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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대한독립군용사들은 조국을 되찾기 위해 국내는 물론 만주, 연해주 지역등에서 처절하게 독립투쟁을 하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산화하였다. 이 탑은 독립군 무명용사들의 혼백을 받들기 이해 광복회 주관하에 일년여의 공사를 거쳐 2002년 5월 17일 제막식을 하였으며, 5단의 기단위에 좌대는 원형으로 삼태극을 만들었고, 독립군들의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3개의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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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동상
이봉창(1900 -1932)는 일제강점기 일왕투탄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로, 서울 출신이다. 이명은 기노시타(木下昌藏)이다. 1921년경 한 · 일 간의 임금 격차 문제에 눈을 뜨고 항일의식이 싹텄다. 1924년 9월 자택에 항일 단체인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 동 총무가 되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방랑 생활보다는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 1930년 12월 중국 상해로 갔다. 1931년 1월 한국인 거류민단 사무실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호소했으나 민단 간부들이 이봉창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겨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김구(金九)가 이봉창의 진의를 알고 자신이 조직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시켜, 이봉창의 소신대로 일본천황폭살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 자금이 여의치 못해, 월급 80원을 받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인쇄소와 악기점에서 일하며 확실하게 준비를 하였다. 원로 이동녕의 승인하에 김구도 군자금모집을 펴던 중 재미 동포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거사를 촉진시켰다. 당시 중국군 대령으로 복무하던 왕웅(王雄), 즉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해 상해공병창에서 수류탄 1개를 구입하고 김현(金鉉)으로부터 또다시 수류탄 1개를 입수하였다. 이 수류탄을 받은 즉시 거사자금 300원을 가지고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安重根)의 막내동생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식을 마친 뒤 17일 일본 동경으로 향하였다.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만주국 괴뢰황제 부의(溥儀)와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명중을 시키지는 못하고 체포되어 토요다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누가에[犬養] 내각이 총사퇴하고 다수의 경호 관련자가 문책당하였다.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10일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여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 보도가 나간 후 푸저우[福州]에 주둔하던 일본 군대와 경찰이 국민일보사를 습격, 파괴함과 동시에 중국 정부에 엄중 항의하는 등 중 · 일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인 자객을 산 뒤 일본 일련종(一蓮宗)의 승려 한 명을 암살하게 하여, 이를 빌미로 제1차상해사변(第一次上海事變)을 일으키는 등 그 파급 양상이 심각하였다. 1946년 7월 6일 이봉창의 유해를 서울 효창원에 안장하고 국민장으로 모셔져 오늘에 이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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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동상
강우규(1855-1920)의 자는 찬구, 호는 왈우, 이명은 강영일이며,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라오허현 지부장으로 사이토 마코토 총독 처단 투탄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이다. 1908년 신민회 간부로서 함경도를 돌며 기독교 선교와 학교 설립 운동을 벌이던 이동휘를 만나 감화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후 영명학교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가족들을 러시아로 이주시켰다. 1911년 봄 중국으로 망명하여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두도구에 터를 잡고 만주와 러시아 옌하이저우〔沿海州〕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순회하였다. 1915년경에는 지린성 라오허현〔饒河縣〕으로 거처를 옮겨 100여 호의 마을을 조성하고 신흥동이라 명명하였다. 1917년 봄 신흥동에 광동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19년 3월경 국내의 3 · 1운동 소식을 접하고 신흥동 동포 400~500여 명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다. 4~5월경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고 라오허현 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1919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갔다가 조선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곧 경질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신임 총독을 처단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러시아인에게 영국제 수류탄를 구입하였다. 1919년 6월 14일 수류탄 한 개를 품고 에치고마루라〔越後丸〕라는 일본 배를 타고 원산에 들어왔다. 서울로는 8월 5일에 상경하였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8월 12일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한다는 발표가 났다. 그가 부임하는 날짜는 9월 2일이었다. 그 소식에 신문에 난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 들여다보며 얼굴을 익혔다. 8월 26일에는 남대문역 부근 여인숙으로 거처를 옮기고 매일 역 주변을 답사하며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1919년 9월 2일 명주 수건에 폭탄을 싸서 허리에 묶고 남대문역으로 향하였다. 오후 5시, 사이토 총독 일행이 탄 기차가 남대문역에 도착하였다. 환영 행사를 마친 사이토가 미리 준비된 마차를 타려는 순간, 사이토 총독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마차에서 약 12~13m 떨어진 곳에서 터졌다. 사이토는 혁대에 파편 몇 조각이 박혔을 뿐이었고 수류탄의 위력에 신문기자, 경찰 등 37명이 다쳤다. 그중 2명은 며칠 뒤 사망하였다.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았으나 보름 후인 9월 17일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소속 경부인 김태석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1920년 2월 경성지방법원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였으나 4월에 경성고등법원이 기각하였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5월에 경성고등법원이 기각하면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해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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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 묘
백정기(1896 - 1934)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8월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서울·인천에 잠복하여 일군(日軍)의 기관 파괴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겨울 재차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21년 봄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변성명하고 본적과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으며 경향 각지와 북경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여름 그는 중대사명을 띠고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에 은신하여 대파괴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북경에 귀환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해에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청년(南華靑年)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서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공장의 직공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남경(南京)·상해 등지의 한중(韓中)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민남25현( 南二五縣)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일본·필리핀·베트남·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大會)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 북만(北滿)으로 가서 재북만한국무정부주의연맹(在北滿韓國無政府主義聯盟)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명의식의 고취와 민중훈련에 전력하였다. 1932년 2월 상해사변 직후에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3월 17일 주중일공사(駐中日公使) 유길명(有吉明)이 일본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정객, 군인 등 백여명을 상해 홍구(虹口) 육삼정(六三亭)이란 일본인 요정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하여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제의 역습을 받아 동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일본장기법원(日本長崎法院)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페병이 재발·악화되어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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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동상
전봉준(1855 - 1895)는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본관은 천안, 좌는 명좌, 호는 해몽이며 이칭으로는 왜소했던 특징으로 녹두장군이라고도 불린다. 아버지 전창혁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후 농민봉기의 불씨가 되었다. 1890년 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원성이 자자하던 1894년 정월에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 정부에서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 장흥 부사인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박원명을 새로운 고부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왔던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체포하고 살해를 일삼자 결국 1894년 3월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고 백산에 1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그 해 5월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두어 잠시 잠잠해진듯하였으나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9월부터 11월까지 전봉준, 손병희, 최익현 휘하에 20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으며 피신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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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기념비
3.1운동 100주년 기념비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비석이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는 장면과 옥고를 치른 이효덕의 사진을 해당 비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효덕(1895~1978)은 평남 용강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당시 평양 양무학교 교사로 있었던 이효덕은 밤을 새워가며 태극기를 만들고 학생 200여명과 함께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후 양무학교장의 선창에 따라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내로 행진시위를 하면서 주민들을 규합하며 경찰주재소까지 행진을 하였고 다음날에도 계속해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9월 2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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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공적비
항일독립운동공적비는 1942년 당시 성남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재학생이던 윤병운, 박원배, 박병양, 김덕균, 이학연, 이종복, 박병수, 박성호는 학생 독립단체인 신진당을 조직하여 만세운동과 일본총독 저격을 모의하고 후배들에게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복역 중 어린 나이에 옥사하거나 출감 후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위 학생들의 공로를 기리어 윤병운에게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 박원배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박병양에게 1999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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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윤용자 부부묘
지청천(1888~1957)은 일제강점기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한말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교, 2학년 때 1, 2년생 40여 명과 함께 정부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에 들어갔다. 이 때는 본명인 지대형을 사용하였다. 유년학교는 뒤에 일본사관학교 예과가 된 3년제이며, 다시 본과 2년이 있는데, 유학 도중 한일합병이 되어 본과에 편입되었다. 제26기생으로 1913년 졸업, 중위가 되면서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일무력항쟁을 지도하기 위해 일본의 병서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찾았다.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滿洲軍政府) ·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간부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이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고 청산리싸움에서 대패하자, 일본군은 무차별 살육을 감행하였다. 이에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간도성(間島省) 안도현(安圖縣) 밀림으로 이동, 서일(徐一) · 김좌진(金佐鎭) 등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군단의 군사고문이 되었는데, 이때 이청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1년 6월 소련혁명군과의 마찰로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사변]이 발발하자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고려혁명군을 1개 여단으로 재편하는 데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여단 내에 설치한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4월경 군관학교 교육방침과 소련 당국의 규정이 대립되어 체포되었으나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고려혁명군 대표로 참가했고, 1924년 국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군사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항일 독립군의 재건과 통합 운동이 계기가 되어 북만주에는 신민부(新民府) ·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가 생기게 되고, 남만주에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이 조직되었고 서로군정서가 모태가 되어 대한통군부(大韓統軍部)가 조직되었다. 그 뒤 양기탁(梁起鐸) · 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대한통군부를 대한통의부로 개편하였고 다시 정의부로 확대 조직,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이 되었다. 김좌진이 저격당한 뒤,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 군사위원장이 되었으며,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이 되었다. 1932년에는 동아혈성동맹(東亞血成同盟)의 간부로서 각지의 항일단체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잠입하여 항일지하운동을 지휘하면서 한중연합군의 총참모장이 되었으나, 중국 공산당의 압력으로 무장해제 당한 뒤, 같은 해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인 특별반을 만들어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자 사령관이 되어 1945년 환국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환국 후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창설하여 단장이 되었다.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을 지냈다. 윤용자(1890~1964)는 지청천의 부인으로서, 1930년대 가족을 이끌면서 독립운동가들이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40년 6월에는 정정화(鄭靖和)·김병인(金秉仁)·이헌경(李憲卿)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산하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했다. 이후 항일독립운동을 지속하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가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한국혁명여성동맹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여성 조직으로 1940년 6월 17일 창립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요인들의 생계를 보살피고, 독립운동가 자녀들의 보육과 교육에 힘썼던 단체로 알려져 있다. 윤용자의 이러한 활동은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남편 지청천, 아들 지달수(池達洙), 딸 지복영(池復榮) 등이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헌신과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지청천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 2017년 윤용자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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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선 이의순 부부묘
오영선(1886~1939)은 경기도 고양(高陽) 사람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李東輝)의 사위이다. 대한제국(大韓帝國) 당시 한국무관학교(韓國武官學校)를 졸업하고 1907년경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여 1914년 12월 이동휘와 함께 길림성(吉林省) 동녕현(東寧縣) 나자구(羅子溝)에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를 설립하고 교사로 재직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경기도지역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9월 20일 임시정부의 국무원(國務院) 비서장에 임명되어 국무총리 이동휘를 보좌하다가 1921년 2월 24일 면직되었다. 1923년 10월에는 상해 거주 한인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교민단(僑民團)의 의원으로서 교민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활동하였으며 동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가 설립되어 임시정부 옹호파와 국민대표회의 개조파에서 헌법기초위원(憲法起草委員)을 선출할 때 위원으로 임명되어 기초위원회 규정을 작성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4년 1월 12일부터 동년 12월까지 상해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의 학무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박은식(朴殷植)이 임시대통령으로 집권하고 있을 당시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에 선출되어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 3월에서 동년 11월에 이르는 기간에는 중국 동삼성 소재 항일독립운동단체의 분규를 수습 조정하는 임무를 담당하였고,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의 총재인 손정도(孫貞道)가 2년동안 간도에 가 있을 때 총재 직무대행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6년 안창호(安昌浩)의 주창에 의하여 조직된 임정경제후원회 발기준비위원회(臨政經濟後援會 發起準備委員會)에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상해에서 독립운동촉진회(獨立運動促進會)를 조직하여 안공근(安恭根)회장과 함께 한국민족의 해방을 촉구하면서 대동단결을 실현시키기 위해 활동하였고, 상해 임시정부의 신임시약헌(新臨時約憲)이 공포되어 개각된 김구(金九) 국무령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8월 이동녕(李東寧)이 수석 국무위원으로 있을 때 외무부장에 임명되었고, 1928년 4월에는 군무부장으로 활약하다가 1930년 9월 사임하였다. 1931년 11월 6일 그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와병으로 인하여 결원처리된 후 1939년 3월 10일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이의순(1895~1945)은 함남 단천(端川) 사람이다. 이동휘(李東輝)의 차녀이며 남편은 상해지역의 독립운동가 오영선(吳永善)이다. 1902년경 부친이 경기도 강화도(江華島) 진위대장으로 활동하게 되자 할아버지 이발(李發), 언니 인순(仁橓) 등과 함께 7세의 나이에 서울로 이사와 성장했다. 1911년 가을, 서울을 떠나 성진(城津)에서 살다가 부친이 만주로 망명하자 부친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국자가(局子街)로 이주하였다. 동년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 있는 민족학교인 명동학교의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후 근방의 마을마다 야학을 설치하여 운영하는 한편, 부흥사경회(復興査經會)도 개최하여 이를 계기로 1919년 명동여학교를 병설하는 등, 간도지역 여성 민족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1918년 가을에는 부친의 지시에 따라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한 이의순은 그곳 신한촌(新韓村) 삼일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당시 이곳의 애국지사 채성하(蔡聖河)의 맏딸 채계복(蔡啓福)과 같이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0월 당시 회원은 50명이었다. 한편 이의순은 미래 독립전쟁에서 활동할 간호부의 양성을 위하여 적십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19년 부친이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자 이의순은 1920년 할아버지 이발과 상해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오영선과 결혼하였다. 그 후 이동휘가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오게 될 무렵 이의순은 상해에 계속 남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8월 11일 이의순은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 김두봉(金斗奉)의 처 조봉원(趙奉元) 등과 함께 기존의 여성단체 조직인 상해한인부인회를 개조하여 보다 급진적인 조직인 상해한인여성동맹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상해지역 여성조직의 분열을 가져오는 점이 있어 김구(金九) 등의 중재로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상해여자청년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때 창립대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역 땅에서 작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오영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 이의순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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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박신일 부부묘
손정도(1881~1931)는 평안남도 강서 사람이다.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0년 선교사로 만주 일대에 파견되어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는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을 결심하였다. 1919년 2월 국내에서 3·1독립운동 시위계획에 참여하였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동년 4월 10일, 11일 양일간에 걸쳐 이동녕 등 동지 30여 명과 같이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를 김신부로(金神父路) 회의장에서 개최하였다. 회의를 통해 그는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4월 13일에는 이동녕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에 당선되었는데, 이 무렵에 서울에서 소집된 국민대회에서는 박은식·신채호 등과 함께 한성정부의 평정관(評定官)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그는 서울에 체재하고 있는 미국인 선교사 노오불에게 부탁하여 국내에서 모금된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전달받기도 하였다. 1920년 1월에는 김 구(金九)·윤현진(尹顯振)·김순애(金淳愛)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그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1921년 3월 3일에는 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송병조(宋秉祚)·장덕로(張德櫓)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 줄 것을 청원하는 진정서를 발송하였다. 동년 8월에는 임정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는 한편, 1922년 2월에는 대한적십자회 총회에서 회장에 당선되어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였다. 동년 8월에는 김 구·여운형 등 동지들과 함께 한국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하고 노공부장(勞工部長)에 뽑혀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였다. 그러나 1923년에 접어들면서 임시정부의 권위가 떨어지고 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의 알력이 심해짐에 따라 국민대표회의가 상해에서 개최하게 되었으며, 그는 이 탁(李鐸)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하여 동년 2월에 재정위원에 선임되었으며, 홍 진(洪震)·이시영(李始榮)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시키는데 적극 노력하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만주 길림으로 돌아가 기독교회를 조직하고 교회를 세워 선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26년 3월 1일에는 이곳에서 양기탁(梁起鐸)·왕삼덕(王三德)·최 일(崔日)·박기백(朴起白) 등 동지들과 기념식을 갖고 앞으로의 독립문제와 실력양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1927년에는 만주지방 교민의 복지를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기 위한 주비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0년 12월 고활신(高豁信)·오인화(吳仁華) 등의 초청으로 길림에서 민족운동문제를 협의하다가, 1931년 2월 19일 동양의원에서 병사하였다. 박신일(미상~1968)은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여 이곳에서 손정도와 결혼했다. 손정도는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해 같은 해 4월 13일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당선됐다. 이후 손정도는 1922년까지 상하이에 머물며 국내 유지들로부터 모은 독립자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임시정부 활동을 주도했다. 박신일은 이때 남편과 함께 상하이에 머물며 남편의 활동을 지원하고, 자신도 여러 모임에 참석하며 사회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1922년 손정도가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지린으로 이동하자 박신일도 함께 거처를 옮겼다. 지린에서 손정도는 교회를 세워 한인들의 생활 안정과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이와 함께 손정도는 자신의 교회를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장소로 제공했다. 이곳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찾아와 손정도와 함께 독립투쟁 방법을 논의했다. 박신일은 남편을 찾아온 독립운동가들의 끼니를 챙겨주는 등 생활을 지원하고, 독립자금의 융통을 도왔다. 1931년 2월 19일 손정도가 병사한 후에도 박신일은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손정도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박신일에게 2020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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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팔균 이수명 부부묘
신팔균(1882~1924)은 1902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正尉)로 활약하다가 동년 7월 군대가 해산되자 낙향하여 후진육성에 진력하는 한편, 1909년에는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가입하여 안희제(安熙濟)·이원식(李元植)·윤세복(尹世復)·서상일(徐相日)·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 남북만주, 북경(北京), 상해(上海), 서백리아(西伯利亞) 등을 전전하며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에는 동삼성(東三省)의 지도자로서 여 준(呂準)·박찬익(朴贊翊)·정 신(鄭信)·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서 일(徐一)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오광선(吳光鮮)·이범석(李範奭)·김경천(金敬天)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2년에는 의군부·광복단·광한단·흥업단 등 대소 8개 단체가 합류하여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에는 그 사령관에 취임하여 양세봉(梁世奉)·심용준(沈龍俊) 등과 함께 무장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 300여명이 통의부사령부 소재지인 왕청문 이도구(旺淸門二道溝)를 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1924년 7월 부하들을 이도구 높은 산에 매복시킨 후 그들과 결전을 행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전사하였다. 그는 별호를 동천(東川)이라 하여 이청천(李靑天)·김경천(金擎天)과 함께 독립군 인재의 삼천(三天)으로 불리던 지휘관이었으나 아깝게 전사 순국하였다. 임수명(1894~1924)은 1912년 서울 모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환자로 위장하고 입원하고 있던 신팔균을 알게되어 1914년 결혼하였다. 그후 북경으로 망명한 부군의 비밀문서 연락 등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1921년 밀명을 띠고 입국한 부군을 따라 만주로 가서 계속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1924년 8월 1일(음) 신팔균이 통의부(統義府)사령관 소재지를 습격하는 중국 마적과 전투 중 전사하자, 귀국하여 서울 종로구 사직동 자택에서 딸과 함께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신팔균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임수명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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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선 정정산 부부묘
오광선(1896~1967)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이청천(李靑天)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대대 중대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이어 서로군정서 별동대장을 거쳐 경비대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920년에는 국민회군의 홍범도(洪範圖), 서로군정서의 이청천(李靑天), 청산리에서 대승한 북로군정서의 김좌진(金佐鎭) 등이 밀산에서 만주 독립군을 통일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명지휘관으로서 조동식(趙東植)등과 함께 중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 연합군은 노령 자유시로 이전하였으나 그해 겨울에 흑하사변에 봉착하는 일대 수난을 겪었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으며,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비하여 한국독립군이 편성되자 그는 의용군중대장으로서 무장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1931년 12월 11일 그는 사령관 이청천을 수행하고 최 악(崔岳)·심만호(沈萬浩) 등과 함께 중국 호로군사령관 정 초(丁超)를 방문하여 한·중 연합군을 구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군과 대적할 것을 약속하고 대일전을 계속하였다. 1933년 7월초에는 수분하 대전자(綏芬河大甸子)에서 일군 대부대를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고 한·중 연합군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그후 동녕현(東寧縣)의 일군을 계속 추격하다가 실패로 끝나자 한·중 연합군은 내분이 일어나 독립군은 자연히 흩어지고 말았다.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광복군 충추장교를 양성할 책임자로서 20여년간 피흘려 항쟁하던 동삼성(東三省)을 뒤로 하고 황학수(黃學秀)·김관오(金官五)·김학규(金學奎) 등과 이청천을 대동하고 산해관(山海關)으로 이동하였다. 1933년에 김 구(金九)가 낙양 군관학교 내에 한국독립군을 위한 특별반을 설치하여 군 간부를 양성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게 되자, 총책임자 이청천을 비롯하여 교성대장(敎成隊長) 이범석(李範錫), 교관으로는 그와 조경한(趙擎韓)·윤경천(尹敬天) 등이 초청되어 광복군 양성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1940년 1월에는 북경(北京)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재차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8·15광복으로 귀국후에는 광복군 국내지대 사령관을 지냈으며, 육군대령으로 임관되었다가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정현숙(이명 정정산, 1900~1992)은 1918년경 서로군정서 별동대장 및 경비대장으로 활동한 부군 오광선을 따라 만주로 망명한 후 1935년까지 만주 길림성 일대에서 독립군의 뒷바라지와 비밀 연락임무 등을 수행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 이후 중국 남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뒷바라지와 함께 1941년 한국혁명여성동맹을 결성하여 맹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44년경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오광선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정현숙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