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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독립만세운동 선창터 표지석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인산일(因山日)]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 6.10 독립만세운동 선창터는 1926년 6월 10일 순종(純宗)의 국장행렬이 통과할 때 중앙고보생(中央高普生) 이선호(李先鎬) 등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先唱)하였던 자리이다. 제위에 오른 지 4년 만인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자조와 실의 속에 살다가 1926년 4월 26일 죽은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에 대한 전국민의 애도는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유언비어와 불온한 행동을 감시하는 등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심지어 육해군 7,000여 명을 경성에 집결시키고 부산과 인천에 함대를 정박시켜 놓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운동은 대체로 세 갈래로 추진되었다. 첫째 계열은 노총계(勞總系)로, 사회주의자 권오설(權五卨)을 중심으로 추진되다가 중국지폐위조사건(中國紙幣僞造事件)과 개벽지압수사건(開闢誌押收事件) 등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연류자가 붙잡힘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둘째 계열은 전문학생들이 중심이 된 사직동계(社稷洞系)이다. 1926년 4월 26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 80여 명이 세검정(洗劍亭)으로 춘계야유회를 가던 중, 순종 승하의 비보를 듣고 이 기회를 이용, 어떤 형태로든지 민족운동을 일으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5월 20일 40여 명이 연희전문학교 문과 2년생 박하균(朴河鈞)의 하숙집에 모여 순종인산일인 6월 10일 독립만세와 가두시위를 일으켜 민족독립을 성취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먼저 준비책임자로 이병립(李炳立)·이병호(李炳鎬)·이천진(李天鎭)·박두종(朴斗鍾) 등을 선출하고, 자금은 박하균·박두종 등이 맡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거사계획은 일제의 감시가 기성 독립운동가들에 쏠리는 틈을 타 이뤄졌기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어갔다. 6월 8일 이선호(李先鎬)·이병립·박두종·박하균 등이 서대문 솔밭에서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 격문 30매를 만들고, 다음날 김종찬(金鍾讚) 하숙방에서 이병립이 “2천만동포의 원수를 구축(驅逐)하라! 피의 대가는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작성하였다. 격문은 『시대일보(時代日報)』 배달부 김낙환(金洛煥)을 통해 빌린 인쇄기계로 사직동 이석훈(李錫薰) 하숙집에서 1만 여매를 인쇄한 뒤, 이선호·박두종·이천진·박하균·유면희(柳冕熙) 등이 각각 자기학교 학생 및 관련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셋째 계열은 중등학교 학생 중심의 통동계(通洞系)이다.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인 박용규(朴龍圭)·곽대형(郭戴炯)·김재문(金載文)·황정환(黃廷煥)·이동환(李東煥) 등이 순종승하소식을 듣고 시내 사립고보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5월 29일 통동의 김재문 하숙방에서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단기 4259년 6월 10일 조선민족대표 김성수(金性洙)·최남선(崔南善)·최린(崔麟)”이라는 격문을 기초하였다. 격문 5,000매를 등사하여 각기 1,000매씩 나누어 가진 뒤, 다시 이를 각 학생들에게 분배하여 거사일인 6월 10일을 기다렸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에 참가한 2만4000여 명의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하였다. 그리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오전 8시 45분경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학생 50여 명이, 오전 9시 30분경 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박두종 외 2명이, 오후 1시경 훈련원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1시 30분경 동대문 근처에서 『시대일보』배달부 김낙환과 청년 2명이, 오후 2시신설동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2시 20분경 동묘 부근에서 중앙고보생 박용철·이동환, 중동학교생 곽대형·황정환 등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살포하는 등 학생들의 항일독립만세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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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 집(대각사)
백용성(1864-1940)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장수 출신이며, 불교(佛敎)인이다. 16세에 해인사(海印寺)에 입산하여 수도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는 불법(佛法)에 의해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포교와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2월 27일에는 한용운(韓龍雲)에게 3·1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자기의 인장을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게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의 민족대표와 함께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던 중,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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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집
현진건(1900-1943)의 호는 빙허이며, 일제강점기 「빈처」, 「운수 좋은 날」, 「고향」 등을 저술한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다. 현진건은 1920년≪개벽 開闢≫에 <희생화 犧牲花>를 발표함으로써 문필 활동을 시작하여 <빈처 貧妻>(1921)로 문명을 얻었다. 1921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홍사용(洪思容)·이상화(李相和)·나도향(羅稻香)·박종화(朴鍾和) 등과 함께 ≪백조(白潮≫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였다. 1922년에는 동명사(東明社)에 입사,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1932년 상해에서 활약하던 공산주의자인 셋째 형 정건(鼎健)의 체포와 죽음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 자신도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 1937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빈궁 속에서도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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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천 집
김경천(1888-1942)은 만주와 노령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1919년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있자 민족적 책무를 자각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마침내 1919년 6월 6일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후 신의주 대안 안동현(安東縣)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총재인 안병찬(安秉瓚)의 체포로 인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서의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대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구입을 위해 북간도를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으나 그곳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하여 일본군의 감시와 조선인 체포로 인하여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이에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림속에 일단 피신하였다. 그런데 당시 수청지역도 일본의 조정을 받는 중국계 마적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한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에 곤궁에 처해있는 재러동포들을 구하기 위하여 의용군을 모집, 마적 소탕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즉 그는 처음에는 수청지역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마적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결국 1920년 수청지역에서의 마적 퇴치활동으로 시베리아지역에서 그 명성을 크게 얻었고, "김장군(金將軍)"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마적토벌에 성공한 후 그는 수청지역을 중심으로 군정(軍政)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만일 중국인이나 러시아인도 관할구역을 벗어나 타지역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에는 그가 발행하는 증명서를 소지하여야만 하였다. 아울러 재러동포들의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민정(民政)도 단행하였다. 1921년 봄 연해주 수청군 인접지역인 올가군에서 300여명에 달하는 통합빨치산 부대가 조직되자 김경천은 그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수청의 아누치노(도비허)구역에 있는 백군 까벨부대와 전투를 전개하였다. 또한 까르뚜크 마을의 치열한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수청 다우지미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는 1921년 초 수청 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군대의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된 그는 계속해서 수청지역의 마적 퇴치에 노력하였다. 1921년 8월 수청의병대는 러시아 참모부의 지령에 따라 모두 도비허로 이동하였다. 그는 9월 러시아 유격대 셉첸꼬 부대의 제안에 따라 의병대의 일부를 올가항에 보내는 한편 나머지 대원들은 아누치노로 이동시켰다. 특히 그의부대는 동포들의 요구에 따라 마적들을 방비하기 위하여 수청의 뜨레치푸진과 수주허에 주둔하였다. 10월 김경천부대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수청에 주둔한 백군을 공격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패하여 일본군과 백군의 추격을 받게되자 그는 기병을 데리고 이만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이만으로 이동한 김경천 부대는 1922년 정월 이만에서 백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적군의 사령관이 백군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청의병대와 더불어 러시아 적군도 함께 지휘하여 이만을 점령하였다. 이어 그는 1922년 3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약골리가를 공격하였다. 이에 러시아 백군은 우수리스크 쪽으로 쫓겨났다. 이어 백군이 한반도쪽으로 퇴각할 듯 보이자 그는 이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일본군의 경계선을 뚫고 추풍지역으로 돌격하였다. 그가 이처럼 승리를 거두게 되자 1922년 7월 연해주의 혁명군사위원회는 그를 뽀시에트 군사구역 조선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922년 9월 그는 뽀시에트로 이동 중 상부 시지미촌에서 백군 패잔병들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수청의병대는 그의 지휘아래 기마공격을 강행하여 승리하였다. 1922년 러시아와 중국 국경지방에 있는 단체는 각 단의 통일을 도모하는 동시에 장정의 모집과 무기의 수집에 힘써 10월 일본군의 철퇴가 완료되기 직전에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였다. 고려혁명군 총재는 이중집(李仲執)이며 소재지는 추풍(秋風)이었는데, 고려혁명군 동부사령관을 그가 담당하였으며, 본부는 그의 근거지인 수청에 두었다.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12월 말, '조선인 유격연합대 해산 및 국민전쟁 참가자 귀가'에 대한 우보레비츠 총사령의 명령이 내려왔다. 적군은 지금까지의 동맹군인 한인독립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그는 실의에 빠져 있었는데, 이러한 때에 상해(上海)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모두 모여 재기를 모색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에 그는 1923년 2월 상해에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 실망한 그는 1923년 4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다시 돌아와서 구로지코 부근에 무관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여 갔다. 또한 그는 1924년 3월에는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톡에, 그리고 지부는 니콜리스크에 두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활동도 러시아당국의 한인정책과 노령출신 2세들과의 갈등으로 점점 쇠퇴하고 말았다. 김경천은 그후 1930년대 전반기까지는 주로 블라디보스톡에서 한족군인구락부라는 것을 조직하여 산산이 흩어진 항일역량을 다시 수습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후 소련정부에 의해 옥고를 치르고 강제 노동수용소에 수감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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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운정 표지석
취운정은 1870년대 중반 민태호閔台鎬(1834~1884)가 지은 정자이다.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 이곳에 유폐되어 「서유견문」을 집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회합장소로도 이용되었다.1919년 4월 강택진은 외교·언론·선전을 통한 독립 방안을 모색하였고, 그 과정에서 현정근(玄貞根)을 만나 운동자금 200원을 제공해 주었다. 1920년 10월 서울 가회동 취운정(翠雲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연통제 기관으로 조선13도총간부를 조직하고, 교섭부를 맡아 경상북도에서 애국금 3,000원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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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집
지청천(1888-1957)의 이칭은 이청천, 호는 백산이며, 일제강점기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자 군인이다. 한말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교, 2학년 때 1, 2년생 40여 명과 함께 정부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에 들어갔다. 이 때는 본명인 지대형을 사용하였다. 유년학교는 뒤에 일본사관학교 예과가 된 3년제이며, 다시 본과 2년이 있는데, 유학 도중 한일합병이 되어 본과에 편입되었다. 제26기생으로 1913년 졸업, 중위가 되면서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일무력항쟁을 지도하기 위해 일본의 병서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찾았다.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滿洲軍政府) ·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간부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이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고 청산리싸움에서 대패하자, 일본군은 무차별 살육을 감행하였다. 이에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간도성(間島省) 안도현(安圖縣) 밀림으로 이동, 서일(徐一) · 김좌진(金佐鎭) 등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군단의 군사고문이 되었는데, 이때 이청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1년 6월 소련혁명군과의 마찰로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사변]이 발발하자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고려혁명군을 1개 여단으로 재편하는 데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여단 내에 설치한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4월경 군관학교 교육방침과 소련 당국의 규정이 대립되어 체포되었으나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고려혁명군 대표로 참가했고, 1924년 국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군사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항일 독립군의 재건과 통합 운동이 계기가 되어 북만주에는 신민부(新民府) ·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가 생기게 되고, 남만주에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이 조직되었고 서로군정서가 모태가 되어 대한통군부(大韓統軍部)가 조직되었다. 그 뒤 양기탁(梁起鐸) · 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대한통군부를 대한통의부로 개편하였고 다시 정의부로 확대 조직,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이 되었다. 김좌진이 저격당한 뒤,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 군사위원장이 되었으며,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이 되었다. 1932년에는 동아혈성동맹(東亞血成同盟)의 간부로서 각지의 항일단체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잠입하여 항일지하운동을 지휘하면서 한중연합군의 총참모장이 되었으나, 중국 공산당의 압력으로 무장해제 당한 뒤, 같은 해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인 특별반을 만들어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자 사령관이 되어 1945년 환국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환국 후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창설하여 단장이 되었다.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을 지냈다. 1962년에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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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뿐만 아니라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김구가 주도하는 반탁 · 건국 · 통일운동의 민주적 총본산격이어서, 이승만(李承晩)의 돈암장 혹은 이화장, 김규식(金奎植)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정부수립 이전 건국활동의 3대 요람으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임시정부의 공관으로 상당기간 활동본부 구실을 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내세운 민족주의 추구의 우국 정객들이 모여든 경교장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활동이나 건국실천원 양성에 주안점을 둔 보루로서도 주목을 받았다. 이곳 경교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구 휘하의 엄항섭(嚴恒燮) · 조완구(趙琬九) · 조소앙(趙素昻) · 조성환(曺成煥) 등이 정사를 주재하였다. 그리고 자주적 통일운동이 본격화되기까지 광복 후 이곳에 많은 인사들이 집결하였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집무실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시해된 뒤 국민장을 거행할 때, 당시 거족적인 애도 인파가 몰린 명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완전독립과 통일지향의 역사적인 영광과 시련이 교차된 경교장은 주인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1968년 삼성재단이 매입하여 고려병원(1995년 강북삼성병원으로 개칭)의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경교장은 복원공사 후 2013년 3월부터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2005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교장은 최창학(崔昌學) 소유의 별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金九)가 1945년 11월 중국에서 귀국한 이후부터 1949년 생애를 마칠 때까지 생활하던 사저 겸 집무실이었다. 당시 그 일대의 명칭이 다케조에마치[죽첨정(竹添町)]여서 건물 이름을 ‘죽첨장(竹添莊)’이라 하였으나 김구가 경교장이라 개명하였으며, 정치 활동이 본격화되자 ‘서대문 경교장’이라 불렀다. 경교장은 광화문에서 서대문 사이에 있던 동양극장 건너편, 즉 지금의 종로구 새문안로에 있는 강북삼성병원(구 고려병원) 자리에 위치해 있다. 연면적 945.45㎡의 지상 2층, 지하 1층의 단아한 양관으로,근대 건축가인 김세연(金世演)이 설계하여 1938년에 완공하였다.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답고 1층의 출창과 2층의 들임 아치창을 이용한 외관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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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사 표지석
1898년 9월 5일 사장 남궁 억(南宮檍), 총무원 나수연(羅壽淵) 등이 국민지식의 계발과 외세침입에 대한 항쟁의 기치 아래 지금의 서울 광화문에서 창간하였다. 남궁 억은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물려받아 오늘날의 합자회사와 같은 고금제(股金制)를 신문사상 최초로 채택해서 운영하였다. 500고(股:공동으로 하는 사업에 각각 내는 밑천)의 고표를 발행하여 자본금 5,000원을 목표로 하였으나 반수의 모금으로 발족되었다. 체재는 소형판(23×31㎝) 3단제로 본문은 4호 활자를 사용하였다. 문자는 국한문 혼용이라고 하나 거의 한자에 한글로 토를 단 정도의 한문위주의 문장으로 제작되어 ≪독립신문≫ 이후 여러 신문들이 순한글로 제작되던 전통을 깨뜨려 한학 식자층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지면의 기사배치는 대한제국시대의 다른 신문들과 거의 마찬가지로 논설·별보(別報)·관보·잡보(雜報)·외보·광고 등으로 구성하였으며, 1899년 11월 13일자부터는 지면 크기를 확대하여 34.5×25.2㎝의 4면 4단제를 채용하고 기서(寄書)·고사사조(故事詞藻)·습유란(拾遺欄:빠진 글을 뒤에 보충함) 등을 신설하였다. 1900년 1월 5일자 신문부터는 외신을 게재하는 ‘전보’기사란에 “한성 루터 전특체(電特遞)”라고 부기하고 외국 뉴스를 게재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날짜 사고(社告)의 “외국 사항에 전보를 직접(直接)치 못하여 보도에 만시(晩時)됨을 한하옵더니 현(現)에 영경(英京) 루터 전보를 정약통접(訂約通接)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영국 로이터통신사와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외신을 공급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신문의 초기 주필로는 유근(柳瑾)·박은식(朴殷植) 등이 활약하였으며 얼마 뒤 장지연(張志淵)도 합류하였다. 창간 때부터 1902년 8월까지 만 4년간 사장직을 맡은 남궁 억은 재임중 두번이나 구속되었다. 1902년 8월 31일에는 2대 사장으로 장지연이 선출되었다. 1904년 6월 17일 일본인이 한국에서의 황무지개척권을 주한 일본공사를 통하여 한국정부에 요구해오자, 이 신문은 그 부당성을 여러 차례 사설로써 보도하여 그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구국민중대회의 모임인 ‘보안회(保安會)’의 활동을 지지하면서 상세히 보도하여 배일(排日) 애국사상을 고취하였고, 대한제국정부가 일본측 요구를 철회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04년 2월 24일 이 신문은 한일의정서의 조인 내용을 게재했다가 외부의 게재금지 명령으로 기사를 삭제당하여 문제된 기사의 활자를 뒤집어 인쇄함으로써 이른바 ‘벽돌신문’이 처음 나오게 되었다. 1905년 11월 20일자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기사로 정간을 당하고, 사장 장지연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직원이 체포되었다. 이듬해 1월 24일 장지연이 석방되고 발행정지도 동시에 해제되었으나 장기정간으로 재정난이 악화되어 2월 12일에야 겨우 속간할 수가 있었다. 2월 17일자에는 사장 장지연, 부사장 김상연(金祥演), 회계 김시영(金始榮) 등이 사임하고 새로운 운영진이 사원총회에서 선임되었는데, 이 때 남궁 훈(南宮薰)이 3대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총무에 성낙영(成樂英), 회계에 김재완(金在完)을 선임하였다. 그 뒤 1907년 5월 18일 총회에서 사장에 김상천(金相天), 총무에 김재완이 선출되었고, 그해 9월 17일 총회에서 사장에 유근이 선출되었다. 1910년 6월 12일부터는 편집 겸 발행인이 성선경(成善慶)으로 바뀌었다. 이 신문은 합자회사 형식으로 경영되었으나 충분한 자본을 확보하지 못하고 독자들이 구독료를 잘 내지 않아 ‘사고(社告)’를 통하여 수차에 걸쳐 재정의 궁핍함을 밝혔다. 특히 1903년 2월 5일자 신문에 논설로써 신문발간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이 날짜 ‘사고(社告)’에 발행부수 3,000여 장에 구독료 및 광고료 수입이 매월 1,500여 원이고, 지출은 용지대·잉크값 등이 830여 원으로 흑자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구독료 미수금이 7,000여 원에 이르고 있고 용지 및 잉크값 등이 2,000여 원이나 밀려 폐간지경에 있음을 밝히자, 각계의 뜻있는 사람들이 10원 이상 200원까지 성금을 보내 곧 속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신문값은 제대로 걷히지 않아 경영은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경영난을 광고를 통해 많이 해소시키기도 했는데 1900년 이후부터는 전체 지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품광고로는 약품과 서적이 가장 많았으며, 비상품광고로는 사회의 어지러움을 반영하는 분실·개명·사기·경고 등의 광고건수가 많았다. 이렇듯 심한 경영난을 겪다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강행되자 신문제호가 강제로 ≪한성신문 漢城新聞≫으로 바뀌어 8월 30일자부터 9월 14일(제3470호)까지 발행되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이 신문은 경술국치 전까지 ≪뎨국신문≫과 함께 민족의식의 고취와 문명개화의 선구자로서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지로서 평가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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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서 표지석
전옥서는 서울 중부 서린방(瑞麟坊 : 현재 종로구 세종로 1가 부근) 의금부 옆에 있었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관제를 정할 때 고려의 전옥서를 답습하여 관원을 정하였다. 관원으로 영(令) 2인, 승(丞) 2인, 사리(司吏) 2인을 두었다. 그 뒤 1466년(세조 12) 『경국대전』 체제가 정비되면서 종6품아문으로 정착되어 조선 말기까지 계승되었다. 관원으로 제조 1인은 형방승지가 겸임하였으며, 실무관리로 주부(主簿, 종6품) 1인, 봉사(奉事, 종8품) 1인, 참봉(參奉, 종9품) 1인과 서리(書吏) 4인 및 나장(羅將) 30인을 두었다가 뒤에 서리는 6인으로 증원되었고, 나장은 5인으로 줄었다. 왕은 자주 사람을 보내어 전옥서와 의금부의 죄수를 살폈는데, 예종 때 전옥서 죄수의 가쇄(枷鎖)가 풀려 있어 매일 죄수를 검찰할 책임이 있는 형조월령낭관(刑曹月令郎官)과 전옥서의 주부 및 참봉이 직무태만으로 의금부에 수금되어 국문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전옥서는 형조의 지휘를 받아 죄수를 관장하는 곳으로 오늘의 교도소와 같으며, 그 상부기관인 형조는 매월 월령낭관을 교대로 파견하여 날마다 전옥서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를 검찰하였다. 조선시대에 죄인을 수감했던 감옥인 전옥서는 한말 한일 의병들이 옥고를 치루기도 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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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 동판
형평사는 192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설립된 사회운동단체이며, 1930년대까지 활동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기도 했다. 형평사의 설립목적은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백정도 참다운 인간으로 인정받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개항 이후 자유평등사상이 유입되고, 부분적이나마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백정들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정들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신분 차별의 대상이었는데, 1922년 일본의 특수부락민인 에다[穢多: 屠者]가 신분해방단체인 수평사(水平社)를 조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백정들은 자녀들의 입학거부문제를 계기로 1923년 4월 25일 경남 진주에서 신분 해방을 목표로 한 형평사를 창립했다. 창립총회에서 형평사취지서 · 사칙 · 세칙을 채택하고 위원을 선출하였다. 사칙(社則)에 따르면, 진주에 본사(本社)를, 각 도에 지사(支社)를, 군에 분사(分社)를 두며, 형평사의 창립을 주도한 진주 백정 이학찬(李學贊)과 신현수(申鉉壽) · 강상호(姜相鎬) · 천석구(千錫九) · 장지필(張志弼)이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여기에 호응해 지사와 분사가 활발히 설치되었다. 창립 1년 만에 전국적으로 지사 12개, 분사 64개가 조직되었다. 1924년 2월 부산에서 전국의 지사 · 분사 대표 330여 명이 참가한 형평사 전조선임시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본사의 서울 이전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결론을 짓지 못하고 다음 총회로 넘겨졌다. 그런데 이전을 주장한 장지필 · 오성환(吳成煥) 등이 중심이 되어 같은 해 4월 대전에서 형평사 혁신동맹을 결성하고 본부를 서울에 설치하였다. 같은 날 진주에서도 진주 본사가 주최하는 전국형평사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렇게 분열되는 과정에서 본사 이전 문제를 두고 갈등이 표면화되었지만, 실제 원인은 운동방법을 둘러싼 노선상의 대립이었다. 혁신동맹측이 사회주의적 노선을 지향하려 한 반면, 진주 본사측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양파는 통합을 위한 교섭을 시작해 같은 해 8월 대전에서 형평사통일대회를 개최했다. 여기서 양파는 각자의 조직을 해체하는 동시에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를 결성하고 서울에 본부를 두기로 하였다. 이 무렵부터 지방에서 형평청년회 · 형평학우동맹 등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대회 후 진주 본사측은 대전대회의 불승인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양파간에 다시 교섭이 진행되어 다음 해인 1925년 4월 양파가 합동으로 서울에서 전조선형평대회를 개최하여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 뒤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편, 이 대회에서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계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당분간은 내부 결속에만 주력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형평 청년들은 개인자격으로 또는 형평청년회 단위로 청년운동단체에 가입해 다른 사회운동에 접근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26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1927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형평사대회에서는 단체의 명칭을 조선형평사총본부로 바꾸었다. 1928년 4월 제6차 정기총회에서는 각지의 청년회를 해체하고 사내에 청년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이 때 일반 사회단체와 제휴하여 합리적 사회건설을 기한다는 등의 청년부 강령을 채택하였다. 이 무렵부터 다른 사회운동과의 제휴문제를 둘러싸고 제휴를 주장하는 임평산(林平山) · 심상욱(沈相昱) · 이종률(李鍾律)을 중심으로 한 신파와 전통적인 균등운동을 계속하자는 장지필 · 김종택(金鍾澤) · 길순오(吉淳吾) 등을 중심으로 한 구파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는 1929년 제7차 정기대회에서 표면화되었다. 1929년 말부터 1932년에 이르기까지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학생·노동자·농민들이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대중투쟁에 진출하면서 형평사 내에서도 기존의 조직을 해소하고 혁명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을 재결성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형평사는 1931년의 해소 논쟁과 1933년의 일명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을 겪으면서 그 세력이 급격히 퇴조하였다. 이후 형평사는 경제적인 친목이익단체로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35년 4월에 일제의 식민통치에 영합하는 단체인 대동사(大同社)로 전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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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보성사 터)
보성사는 1910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인쇄소이다. 설립 당시 천도교에서는 중앙교당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천도교관계 서적 및 교회기관지인 ≪천도교월보 天道敎月報≫를 간행하였다. 1910년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普成學院)의 경영권을 일체 인수하면서 따라 동교(同校)에 속해 있던 보성사인쇄소를 창신사와 병합하고 그 명칭을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다. 이 보성사는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광문회(光文會)의 신문관(新文館)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보성사는 비단 ≪천도교월보≫나 교회서적 및 학교교과서의 인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출판문화 향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한때 보성사의 적자가 누적되자 교회간부는 손병희(孫秉熙)에게 보성사의 폐쇄를 건의한 적도 있었다. 보성사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1919년 3·1운동 때 발포된 독립선언서의 인쇄였다. 1919년 2월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보성사로 넘겨졌다. 그달 27일 사장 이종일(李鍾一)은 공장감독 김홍규(金弘奎), 총무 장효근(張孝根)과 같이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극비리에 인쇄를 완료하였다. 총 2만 1000매의 선언서를 성공적으로 인쇄한 후 이종일의 집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이 선언서를 28일 각지에 보냄으로써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도중 인쇄소의 작업소리를 듣고 형사 신승희(申勝熙)가 현장을 목격하였다. 이에 놀란 이종일이 형사의 옷자락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와 뒤에 손병희로부터 받은 5,000원을 주며 눈감아주기를 간청해서 위기를 넘겼다. 또 10시가 넘어 인쇄 완료된 선언서를 손수레에 싣고 교당으로 가는 도중 일본경찰의 검문을 받았으나, 손수레의 짐은 인쇄된 족보라고 속여 무사히 옮길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가 무사히 은닉됨으로써 3·1운동이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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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대학 표지석
1909년 신민회(新民會)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장유순(張裕淳) 등을 기지 건설지 답사를 위해 만주에 파견하였다. 1910년 7월 이들은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鄒家街)에 우선 정착하였다. 그 뒤 토착민의 배척이 심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많이 받았으나, 1911년 봄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에게 구국이념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켜 조국광복의 중견간부로 양성시킬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었다. 소장 이동녕, 교관 김창환(金昌煥)·남상복(南相復)·이장녕(李章寧)·이세영(李世永) 등에 의해 운영되어, 1911년 4월 제1기 졸업생 변영태(卞榮泰)·성준용(成駿用)·김련(金鍊) 등 유수한 애국 청년 40여 명을 배출하였다.삼원보는 교통이 번잡하고 국제적 이목을 받기 쉬운 곳이라 판단하고, 인적이 드문 벽지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짐에 따라 통화현(通化縣) 제6구 합니하(哈泥河)로 옮기게 되었다.강습소의 본관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는 광활한 토지를 매수해야 하는 등 막대한 경비와 인력이 필요했다. 이에 이석영(李石榮) 소유의 전답(6,000석)을 매각한 돈으로 경비를 충당했고, 아울러 선생과 학생들의 노동력이 합쳐져 마침내 신흥강습소를 준공할 수 있었다. 본관이 낙성된 뒤, 1913년 신흥중학교로 개칭하고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다가 중학반은 폐지하여 지방중학에 인계하고 군사반만 전력하였다. 그런데 각지 애국 청장년들이 모여들면서 전부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919년 유하현 제3구 고산자가(孤山子街)로 이전함과 동시에 신흥중학교를 점진적으로 폐교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의 설립 이후의 행보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학교가 설립된 다음해부터 2년간 지속된 대흉작, 지방색에 의한 윤치국(尹致國) 학생 피살 사건, 마적에 의한 중견간부 윤기섭 등 납치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이에 실망한 이시영은 봉천으로, 이동녕은 러시아령으로 가는 바람에 권위 있는 독립투사 양성기관이자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신흥무관학교는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윤기섭·김창환·여준(呂準) 등의 굴하지 않는 기백과 인종(忍從)으로 각 촌락을 전전하면서 구걸을 하여 학생들의 굶주림을 달래며 학교의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3·1운동 이후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였는데, 이들은 특히 만주에서 무력항일투쟁을 벌려나갔다. 이때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육군 중위 지청천(池靑天), 윈난(雲南)사관학교 출신 이범석(李範奭) 등 유수한 무관들이 들어오면서 입학을 지원하는 학생들이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일제의 가중되는 탄압과 잇단 사고 등으로 1920년 가을 폐교되고 말았다. 폐교된 그 날 지청천은 사관생도 300명을 인솔하고 백두산지역 안도현(安圖縣) 삼림지대로 들어가 홍범도(洪範圖)의 부대와 연합하였다. 김좌진부대의 뒤를 따라 밀산(密山)에 도착하여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