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신기리 606-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허당선생 묘소 전방 우측에는 아드님 내외분의 묘가 있었다.
우허 정안명공 휘 용한 즈가리아 지묘 곤좌
명도석 선생의 묘소에 가는 길이다.
인터넷에는 진동면에 위치한 진동 삼진의거 기념비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고현 쪽으로 가다가 우산초등학교 못 미쳐서 우회전하여 가면 동네 뒤쪽 작은 저수지가 있는데 바로 그 위라고 되어있다.
인터넷에는 진동면에 위치한 진동 삼진의거 기념비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고현 쪽으로 가다가 우산초등학교 못 미쳐서 우회전하여 가면 동네 뒤쪽 작은 저수지가 있는데 바로 그 위라고 되어있다.
약도에서 표시된 대로 '애국지사 허당 명도석 선생 묘지' 안내판이 서 있었다.
저수지에 오니 묘소가 잘 보였다.
獨立志士 虛堂 廷安明公 諱 道奭 之墓(독립지사 허당 정안명공 휘 도석 지묘)
자 용한 용태, 손 인호 인갑 인진 인교, 서 한태일 박정석 김춘수 김기순
獨立志士 虛堂 明公 道奭 之墓(독립지사 허당 명공 도석 지묘)
허당 선생
을사보호 5조약 체결 이후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 세우지 못하여 1910년 마침내 일제에게 나라를 강탈당하고 그들의 업신여김과 억누름에 겨레는 신음하며 이갈고 치쩔던 기나긴 그 36년 선생께선 나라와 겨레를 위한 열혈단심을 침상에도 풀거나 늦추지 않으셨습니다. 그토록 생애를 오직 애국애족의 일념으로만 항일투쟁에 몸 바치셨습니다.
을사보호 5조약 체결 이후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 세우지 못하여 1910년 마침내 일제에게 나라를 강탈당하고 그들의 업신여김과 억누름에 겨레는 신음하며 이갈고 치쩔던 기나긴 그 36년 선생께선 나라와 겨레를 위한 열혈단심을 침상에도 풀거나 늦추지 않으셨습니다. 그토록 생애를 오직 애국애족의 일념으로만 항일투쟁에 몸 바치셨습니다.
허당 선생
선생께서 남기신 항일투쟁의 발자취는 크고도 뚜렷합니다.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던 마산 어시장에서의 상권투쟁 노동야학교에서의 후진 교육 기미 독립만세 항쟁의 마산에서의 주도 동아일보 창립주주로서 민족 계도사업에 참여 및 만주 땅 안동에서의 거사 모의 사건으로 체포되여 평양에서 치르신 옥고, 밀양 폭탄 사건 거사 자금담당 의열단 경남 거점 조직을 주재 일제에 의한 창씨개명 강요를 끝내 거부, 조선건국동맹 경남 조직책 담당, 마산경찰서 갑종 요시찰인으로서 구금 10여 차례 등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허당 선생
집요한 감시와 위협 다 견디시고 온갖 간교한 회유 모함 다 물리치시고 오직 광복의 그날 나라와 겨레가 질곡의 그 깊은 수렁에서 풀려날 그날이 머지않아 반드시 올 것을 굳게 믿으시고 또한 그런 그 신념을 끝내 버리거나 굽히지 않으신 선생 광복 회천의 이 더 밝고 높푸른 하늘아래 이제 고이 잠드소서
선생께서 남기신 항일투쟁의 발자취는 크고도 뚜렷합니다.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던 마산 어시장에서의 상권투쟁 노동야학교에서의 후진 교육 기미 독립만세 항쟁의 마산에서의 주도 동아일보 창립주주로서 민족 계도사업에 참여 및 만주 땅 안동에서의 거사 모의 사건으로 체포되여 평양에서 치르신 옥고, 밀양 폭탄 사건 거사 자금담당 의열단 경남 거점 조직을 주재 일제에 의한 창씨개명 강요를 끝내 거부, 조선건국동맹 경남 조직책 담당, 마산경찰서 갑종 요시찰인으로서 구금 10여 차례 등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허당 선생
집요한 감시와 위협 다 견디시고 온갖 간교한 회유 모함 다 물리치시고 오직 광복의 그날 나라와 겨레가 질곡의 그 깊은 수렁에서 풀려날 그날이 머지않아 반드시 올 것을 굳게 믿으시고 또한 그런 그 신념을 끝내 버리거나 굽히지 않으신 선생 광복 회천의 이 더 밝고 높푸른 하늘아래 이제 고이 잠드소서
서기 1991년 신미 월 일
김춘수 근찬, 오창근 근서
김춘수 근찬, 오창근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