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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규 오광심 부부묘
김학규(1900~1967)는 1927년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지대본부 견습사관으로서 삼원보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28년 흥경현 왕청문(旺淸門)에서 양세봉(梁世奉)·고이허(高而虛) 등과 같이 조선혁명군을 조직하고 1930년에 동삼성(東三省)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자 그는 한중합작 항일투쟁을 협의하였으며 조선혁명군을 기동부대로 개편하여 유격전을 지휘하였다. 1931년 12월에는 신빈현(新賓縣)에서 조선혁명당대표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그는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2년 3월에는 조선혁명군의 참모장에 임명되었는데 조선혁명군 3개중대는 중국 의용군과 연합작전으로 신빈현(新賓縣) 남쪽에서 일본관동군을 격파하고 영릉가(永陵街)전투 등에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1933년 2월에도 한·중군 합작항일공작을 위해서 전권대표로 환인성(桓仁城)에 파견되는 등 만주에서의 독립전쟁 수행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소극적인 자세와 일군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동삼성에서의 무장항일투쟁을 더 계속할 수 없게 되자 1933년 12월 그는 독립군 장성들과 함께 산해관을 넘어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그는 남경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가하였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으로 통합한 후에는 중앙간부로 활약하였다. 1936년에는 남경에서 현익철·양기탁(梁起鐸) 등과 민혁당 비상대회를 열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분리되어 나가자 조선민족혁명당이라 개칭하였다. 1939년 사천성 기강에서 다시 한국독립당을 만들었으며, 이듬해에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참모에 임명되었다. 1940년 11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이동됨에 그는 참모처장 겸 참모장에 임명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그는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어 1940년 10월 김붕준(金朋濬)의장 탄핵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후 제3지대장 겸 징모제6분처 주임위원에 임명되어 1942년 2월 임지인 안휘성 부양(阜陽)에서 일본군 점령 치하에 광복군의 공작거점을 확보하고 광복군의 활동을 선전하였으며 적의 군사기밀을 탐지하는 외에도 중국 유격대와 같이 일본군에 대한 게릴라 작전을 감행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에 임명되어 활동하는 한편 오직 조국광복을 위한 애국충정의 일념으로 만난을 무릅쓰고 초모공작을 지휘하였는데, 그 결과로 제3지대의 초모인원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오광심(1910~1976)은 평북 선천 사람으로 김학규의 부인이다. 1934년에 김학규가 조선혁명군, 국민부 등 3개단체의 전권대표가 되어 임무를 띠고 만주에서 남경으로 갈 때, 동행하였다. 1935년 7월에는 남경에서 5당통일로 민족혁명당이 창립되자 부녀부 차장에 피임되어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40년 9월 17일에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김정, 조순옥 등과 함께 여군복을 입고 광복군 창립식에 참가하였다. 그후, 광복군이 편성됨에 따라 제3지대장인 부군 김학규와 함께 제3지대의 간부로서 광복군 선전활동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1944년 광복군의 초모 공작활동이 활발히 전개됨에 따라 초모 공작 대상이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 청년에 대한 초모 공작도 병행하였다. 광복군의 간부였던 오광심은 「한국 여성 동지들에게 일언을 드림」이라는 글에서 「광복군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는 것이니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자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됨으로 우리의 혁명을 위하여, 광복군의 전도를 위하여, 우리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여 광복군 대열에 용감히 참가하라」고 강조하여 여성들의 광복군 참여를 촉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김학규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오광심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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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삼 김은주 부부묘
신영삼(1896~1946)은 평안남도 평원 사람이다. 1915년 서울에서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를 졸업한 후 1918년 만주(滿洲) 봉천(奉天)으로 건너가 교포들의 의료사업과 민족사상 고취에 전념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만주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상해로 건너 가 유동열(柳東說)·김규식(金奎植)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중국항공창의 군의관으로 대일항쟁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1932년 4월에는 윤기섭(尹琦燮)·신익희(申翼熙)·최용덕(崔容德)·민병길(閔丙吉)· 등과 같이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여 그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그후 남경에서 중국군에 근무하면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김원봉(金元鳳)·김용기(金容基) 등과 중견군사간부를 양성하는데 기여하였다. 1936년에는 중경에서 의료업에 종사하면서 나창헌(羅昌憲)과 함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평안도 대표로 의정활동에 참여하여 광복시까지 활동하였다. 또한 1944년 3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상무위원이 되었으며, 1945년 2월 8일에는 신한민주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조국의 광복을 맞을 때까지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김은주(1905~1994)는 1931년 4월 민족의 자활을 목표로 하는 공평사에 참여하여 제6조 조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중국 충칭으로 이동해 1944년 3월 조선민족혁명당이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여 감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남편인 신영삼(申榮三)은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신영삼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김은주에게 202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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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경 양방매 부부묘
강무경(1878~1910)은 전북 무장군 풍면 설천에서 출생하였다. 필묵상(筆墨商)을 경영하고 있던 그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통탄하고 있던 중 유지인 심남일(沈南一)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격문을 받고서 결의 형제를 맺고 함께 김율(金聿)이 사망하자 심남일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선봉장이 되었다. 그 이후 그의 의병생활은 심남일과 일체가 되어 시종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의 부대는 여러 등지에서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능주 돌정의 전투에서는 심남일과 강무경이 모두 병석에 눕게 되는 불운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왜병 삼백여 명과 접전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다시 이듬해인 1908년 봄부터 전투를 재개하여 3월 8일 남평 거성, 4월 2일 능주 풍치, 5월 12일 보성 천동 등지에서 크게 접전을 하여 적 수십 급을 사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그 후 해산 조칙을 받고 1909년 7월 21일 의진을 부득이 해체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해산 후에도 강무경은 심남일과 거취를 함께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병 치료차 이전의 격전지였던 풍치의 바위굴에서 은신생활을 하던 중 적병에게 발각되어 10월 9일 심남일과 함께 체포되어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공소 취하로 형이 확정되어 동년 10월 4일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양방매(1890~1986)는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후기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인 강무경의 부인으로 남편을 따라 항일전에 투신하였다. 전북 무주 출신의 강무경이 심남일(沈南一)과 함께 전남 함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1908년에는 영암으로 이동했을 때 영암군 금정면의 선비 양덕관(梁德寬)의 집에 유숙한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하였다. 양덕관은 양방매의 친아버지였고 큰 오빠였던 양성일(梁成一)도 20세 청년으로 의병에 가담하였다. 일본군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영암을 떠나게 된 강무경이 여자가 따라나설 데가 아니라며 집에 남을 것을 권유했으나,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남편,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무경을 따라 의병이 되어 항일전에 나섰다. 이듬해 1909년 10월 9일 전남 화순군 능주면 바람재 바윗굴에서 남편과 함께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1년 동안 양방매는 남편부대의 일원으로 장흥·보성·강진·해남·광양 등지까지 전남 동남부 일대 산악지방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특히 1909년 3월 8일 강무경 의병이 남평 월교리에 머물다가 일본군 15명이 운곡으로 갔다는 보고를 받고 작전계획을 세운 다음 본진을 장암에 두고, 의진을 5개 부대로 나눈 후 대치·대항봉·월임치·덕룡산·병암치 등지에 매복시켜 놓고 유인작전으로 협공을 벌여 다수의 일본 군경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린 남평의 거성동 전투가 벌어졌을 때, 여기에 직접 참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1909년 9월부터 일제가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여 호남의병에 대해 파상적 탄압을 가해오자 10월 9일 강무경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강무경은 1910년 10월 4일 심남일과 함께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고, 양방매는 어린 여성의 몸이었기에 석방될 수 있었다. 정부는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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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개 김병일 부부묘
채원개(1895~1974)는 평남 영원 사람이다.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참가하여 항일전을 수행하다가 중국 황포군관학교에 파견되었으며, 그후 중국군에 입대하여 1939년까지 고급장교로 복무하였다. 1934년에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광동지부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임시정부가 광동으로 이전해 오자 이준식(李俊植)과 함께 임시정부 청사를 확보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됨에 따라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장에 임명되어 복무하였으며, 1943년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44년에는 광복군 제1지대장에 임명되어 항일활동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병일(1905~1971)은 평안남도 영원군 온화면 온양리에서 태어났다. 1921년 5월 6일 채원개와 결혼했다. 김병일은 남편 채원개를 도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임시정부 요원 가족들과 함께 중국 충칭으로 이동하였다. 1943년 5월 8일 충칭에서 개최된 한국독립당 제3차 전당대표대회에서 「각 당파의 통일 혹은 연합 방식으로 혁명진선을 공고히 하는 안」을 결의하였다.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 제2구 당원으로 참여하였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1971년 6월 5일 별세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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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이은숙 부부묘
이회영(1867~1932)은 서울 저동 사람이다.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여 일가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09년 봄 서울의 양기탁(梁起鐸) 집에서는 신민회(新民會) 간부인 그와 김 구(金九)·이동녕(李東寧)·김기홍(金基弘)·조성환(曺成煥) 등이 함께 모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방책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여름 그는 독립기지 건설의 적지를 찾기 위하여 만주에 파견되었으며,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鄒家街)지방을 선정하여 개척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석영(李石榮)·이시영(李始榮) 등 형제들과 일가권속을 모두 이끌고 1910년 봄 이 황무지로 망명하였다. 1910년 봄 추가장(鄒家莊)에 정착한 그는 1912년에 이주 동포들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1913년 동지들의 암살을 목적으로 일경이 파견되었다는 정보에 접하고, 다시 국내로 들어와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광무황제를 해외로 망명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광무황제가 붕어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임시의정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7월에 남경에서 한·중·일·필리핀·대만·안남(安南) 등 각국 아나키스트들이 모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자 그는 이 대회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메시지를 보내, 한국 무정부주의운동은 약소민족의 진정한 해방운동이요, 한국민족의 진정한 해방운동은 곧 무정부주의운동인 까닭으로 각국 동지들은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1930년 4월 국내에서 신현상(申鉉商)·최석영(崔錫榮)·차고동(車鼓東) 등이 수만원의 운동자금을 마련해 오자, 그는 이 돈을 자금으로 하여 만주에 총력을 집중하고, 상해·복건·북경에 연락부를 둘 것을 제안했다. 1931년에는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과 관련을 맺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동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이 상해에 모였으며 그를 의장에 추대하여 의열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 1932년에는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마련함과 아울러 주만일군사령관 암살등을 목적으로 대련(大連)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일경에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노령인데다가 일경의 무자비한 고문으로 끝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은숙(1889~1979)은 남편 이회영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 이래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투신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10년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일조했고, 1919년 중국 북경으로 가서 이회영과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지원하다 1925년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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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건식 오건해 부부묘
신건식(1889~1963)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신규식(申圭植), 신채호(申采浩), 박찬익 등과 함께 생활부조, 국사협력을 논의키 위해 만든 동제사(同濟社)와 대동보국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3년 4월 그는 중국군 중교로 항주 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중국군으로 복무하면서 우리 동포를 지원하면서 임시정부의 활동을 조력하였다. 1939년에 중경으로 이전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에서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임되어, 1945년 광복 때까지 입법활동을 통하여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데 심혈을 경주하였다. 1941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원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는데 진력하였고, 1943년 3월 4일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차장에 임명되었다. 1944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감찰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5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문제의 확충과 운영의 묘를 살려 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오건해(1894~1963)는 1940년 6월 정정화(鄭靖和)·김병인(金秉仁)·이헌경(李憲卿)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했다. 그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가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한국혁명여성동맹은 한국독립당의 여성 조직으로 1940년 6월 17일 창립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항일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요인들의 생계를 보살피고, 독립운동가 자녀들의 보육과 교육에 힘썼던 단체였다. 1943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의 조직을 정리할 당시 제2구 당원이 되어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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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 신순호 부부묘
박영준(1915~2000)은 경기도 파주 사람이다. 1938년에 한국독립당과 한국국민당이 통합되고 미국에 있는 대한독립단, 동지회, 국민회, 부인애국단, 단합회 등을 통합하여 한국광복진선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서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이때 그는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가담하여 항일연극과 강연, 합창, 그리고 전단을 배포하는 등 반일사상의 고취와 함께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일본 군대에 있던 한국인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여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이 되도록 하는데 큰 동기를 부여하였다. 1939년 11월 중경에서 임정의 인재양성계획에 따라 중국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 교통과에 입교하였으며, 1941년 12월에 중국중앙군관학교 제17기를 졸업하였다. 중앙군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0년에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자 그는 광복군 제3지대에 배속되어 지대장인 김학규 수하에서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2년 4월부터는 상위로 중경에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에 배속되어 근무하였으며, 1943년 1월에는 임정 한인청년회 문화부장으로, 그리고 동년 8월에는 총사령부 서무과장으로 근무하였다. 1944년 6월에는 이시영 재무장으로부터 위임장을 받고 임정 재무부 이재과장(理財科長)으로 근무하였다. 1945년 3월부터는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 겸 제3지대 훈련총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8월에는 개봉지구(開封地區)로 파견되어 그 곳에서 광복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만주로 가서 대한민국 주화대표단 동북 총판사처 외무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자위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신순호(1922~2009)는 충북 청원 사람이다. 1938년 8월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한중 합동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오광심(吳光心)·김정숙(金貞淑)·조순옥(趙順玉)과 함께 여군으로 참가하여 이채를 띠었다. 1942년 9월에는 임시정부 생계위원회 회계부에 파견되어 근무하였다. 1945년 8월에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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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민 안혜순 부부묘
문일민(1894~1968)은 평남 강서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동년 7월 남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미국 국회의원단이 내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는 일제기관 폭파, 일제요인 암살 등으로 우리의 독립의지를 표현하자는 방침 아래 특공대를 국내에 파견하게 되었다. 당시 대한청년단연합회에 소속되어 있던 그도 이 대열에 참가하여 제2대에 편성되어 평양에 특파되었다. 입국 도중 평남 안주 입석(安州 立石)에서 검문하려는 일경 1명을 사살하고 평양 시내에 들어와 평남경찰부에 폭탄을 던진 후 피신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1921년 9월 삼육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1924년에는 운남 육군군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1925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에는 다시 만주로 가서 정의부(正義府)의 독립군을 양성하는 군사교련에 주력했다고 한다. 1928년 2월에는 상해로 돌아 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제25회 이사회에서 특별회원으로 입회가 승인되었고, 그후 중국군에서 복무하기도 하였다. 1931년 9월에는 한국군인회를 조직하여 무장항일투쟁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33년 1월 15일에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흥사단(興士團) 원동반(遠東班)에 가입하여 제1반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김규식(金奎植) 유동열(柳東說)과 중령을 대표한 의정원 의원에 보선되어 이후 광복시까지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1934년 1월에는 김홍서(金弘 )와 같이 교민단(僑民團)재건을 위해서 활동하였고, 동년 10월에는 항주에서 한국독립당 대회에 참여하였으며, 제26회 의정원 회의에서는 박창세, 신공제와 함께 상임위원에 선출되어 계속 임시정부 운영에 전념하였다. 1936년에는 한국독립당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신한민주당 조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43년 4월 2일에는 임시정부 교통부 총무과장에 임명되었고, 1944년 10월 23일에는 참모부 유동열 참모총장 휘하에서 참모로 활약하였다. 이후 1945년 2월 신한민주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어 조국의 광복 시까지 오직 독립운동에 몸바쳐 동분서주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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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김마리아 부부묘
이범석(1900~1972)은 1915년에 여운형(呂運亨)을 만나 중국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였다. 1919년 5월에 만주로 옮겨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진력을 다하였다. 1919년 5월 3일에 신흥강습소가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되고 정식으로 개교식을 하였으며, 그는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졸업증서 발행수도 1920년 8월까지 2천 호가 넘었으며 이 학교가 독립운동에 끼친 공로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1920년 3월 북로군정서로 가서 연성대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그러가 중국은 중일 외교상 부득이 독립군을 간섭하게 되니 8월 10일에 독립군 부대 및 항일 단체에 대하여 국도변에서 멀리 옮기라고 교섭함에 그들과 타협하여 앞으로 국내 진입전 전개에 편리한 장백산 산속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8월 23일에 이동하던 중, 1920년 10월 5일에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곧 청산리(靑山里)에 당도하였다. 이때 일본의 토벌군이 청산리 주위를 포위하여 오자 우리 독립군은 임시 전투조직을 편성하고 그는 연성대장이 되어 본대인 보병 1개 대대를 인솔하고 백운평(白雲坪) 숲 속의 유리한 지형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0월 20일 9시경에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군과 교전이 시작되어 그날 저물도록 격전을 전개하고 일본군의 선봉부대를 섬멸시킨 뒤, 그 다음날부터 23일까지 천수동(泉水洞), 어랑촌(漁郞村), 만록구(萬鹿溝) 등으로 전지(戰地)를 옮기면서 일군의 주력부대를 강타하여 일본군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한 대전과를 올렸다. 1923년 5월에는 김규식(金奎植)·고 평(高平)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군사교육을 강화하였다. 이때 그는 기병사령이 되어 활약하였다. 그후 만주, 노령 등지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렸다. 1934년 낙양군관학교에 한국 독립군 양성을 위한 특별반이 설립되자 그는 교육대장의 책임을 맡아 독립군간부 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1940년 9월 17일에 한국 광복군 창립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때 그는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와의 마찰과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광복군은 창립 당시부터 난항을 겪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광복군의 대표가 되어 중국의 정부, 국민당, 군사 당국자들을 만나 광복군 조직 확대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1942년 4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부서의 재조정과 함께 각 지대의 통합 또는 재편성이 이루어지게 되어 제1지대, 제2지대, 제3지대로 개편되었다. 그 가운데 제2지대는 역사도 깊고 인원의 수적인 비중이 컸던 관계로 전체 광복군의 핵심부대라고 인정되었는데, 제5지대장 나월환(羅月煥)이 불의에 타계한 후 각지대 개편에 따라 사령부 참모장이었던 그가 지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제2지대장으로 서안(西安)에 부임하여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마리아(1903~1970)는 서울 성동 사람이다. 고려혁명군 정치공작대원으로서 서백리아에서 항일전투에 참가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되자 참모장인 부군 이범석을 보좌하며 중앙군관학교 제7분교의 노어교관, 전간단 제7분단한청반의 노어·중국어 교관으로 광복군 대원 교육에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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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구 이국영 부부묘
민영구(1909~1976)는 서울 종로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하고 망명하는 부친 민제호(閔濟鎬)를 따라 상해로 건너가 인성학교를 거쳐 만국항해학교를 졸업하고 선장으로 근무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되자 지달수(池達洙)·나태섭(羅泰燮)·김태산(金泰山) 등과 함께 주계장(主計長)에 임명되었다. 1941년 11월 광복군이 서안으로 이전됨에 따라 광복군의 경리를 맡아 광복군의 살림을 꾸려 나갔다. 1942년 12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직원에 임명되어 회계업무를 담당하였다. 1943년 독립운동자 가족을 사천성(四川省) 기강에 안주시키는데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동년 3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의 주계과장에 임명되어 1944년 6월까지 계속 늘어나는 광복군 대원의 보급지원 등 조달업무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4년 6월에는 다시 임시정부 내무부의 경무과원(에 임명되어 1945년 1월까지 임시정부 요인의 경호업무를 맡았으며, 1945년 6월에 광복군 부령으로 광복군 총사령부 제2과에 소속되어 조국광복시까지 복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국영(1921~1956)은 충북 청주 사람이다. 1941년 6월 17일 중국 중경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이 조직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10월 10일에는 중경에서 3·1유치원이 설립되자 연미당(延微堂)·정정화(鄭靖和) 등과 함께 교사가 되어 중경에 거주하고 있던 교민들의 자제를 교육하였다. 1944년 3월 그는 한국독립당의 당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생계부 부원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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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테일러 묘
테일러의 본업은 광산업이었다. 1919년 2월 28일 우연히 조선호텔을 들렀다가 고종황제의 국장 취재를 맡아줄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통신원(기자)의 일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그날 테일러의 아들이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고 그는 간호사들이 외국인 전용 병실 침대 밑에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숨기는 것을 목격한 뒤, 이를 입수해 보도하여 한국의 독립운동 소식을 세계에 알렸다. 독립 운동뿐만이 아니라 3·1운동 관련 기사로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던 테일러는 3월 3일 치러진 고종의 국장도 취재했다. 테일러는 고종의 국장 취재 이후 3·1운동 관련 후속 보도를 이어갔다. 그는 4월 16일 일본군이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교회에서 주민들을 학살한 '제암리 학살사건’ 현장을 찾아 취재했다. 그의 기사는 뉴욕타임즈 4월 24일자에 ‘일본군이 한국인을 학살했다고 전한다(Say Japanese Troops Massacred Koreans)’ 제하 기사로 게재됐고 일본에서 발간되던 영자지 ‘재팬 애드버타이져(The Japan Advertiser)’ 4월 27일과 29일자에도 보도됐다. ‘제암리 학살사건’ 외에도 테일러는 3·1운동을 주도했던 독립투사에 대한 재판도 취재했다. 동아일보 1920년 7월 13일자에 실린 손병희 선생(1861~1922) 등 독립투사 재판 관련 기사에는 “신문기자석에 처음으로 서양 사람 한 명이 들어왔다. 이 사람은 재판의 광경을 제일 먼저 세계에 소개할 미국 연합통신사의 통신원 테일러 씨더라”고 게재돼 있다. 테일러는 1923년 종로구 행촌동 내, 권율 장군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 붉은 벽돌집을 짓고 조선에서의 삶을 영위하지만 일본제국주의가 정점에 치닫던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당한다. 테일러는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국 정부와 미군정에 편지를 보내며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노력하지만 1948년 6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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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동상
안재홍(1891~1965)은 경기 평택 사람이다. 1912년 일본 동경에 거주하던 한국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유학생 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13년 1월 일본 조도전 대학에 재학중 중국 상해로 건너가 독립단체인 동제사에 가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서울에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청년외교단을 조직하고 총무를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9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월 조선일보의 주필로 재직하고 있을 때 신간회의 총무간사에 피임되어 강령을 작성하고 발표하여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각 지방의 창립총회를 지원하기 위하여 강연 등을 실시하면서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8년 12월 전남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봉기되자 당시의 정치단체인 신간회와 협동하여 조선일보 부사장직에 있으면서 조선민중대회를 열고 일제의 민족차별적인 처우를 규탄하다가 체포되어 1930년 1월 1일 기소유예되었다. 1937년 5월 남경군관학교 학생모집 운동으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고 1938년 5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9년 3월에는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에서 착수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에 연관되어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후 미군정청 군정장관, 민의원 의원 등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다가 6·25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