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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세 순국지(충훈부)
조병세(1827 - 1905)는 개항기 한성부판윤,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순국지사이다.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현감 조유순(趙有淳)의 아들이다. 음관(蔭官)으로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고 1864년(고종 1) 실록청도청낭청으로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874년 함경도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에 승진되었고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 1887년 공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이조의 판서, 1889년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곧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1893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청일전쟁·갑오개혁 등 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고, 일제의 침략이 가중되면서 세상이 어수선하게 되자 정계를 떠나 가평으로 은퇴하였다. 뒤에 다시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과 의정부의정(議政府議政)을 역임하고 국왕의 고문인 특진관(特進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주로 가평에 은퇴하고 있으면서, 1896년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였다. 그 뒤 1898년 재상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1900년 다시 입궐하여 국정 개혁을 건의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경, ‘을사5적’의 처형을 주청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고종과의 면담이 거절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민족의 울분을 터뜨리고, 13도유생들이 5적의 처형과 조약폐기를 상소하였다. 그리고 19일에는 특진관 이근명(李根命),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李相卨) 등을 비롯한 조관(朝官) 30여 명이 개별 상소하여 5적의 처형과 조약폐기를 요청하였으나, 국왕의 확고한 대답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에 26일 참정(參政) 심상훈(沈相薰),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 이근명 등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고, 입궐하여 정청(庭請)의 소두(疏頭)로서 을사조약의 무효, 5적신의 처형, 새로 충량(忠良)한 인재를 뽑아서 외부대신에 임명하고,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5조약을 파기할 것 등을 연명으로 상소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표훈원(表勳院)에 연금되었다. 곧 방면되었으나 다시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석고대죄하며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가 또다시 일본 헌병에 강제 연행되었다. 연행당한 뒤 민영환이 대신 소두가 되었다. 그러나 민영환도 곧이어 평리원(平理院)에 연금되었다가 특명으로 풀려났다. 그 뒤 비분을 참지 못하여 29일 자결하였다. 강제연행된 뒤 곧 가평 시골집에 추방되었으나 30일 다시 상경하였다. 표훈원에 되돌아와 유소(遺疏)와 일본공사 및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상소하였다. 그런데 또다시 일본군이 가마에 태워서 강제추방하자 가마 안에서 음독하여, 조카 조민희(趙民熙)의 집에 당도하여 죽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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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자결 터
한말의 충신 민영환은 을사늑약의 폐기를 궁궐 앞에서 주장하다가 일본 헌병의 강제해산으로 실패하자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에 청지기의 집에서 국민, 외교사절, 황제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순국후 피묻은 옷과 칼을 상청(喪廳)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 5월 상청의 문을 열어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바닥과 피묻은 옷을 뚫고 올라왔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충정이 혈죽(血竹)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 나무를 절죽(節竹)이라 하였다. 선생의 집은 견지동 27-2 현 조계사 경내에 있었다. 종로구 인사동 공평빌딩 부근 민영환의 자결터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민영환(1861 - 1905)은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집안 출신으로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낸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 후 국가의 제반 제도의 개혁을 시도하였고, 친일적인 각료들과 대립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한일협약을 적극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5년 11월 종로 이완식(李完植)의 집에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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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단본부 표지석
대동단은 1919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이다. 흔히 대동단으로 알려진 이 조직은 1919년 3월 말경에 서울 전협(全協)의 집에 모여, 첫째 한국을 일본제국의 통치에서 이탈하게 해 독립국을 형성하게 할 것, 둘째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할 것, 셋째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할 것 등의 3대 강령을 제창하고, ‘조선민족대동단’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다. 단원은 귀족·관리·유학자·종교인·상공인·청년·학생·부녀자 등 각계각층 11개 사회단체 대표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비밀 유지를 위해 점조직으로 조직되었다.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군자금 등 재정은 전협이, 선전활동 및 대외활동은 최익환(崔益煥)이 맡았다. 그 밖에 김찬규(金燦奎)·박영효(朴泳孝)·민영달(閔泳達) 등이 참가하였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평안도·함경도·만주 등에 지부를 설치해 조직을 확대하였다. 1919년 4월부터 1년간 지하문서를 배포하고, 특히 『대동신보(大同新報)』를 제작하였다. 임시정부수립 이후에는 본부를 상해로 옮기려 했고, 의친왕 이강(李堈) 을 상해로 탈출시키려는 거사를 기도했으나 관련자가 붙잡혀 실패하였다. 의친왕 탈출 기도는 실패했지만 그 일을 통해 대동단이 국내외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이들은 1920년 6월 예심을 거쳐 12월 1심판결에서 전협과 최익환 등 31명이 징역 6개월에서 8년까지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가진과 나창헌(羅昌憲) 등이 대동단의 활동을 계승해 정남용(鄭南容)이 붙잡히기 전까지 각종 선언서·기관방략(機關方略)·포고문 등을 등사해 전국에 배포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선전, 유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이종욱(李鍾郁) 등을 파견해 대동단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19년 12월에 독립대동단규칙서에는 모두 8장 45개조에 달하는 규칙과 세칙 44개조가 첨가되어 대기관의 조직 구성을 볼 수 있다. 단원 중 의병장 임병찬(林炳瓚)의 큰아들 응철(應喆), 넷째아들 수명(守明), 동생 병대(炳大) 등 일가가 대를 물려 조국의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였다. 또, 주동자 전협 등은 한때 일진회원으로 친일파였으나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어 더욱 그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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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원 표지석
한양의원은 한성의사회 회장, 조선의사협회 초대 간사장을 역임한 근대 초창기의 양의 박계양이 운영하던 병원으로, 홍명희·정인보·최남선 등 당대 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동계 박계양(1882~1970)은 경기도 양주군 누암리에서 태어났다. 원래 그의 집안은 유학자 집안으로 신학문을 공부하겠다는 그의 선택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서양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산수와 일본어 등을 준비하여 의학교 입학시험을 쳐서 1904년에 입학한 그는 1907년 대한의원 교육부 1회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이비인후과를 더욱 깊이 공부하기 위해 1912년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이비인후과학 교실에 유학하였다. 귀국 후 총독부의원에서 잠시 근무하였으나 일본인 병원에 근무하기 싫어 사직하고 개업했다. 그는 직접 독립운동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가들이나 그 가족들을 도와주는 일에 앞장섰다. 한번은 중국에서 활동하는 여운형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대주었다가 상해에 독립군 자금을 보내었다는 혐의를 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등을 도와주어 당국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수재가 났을 때는 이재민들을 무료 진료하는 봉사활동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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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정부 유적지 표지석
한성정부는 1919년 4월 서울에서 세워진 임시정부이다. 1919년 3월 초 이교헌(李敎憲)·윤이병(尹履炳)·윤용주(尹龍周)·최전구(崔銓九)·이용규(李容珪)·김규(金奎) 등이 이규갑(李奎甲)에게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였다.이들의 권유로 각 방면의 대표들이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것을 결정하였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은 천도교 대표 안상덕(安商德), 예수교대표 박용희(朴用熙)·장붕(張鵬)·이규갑, 유교대표 김규, 불교대표 이종욱(李鍾郁) 등 20명이다. 4월 중순에 안상덕·현석칠(玄錫七) 등의 발기로 국민대회를 소집하기로 하여 13도 대표를 서울 서린동 봉춘관(逢春館)에 모아 협의하였다. 그 결과 간부 현석칠·안상덕 등과 학생 김사국(金思國)·장채극(張彩極)·김옥결(金玉玦) 등이 서울에서의 국민대회 개최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 날 임시정부 각원을 선거하기로 하였다. 4월 23일 봉춘관에 ‘국민대회(國民大會)’ 간판을 걸고, 임시정부 선포문과 국민대회 취지서, 결의사항, 각원 명단과 파리강화회의 대표, 그리고 6개조로 된 약법(約法)과 임시정부령 제1·2호를 발표하였다. 임시정부 선포문에서 “……아민족은 세계만방에 대하여 조선의 독립이오 조선민족의 자유민임을 선언하고 아울러 전민족의사에 기하여 임시정부의 성립되었음을 자에 포고하노라…….” 하였다. 국민대회 취지서에서 “3·1독립선언의 권위를 존중하고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여 인간필연의 요구에 보답하게 하기 위해 이에 민족일치의 동작으로써 대소의 단결과 각 지방대표자들로서 분회를 조직해 이를 세계에 선포한다.”고 하였다. 결의사항으로 ① 임시정부 조직, ② 일본의 조선통치권 철거와 군대의 철퇴 요구, ③ 파리강화회의 대표 선정, ④ 일본관청의 관공리 퇴직, ⑤ 납세 거절, ⑥ 일본관청에 청원급 소송 금지 등을 결의하였다. 각원으로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 이승만(李承晩), 국무총리총재 이동휘(李東輝), 외무부총장 박용만(朴容萬), 내무부총장 이동녕(李東寧), 군무부총장 노백린(盧伯麟), 재무부총장 이시영(李始榮), 재무부차장 한남수(韓南洙), 법무부총장 신규식(申圭植), 학무부총장 김규식(金奎植), 교통부총장 문창범(文昌範), 노동국총판 안창호(安昌浩), 참모부총장 유동열(柳東說), 참모부차장 이세영(李世永), 그리고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이승만·민찬호(閔瓚鎬)·안창호·박용만·이동휘·김규식·노백린 등을 선임하였다. 약법(約法)은 제1조 국체(國體)는 민주제를 채용함, 제2조 정체(政體)는 대의제(代議制)를 채용함, 제3조 국시(國是)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세계평화의 행복을 증진하게 함, 제4조 임시정부는 일체 내정, 일체 외교의 권한을 가짐, 제5조 조선국민은 납세·병역의 의무가 있음, 제6조 본 약법은 정식국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발표할 때까지 적용함 등이다. 그리고 임시정부령 1호는 납세를 거절하라, 2호는 적의 재판과 행정상 모든 명령을 거절하라는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한성정부는 연합통신(UP)에 보도되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더욱 선포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이 정부가 서울에서, 그것도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뒷날 여러 정부의 통합과정에서 정통성을 가지게 되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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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조형물
주시경(1876 - 1914)은 일제강점기 『국어문법』, 『말의 소리』 등을 저술한 학자. 국어학자이다. 본관은 상주(尙州). 초명은 상호(相鎬), 일명 한힌샘 · 백천(白泉). 황해도 봉산 출생. 아버지는 주학원(周鶴苑)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이다. 둘째아들로 둘째아버지 주학만(周鶴萬)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양아버지를 따라 1887년 6월에 상경하였다. 국어운동은 특히 한어개인교사, 상동사립학숙 국어문법과 병설, 상동청년학원 교사 및 국어야학과 설치, 국어강습소 및 조선어강습원 개설 등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경술국치 후에는 숙명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무릇 9개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깨우치기에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동분서주하며 정열을 불태웠다. 그가 가장 정성을 다한 국어연구는 국문동식회를 비롯한 의학교내 국어연구회 연구원 및 제술원, 학부 국문연구소 주임위원(奏任委員),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설립한 국어연구학회, 조선광문회 사전편찬 등의 활동을 통하여 깊어졌다. 그의 연구는 새받침을 처음으로 주장한 1897년 『독립신문』에 발표한 논설 「국문론」에서 그 방향이 시사된 바와 같이 우리말을 핵심으로 한 국어문법의 체계화였다. 주된 업적은 필사본 『국문문법』(1905), 유인본 『대한국어문법』 (國文講義, 1906), 국문연구소 유인본 「국문연구안」(1907∼1908), 『국어문전음학』(1908), 필사본 『말』(1908년 경), 국문연구소 필사본 『국문연구』(1909), 유인본 『고등국어문전』(1909년 경) 등이며, 학문적 축적을 거쳐 대표적 저술인 『국어문법』(1910)을 이룩하였다. 이 책은 독자적으로 개척한 초기국어문법의 하나로서 국어의 특성에 입각한 음운 · 품사 · 구문 · 어휘의 4부를 갖추고 있다. 특히, 그 구문론은 직소분석(IC분석)의 원리가 엿보이는 구문도해를 최초로 이룩한 것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그의 연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거듭된 그 수정판(1911 · 1913), 유인본 『소리갈』(1913년 경)을 거치는 동안에 순우리말로 서술하기에 그 나름대로 성공한 『말의 소리』(1914)를 저술하였다. 마지막 저술인 이 책은 구조언어학적 이론을 구체적으로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즉, 음운론에서 음소(音素, phoneme)주1에 해당하는 ‘고나’의 발견, 형태론으로 어소(語素, morpheme)주2에 해당하는 ‘늣씨’의 발견은 서구언어학에 수십 년 앞선 큰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수리학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구성으로 심화시켜 이러한 학문을 이룩하였는데, 그것은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한 공로로 인정된다. 그는 또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새받침에 의한 표의주의적 철자법, 한자폐지와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급진적인 어문혁명을 부르짖었다. 그의 이러한 학문과 주장은 학교와 강습소에서 길러낸 많은 후진이 형성된 후 주시경학파를 통해서 이어졌으며, 후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의 후진양성에 관해서는 새로 나타난 「한글모죽보기」(1917년 경)에서 최현배(崔鉉培) · 신명균(申明均) · 김두봉(金枓奉) · 권덕규(權悳奎) · 정열모(鄭烈模) · 이규영(李奎榮) · 장지영(張志暎) · 정국채(鄭國采) · 김원우(金元祐) · 안동수(安東洙) 등 550여 명의 강습생 명단으로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국어국문의 과학적 연구와 교육이 민족의 독립과 발전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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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집
방정환(1899 - 1931)은 일제강점기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한 아동문학가이다. 호는 소파(小波). 서울 출신. 아버지는 방경수(方慶洙)이다. 1909년 매동보통학교에 입학, 이듬해 미동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13년에 졸업하였다. 그 해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가정 사정으로 중퇴하였다. 1917년 손병희(孫秉熙)의 딸 손용화(孫溶嬅)와 결혼하였다. 그 해에 청년운동단체인 ‘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이듬해인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주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였다. 1921년 김기전(金起田) · 이정호(李定鎬) 등과 함께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5월 1일 처음으로 ‘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월간으로서 일본 동경에서 편집하고 서울 개벽사(開闢社)에서 발행을 대행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에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장을 배포하였다. 1925년에는 제3회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동화구연대회(童話口演大會)를 개최하였다. 1928년에 세계 20여 개 나라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방정환이 남긴 작품은 번안물이 대부분이다. 원문의 뜻과 흐름을 손상시키지 않고 외국어의 장벽을 무난히 돌파하여 동화 번안작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그가 번안 내지 개작한 동화들이 지닌 일관된 특징은 풍자와 해학의 정신과 교훈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종래의 유교도덕에 얽매어 있던 어린이들을 어린이다운 감성으로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감성 해방은 시대적 상황과 결부되어 그들을 웃기기보다는 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웬일인지 별 하나/보이지 않고/남은 별이 둘이서/눈물 흘린다.”(형제별)와 같은 동요에서 이러한 모습은 잘 나타나고 있다. 생전에 실천하고 남긴 업적을 간추려보면, 첫째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화운동가요, 사회운동가였다. ‘소년입지회(少年立志會)’의 조직과 3 · 1독립운동 참가, ‘천도교소년회’ 결성 및 육성이나, 아동을 ‘어린이’라는 용어로 ‘늙은이’ ·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킨 일 및 아동문제연구단체인 ‘ 색동회’ 조직, ‘어린이의 날’ 제정 등이 그것을 입증한다. 둘째로 번안 및 개작작가 · 동화작가 · 동화구연가 · 아동잡지 편집인으로서의 업적이다. 『사랑의 선물』(개벽사, 1922)을 비롯한 본격적인 개작 번안, 창작동화를 남기며 최초의 대표적인 구연동화가로 활약하고 『어린이』지를 통하여 윤석중(尹石重) · 이원수(李元壽) · 서덕촌 등 아동문학가의 발굴, 육성에 힘썼다. 셋째로 아동들을 소박하고 천진난만하며 순진무구하게 보고 감상적 · 관념적 · 권선징악적인 작품을 통해서 그들이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린이의 현실적 · 경제적 어려움을 이해하고 종래의 전통적인 부당한 대우를 시정하여 감성 해방(동심 회복)을 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그러므로 그는 금세기 우리나라의 지사(志士)요, 선구적 언론인이요, 교육자요, 문학가로 불려야 마땅한 인물이다. 생전에 발간한 책은 『사랑의 선물』이 있고, 그밖에 사후에 발간된 『소파전집』(박문출판사, 1940) · 『소파동화독본』(조선아동문화협회, 1947) · 『방정환아동문학독본』(을유문화사, 1962) · 『칠칠단의 비밀』(글벗집, 1962) · 『동생을 찾으러』(글벗집, 1962) · 『소파아동문학전집』(문천사, 1974) 등 8종이 있다. 1983년 5월 5일에는 망우리 묘소에 이재철이 비문을 새긴 ‘소파 방정환 선생의 비’가 건립되었으며, 1987년 7월 14일에는 독립기념관에 방정환이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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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동상
김상옥(1889 - 1923)은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다음 해에는 풍기 시절부터의 동지인 한훈,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이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당시 종로경찰서가 독립 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김상옥은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000여 명의 일본 군경과 3시간 동안 접전을 벌이며 저항하다가 자결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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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공훈 흥사단 단우 175명 명단 안내
흥사단은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경기도홍언(洪焉), 강원도염만석(廉萬石), 충청도조병옥(趙炳玉), 황해도민찬호(閔燦鎬), 경상도송종익(宋鍾翊), 평안도강영소(姜永韶), 함경도김종림(金宗林), 전라도정원도(鄭源道) 등 8도 대표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초창기에는 이민교포 및 유학생을 중심으로 학업과 인격수양, 생활개선, 경제력 증진에 주력하다가 1919년 3·1운동으로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에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조직하였다.또한 서울에 수양동맹회(1922), 평양에 동우구락부(1923)를 결성하여 국내에서 일제치하의 합법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의 두 단체는 수양동우회(1925)로 통합되었고, 그 뒤 동우회로 개칭하였다가 이른바 동우회사건(1937)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200여 명의 회원이 검거, 투옥된 가운데 강제 해산 당하였다. 광복 이후 1946년에 국내위원부를 조직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본부를 국내로 이전하였다. 1969년 8월 19일에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 사단법인으로 설립되었다. 1981년 6월 민족대학을 개설하였으며, 1985년 3월 도산사상연구회, 1989년 6월 도산아카데미연구원을 창립하였다. 1991년 2월에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를 결성하여 부정 선거 감시활동을 벌였다. 1992년 5월에 청소년연구원을 설립하였고, 1997년 3월에 민족통일운동본부를 설립하였다. 1998년 11월에 도산안창호 기념관 건립 및 개관(사단법인 도산기념사업회)하였으며, 2007년부터 독립유공자후손돕기운동본부를 창립하였다.2007년 5월에 미주위원부 산하 시카고지부를 창립하였고, 2008년 3월에는 평택지부에 도산안창호교육관을 개소하였다. 2008년 10월부터 대학생을 대상으로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의식,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청년인재를 양성하고자 미래사회리더스쿨을 운영하여 2010년 현재 6개 지부에서 운영하고 있다. 2009년 3월 대전에 만인산 푸른학습원을 개원하였고, 광주시에 청소년문화의 집을 개관하였다. 2009년 4월 흥사단 미주위원부 산하 토론토지부를 창립하였고, 6월에는 서울시 중부교육청으로부터 평생교육시설 신고증을 교부받아 평생교육 분야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흥사단은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하여 건전한 민주시민이 갖추어야 할 덕(德)·체(體)·지(智) 삼육(三育)을 기본덕목으로 하는 인격·단결·공민의 3대 훈련을 실시한다. 단우(團友)는 자아혁신·신성단결(神聖團結)·단무봉사·책임완수·대공복무(大公服務)를 5대 생활지표로 삼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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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중앙학림)
중앙학림은 1906년에 불교계의 근대화를 지향하였던 불교연구회가 불교계의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한 명진학교(明進學校)로 처음 개교하였다. 1910년 불교사범학교로 개편하였으며, 1914년 불교고등강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15년 1월 1일부터 10일까지 각황사에서 개최된 30본산 주지회의원 정기총회에서 불교고등강숙의 명칭을 중앙학림으로 개칭하고, 11월 5일 당시 숭일동[지금의 명륜동 북묘(北廟)]로 이전, 개교하였다. 학생은 전국 30본사를 9등급으로 나누어 등지별로 인원수를 제한하였고, 정원은 120명이었다.1922년 중앙학림은 불교계의 3·1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한용운의 지도로 중앙학림 학생들은 불교계의 만세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중앙학림은 총독부로부터 전문학교 승격이 거부되고, 1922년 4월을 기점으로 5년간 휴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8년 중앙불교전수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고, 1930년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됐다. 1940년 혜화(惠化)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가 1946년 동국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니 현재의 동국대학교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일제가 조선인들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학림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에서 운영하였던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그런 까닭에 1919년 불교계 3·1운동의 진원지가 되었고, 수많은 항일 승려를 배출하였다. 중앙학림의 맥은 현재까지 이어져 이후로도 많은 인재가 양성되고, 불교계의 걸출한 지도자들의 산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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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동상
김창숙(1879-1962)의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벽옹이며, 조선후기 『심산만초』, 『벽옹만초』, 『벽옹칠십삼년회상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 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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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집
김창숙(1879-1962)의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벽옹이며, 조선후기 『심산만초』, 『벽옹만초』, 『벽옹칠십삼년회상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 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