소문 일대에서 총성이 울려 퍼지자 숭례문 안에 있던 시위 보병 제2연대 제1대대의 병사들도 호응하여 무장을 하고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개시하였다. 한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일본군은 9시 30분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 전 병력과 제1·2대대의 응원병력을 투입하는 한편, 숭례문 성벽 위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막강한 화력과 숫자의 열세를 이기지 못한 한국군은 결국 10시 50분경 남대문 병영을 점령당한 데 이어 11시 40분경 서소문 병영마저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두 병영에서 퇴각한 한국군의 일부는 서소문밖 고지 일대를 배경으로 저항을 계속 했고, 각지로 흩어져 의병진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전쟁으로 발전한 정미의병의 기초를 놓고 의병의 전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