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혁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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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우천리 산10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愛國志士 友山 晉州姜公 信赫 之墓(애국지사 우산 진주강공 신혁 지묘)
사람으로 태어나 인의의 도에 나아가는 것보다 큰 일이 있겠는가. 사생지리와 효제충신과 예의염치가 모두 인의 속의 길일 뿐이다. 공자 이르시길 "호학은 지도에 가깝고 역행은 인에 가까우며 지치는 용에 가깝다"라 하였다. 호학역행은 대현의 노정이며 지치는 승당의 묘문이다. 용이란 수사선도의 근본이 되고, 인의에 나아가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 백이숙제가 필부로써 백세의 사가 되는 것은 그 용이 청하여 정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세에 창녕의 선비 가운데 공문정로를 걸으며 해맑은 정기를 드러낸 의사가 있었으니 그가 우산처사
이다. 처사의 휘는 신혁이고 자는 명중이다. 공은 고종 기묘년에 밀양 청운리에서 쌍둥이 아우로 태어났다. (1879~1966). 형은 퇴산처사이며 학문과 덕행이 높아 내문사가로 불리운다. 약관의 나이에 형제가 함께 소눌선생이 문하에서 수학하여 절사지의를 밝히는 공부에 나아갔다. 이는 위기지학의 본분사이다. 1919년 3월 파리장서 유림독립운동에 조선의 올곧은 선비 137인이 서명하였는데, 우산도 소내 선생과 함께 서명하였다. 같은 해 4월 3일 창녕 장날에 수천 군중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4월 12일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후 해방까지 항일운동을 하였고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실로 애국지사의 삶이었던 것이다.
아! 공은 순박한 자품을 타고나서 성현의 학문을 실천하였으니 언어는 경전에 부합하지 아니하면 하지 않았고, 일이 의리에 합치되지 않으면 행하지 않았다. 공이 만년에 약언하여 "배움이란 성인을 배우는 것이다. 성인의 도는 천부의 성품을 따를 뿐이다" 하였는데 전현의 도에 어긋나지 아니한다.
공의 학통연원은 퇴계 한강 미수 성호 순암 하로 성재 소내로 이어지는 조선유학의 큰 흐름을 받은 것이다. 공이 고연덕곡에 서당을 지어 몸을 숨기고 높은 관과 넓은 띠를 두르고 오로지 구방심에 성성자계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구방심에 뜻이 있었기에 평생토록 저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우가 젊은 날 우산처사를 뵌 바 있다. 공은 손자 홍구가 우의 병소에 와서 시절의 록을 따라 국한혼용의 묘갈명을 청한다. 우가 어찌 글을 잘못한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명을 짓는다.
덕곡의 청향이 하늘을 수놓아 인을 따라 의를 나투도다.
해맑음이 구방심에 거처하나니 뒷사람이 밝혀 짝할진저!
2007년 8월 일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광주 노재찬 근찬
창녕 장준표 근서 종손 병철
창녕공고 안으로 들어가서 학교 뒤쪽에서 보이는 모습. 오른쪽의 계단을 통해서 갔었는데
왼편으로 올가가는 길이 수월한 길이다.
창녕군 고암면 우천리 산 105 덕곡서당 후산 덕곡령 애국지사 강신혁 묘를 찾아가고 있다.
네비게이터에 의지해서 오니 너무 멀리왔다. 저 산 뒤쪽인데... 창녕공고 뒷산이라고 했으니 위성지도를 참고로 찾아가고 있다.
창녕공고 입구쪽에서 애국지사 강신혁 선생 묘소 안내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애국지사 강신혁 선생의 묘
◆ 생존기간 : 1879.9. ~ 1966.10.
◆ 훈격 : 건국포장(2003년)
◆ 공적사항 : 창녕군 고암면 출신으로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작성한 파리장서에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
◆ 묘소소재지 : 고암면 우천리 산 105번지(덕곡서당 뒷산)
창녕공고 학교안으로 들어가서 제일 뒤쪽에 산과 연결되어있는 부근에서 계단 방향으로 위성지도를 보면서 찾아갔다.
우산 강신혁 선생 묘소의 모습이다.
友山 處士 晉州姜公 之墓(우산 처사 진주강공 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