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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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계상리 63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안내문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42-18
독립유공자 간취 김희봉선생은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15세손이며 1875년(을해)생으로 효우독실한 유가의 후예다. 일제강점을 못내 비통해 하던중 1919년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인우이며 훈호인 심제 조긍섭선생을 움직여 독립선언서를 제작 이를 수천부 등사하여 창녕장날을 기해 살포하려다 일경에 발각 체포되여 공모한 조심제선생과 공산 송준필선생등 동지들과 함께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였다. 삭발하려는 간수의 이발기를 빼았아 던지고 수의개복을 재촉하기에 남의 강토를 강점한 너희가 도적이지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호통치는 기품은 우뢰같은 목소리에 초범한 여력과 무서운 안광등이 상대의 근접을 두렵게 하는 무장풍이었다. 갖은 고초를 겪고 8개월후 해옥되었는데 후유증으로 다년간 신고타가 광복의 기쁨과 하청의 금일을 보지못한채 1927년 12월 15일 5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니 많은이의 애도를 더했다. 동족이던 당시 간수는 깊은 감명을 받고 사직 귀가하여 수도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묘는 계팔 백호등 계좌 선영하 송공선생 묘갈찬이며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고 이동박사 찬으로 기념비를 세웠다.
2007년 12월 일에 국가보훈처 마산지청 본안내문은 기념사업회의 도움을 받음
애국지사 간취 김희봉 선생 기념비
군자는 그 명분에 의거하여 거취를 정하노니 명분이란 의리의 실천이다. 유가사상에 있어서는 개인의 사회적 역할을 매우 중시하며 사회의 조화와 화합은 곧 개개인이 발휘하는 역할의 총체적 결과이다. 그러므로 동양국가에 있어서 개인과 사회는 불가분의 유기적 관련을 가진다. 명분과 지위 그리고 사회 조직은 유교사회에 있어서 그 문화의 골간을 이룬다. 군신부자남녀장유 등의 차이에 따른 역할은 각각 다르고 신분과 지위에 맞는 역할 수행은 개인의 행위와 가치 선악을 판단하는 사회적 평가기준이 된다. 여기 김공 희봉은 명분의 삶을 산 선비였으니 자는 찬문이요 간취는 호이다. 서흥김씨이니 고려조찬성사 휘 천녹께서 서흥군으로 피봉되어 얻어진 관향이다. 그 아드님 세구는 판도판서요 그 아드님 봉환은 군기감사이시다. 공민왕께서 남순하실 때 복주자사로 임명되었더니 복주를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키면서 공을 도호부안 집사로 삼았다. 관면이 이어진 중에 조선조에 들어와서 중곤께서 태조때 반제하여 세종까지 4조를 섬기면서 다섯 고을 수령과 두 도 감사를 역임하고 또 사헌부에 두 번 사간원에 네 번 들어가 명성을 떨쳤다. 벼슬이 통정대부예조참의에 올랐다. 참의공이 현풍에 시거하셨고 그 증손이 한훤당 김선생이시다. 시호는 문경이요 공의 15대조이시다. 문경공 둘째아들은 언상이신데 비안군위 두 고을을 역임하신 후 포산에서 창녕에 옮겨살게 되었다. 그 아드님 립은
형조정랑이요 호는 성재이다. 이퇴계 조남명 김하서 제 선생과 도의로 사귀셨다. 그 아드님 수개공과 수회찰방공형제가 퇴도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임란에는 김학봉 선생과 함께 왜적과 싸웠다. 위의 3세4현이 창녕구니서당 4현사에 봉향되셨다. 증조는 석규이시고 조부는 호귀이신데 호는 벽계이다. 아버지는 원동이신데 옛 군자의 의풍이 계셨다. 어머니는 광주노씨이니 학문의 따님이다. 공은 고종 을해 1875년 12월 25일에 계팔향제에서 나셨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영리하셨고 호매한 기상이 있었다. 글을 배우는데 처마에 봄 제비가 날거늘 선생이 시구를 만들라고 하니 「연함춘신어강남」이라 제비가 봄소식을 머금고 강남을 이야기한다 하였다. 어른들 이 그 의사가 좋다고 칭찬하였다. 열두살때 병술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니 집상하는 절도가 성인과 같았다. 또 중부의 상고가 계셨고 이때 가운이 기울면서 공이 가사를 돌보게 되었다. 수신제가를 위하여 소학을 가까이 하고 효경과 서경을 즐겨 읽었다. 1903년 계묘에 국정이 문란하면서 도적떼가 창궐하여 침범을 입었는데 공이 지혜로 위험을 모면하고 평성으로 옮겨 사시니 방여 면우 교우 강제 공이 조부 벽계공과 도의교로 왕래하셨다. 밤에는 공이 모시고 강설을 들으매 학문이 더욱 성취되었다. 또 맏아들 황식을 일두 선생댁으로 장가를 들이면서 개평리에 옮겨사시다가 고향에 돌아오니 강우 선비들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조부의 벽계유집을 정리하였고 평일 머무신 장소에 정자를 지으니 벽계정이다. 또 수계를 닦아 매년 봄에 강회를 가지고 또 족친의 돈목을 기하였다. 1919년 봄 국상이 나자 경향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고등경찰요사에 의하면 동년 3월 18일에 창녕군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 서명활동에 관련되어 곽면우 장회당 조심재 제공과 함께 대구감옥에 구검되어 8개월의 옥고를 치루었고 또 1920년 2월에 창녕독립만세사건을 주동하여 조심재 긍섭에게서 지은 선언서를 인쇄 배포하기 위하여 수천매를 인쇄하여 3월 8일 장날을 기다리다가 발각되어 체포되니 모친에게 말하기를 국가민족을 위해 죽을 명분을 얻었으니 슬퍼하지 마십시요 하니 어머니께서 내 일찍이 과부가 되어 죽지 않은 것은 너 때문이니 반드시 살아오라 하셨다. 공이 대구형무소에서 재수감되자 옥리가 상투를 자르려고 하니 내 목을 자르기 전에는 못 자른다고 호통을 쳐서 모면하였다. 1927년 정묘 12월 15일에 서거하시니 향년 53세이다. 배위는 첨원윤씨 인학의 따님이신데 정숙하신 부덕이 계셨다. 갑술 8월 초 9일 나시고 1926년 3월 21일에 별세하여 성산면 덕곡복호등에 합폄되셨다. 4남2녀를 두었으니 황식 광식 용식 재식
이요 딸은 안영 휘성 인경에게 각각 출가하고 용식은 출계하였다. 그 사람의 일하는 바를 보고 그 사람의 말미암아 가는 바를 보며 그 분의 만족하는 바를 보면서 공이야말로 개인의 사회적 역할이 명분의 의리를 실천한 삶이었다. 1999년 8월 15일 제 54주년 광복절에 정부는 공의 독립운동의 위업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주손 태정씨와 종질 후식 교장이 나에게 와서 기념비문을 청하였다. 명일
부응산 높이 솟고 토평천 맑은 개울 한훤 선생 소학가풍 면면이 이어온 집 군자의 삶은 명분에 의지하였고 나라 위한 비분은 충절이 더욱 빛나도다

2000년 경진 10월 상한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진성 이동영 근찬
종손 태인 경서
경남 창녕군 고암면 계상리 637 계팔마을 애국지사 간취 김희봉 선생 기념비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