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억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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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면 후동리 산46-6
탐방로그
남궁억 선생 추모비는 춘천시 남면, 남산면 출신 제자의 후손들이 그의 애국충정과 숭고한 유지를 기리기 위해 강원대학교 지원으로 1997년 8월 15일 건립하였으며, 선생이 후동의숙(後洞義塾)을 설립하고 무궁화 묘목을 재배했던 유적지인 춘천시 남산면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대국민계몽에 앞장서다 독립협회의 정치체제 개혁운동으로 체포되셨다. 석방후 일제가 갑오동학운동 이래 한국을 침략할 목적으로 맺은 노일협정의 부당성을 황성신문 사설에 논박하여 다시 경무청에 구속후 석방되었으나 끝내 사장에서 물러나니 노심초사 구국운동에 심혈을 기울이신 선생의 하해같은 심흉이 얼마나 답답하셨으리오. 1905년 3월 성주목사에 부임 선정하시고 있을때 을사조약의 늑결을 통분하여 사직한 선생은 다음해 양양군수로 부임해 그곳에 현산학교를 세워 구국사상교육에 힘썼으나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한국군대해산으로 사임하셨다. 그후 선생은 대한협회를 창립 회장이 되어 동협회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며 1908년 4월 강원도 지방의 애국계몽단체인 관동학회를 조직 회장으로 교육월보를 발행하시는등 민족사상계몽에 힘쓰셨다. 1910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는 국치민욕의 참담한 지경에 이르매 선생은 민족자주독립의 목표를 새세대 교육에 두고 배화학당 교사와 상동청년학원장을 겸하며 자주독립을 위한 민족사상교육에 혼신의 힘을 쏟으시다가 건강악화로 선영이 있는 홍천군 서면 모곡리로 낙향한다. 다음해 1919년 9월 모곡학교를 설립하여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모본을 전국에 배포하며 애국심을 고취하셨다. 1933년 11월 기독교 독립운동의 비밀결사인 십자가당 조직과 무궁화사건의 발각으로 일경에 체포되니 선생을 비롯한 모곡학교의 교사와 직원 교회목사 언론인 춘천군 남면 남산면의 송완식 어인선 등 17명이 피체되자 잔인무도한 왜구의 모진 고문에도 선생은 제자와 동지들의 연루를 배제하여 그중 12명이 홍천경찰서에서 경성지방법원으로 압송되어 6명이 기소 투옥되었다. 혹독한 고초끝 이듬해 출옥한 선생은 학교를 통한 애국사상교육과 교회를 근거로 한 민족정신계몽과 국권회복을 위한 자주민권 자강운동에 생애를 바치시다가 1939년 4월 5일 모곡리에서 서거하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높은 뜻과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춘천시 남면 남산면 출신 제자의 후손들이 선생과 선생의 애국충정과 숭고한 유지를 기리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 감화되어 강원대학교의 지원으로 이곳에 추모비를 건립하오니
천상에 계신 영령이시여 원하옵건대 선생의 선각된 지혜와 애국정신이 후세에 면면히 계승되어 영원불멸의 민족혼으로 승화되어 나라의 영광과 겨레의 번영을 위한 올바른 국가관과 불굴의 용기를 온 국민이 지닐수 있도록 굽어살펴주옵소서

서기 1997년 8월 15일 광복회 강원도지부 사무국장 권희동 삼가 짓고 강원대학교 교수 황재국 삼가 쓰다
건립주관 광복회 강원도지부
건립비지원 강원대학교 총장 하서현
한서 남궁억 선생과 후동리

이 터는 굴욕적인 일제의 식민학정에 통분하신 남궁억 선생께서 구국의 일념으로 서기 1928년에 후동의숙을 설립하시여 청소년들에게 한국 역사와 애국사상을 교육시키고 무궁화 묘목을 다량재배하여 전국에 보급, 자유독립사상을 고취시키시는 등 선생님의 땀과 혈루가 배어있는 유적지이기에 위대한 유업을 만세에 기리고자 추모비를 세운다.

서기 1997년 10월 3일 강원애국선열추모사업회
愛國志士 翰西 南宮檍 先生 追慕碑(애국지사 한서 남궁억 선생 추모비)
민족의 진운과 국운이 암울한 시대에 오직 구국일념으로 평생을 애국계몽을 위한 민족사상교육에 신명을 바치신 한서 남궁억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어 뜻모아 추모하나이다. 선생께서는 1863년 12월 17일 서울 정동에서 출생하셨다. 청운의 꿈을 품고 학문을 연마하던 소년시절 뜻한 바 있어 영어학교인 동문학을 수료하고 약관을 갓 넘긴 청년기인 1887년 8월 주영독로이불 5개국 겸임 공사 수행관으로 순방길에 올랐으나 청국의 방해로 향항에 머물다 이듬해 귀국하였으니 채류 이년간 약소민족의 뼈저린 아픔을 겪고 소환되었던 심정을 어찌 다 헤아오리까. 1893년 칠곡부사에서 1895년 내직인 내부사목 국장으로 발탁된 선생은 육조앞 도로와 파고다공원을 정비 조성하였으나 아관파천이란 비운과 함께 관직을 사임한 후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한독립협회보 발간의 창립주역으로 참여하셨다. 1898년 9월에는 황성신문창간 사장으로 독립협회 활동을 적극 지원하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