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필동 공훈비

4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신안동 848-2
탐방로그
한필동 선생 공훈비는 진주시 신안동 석갑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순국했고, 韓奎東 역시 龜陰義熟의 교장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아아! 朱子의 말씀에 “天運이 순환하여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다” 고 했듯이, 국가민족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친 선생의 위대한 공적이 다시 밝혀진 독립유공자였다. 이에 또 집안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진주 평거동 선산 아래에 국가민족을 위해 헌신한 선생의 위대한 공훈을 새긴 비석을 세워 만인들이 읽고 우러러 보도록 하려고 한다. 돌이 다 다듬어지자 종친회에서 회장단을 불초에게 보내어 비문을 지어줄 것을 요청해 왔다. 불초가 오직 국가민족만을 생각한 숭고한 그 정신과 우뚝한 공훈에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하면서 자료를 검토하여, 독립에 기여한 공적을 모아 정리하고 뒤에 銘을 붙인다.
오천년 역사가진 찬란한 문화민족 왜놈의 식민지된 치욕을 어이할꼬 삼천리 조국강토 총칼로 강압통치 잔악한 채찍아래 동포들 신음소리 선비집 자손으로 일어선 후강선생 혈관속 선비정신 광복에 바쳤나니 선생이 주도했던 삼가장 만세운동 산천을 진동하니 왜놈들 혼비백산 옥고를 치르고서 학교를 세웠다오 국권의 회복에는 인재가 필요키에 왜놈의 탄압으로 학교문 단도나서 만주로 망명하여 이어간 독립운동 황량한 이국땅에 모친과 처자묻고 해방후 귀국해서 쓸쓸히 별세했네 훌륭한 그 자취를 전할이 없기에 나날이 잊혀가니 통탄을 금할소냐 뜻있는 인사들이 다행히 공적찾아 독립의 유공자로 만백성우러르네 우뚝한 독립공훈 모아서 돌에새겨 천추에 전하나니 읽고서 본받기를
진주시 신안동 석갑산 등산로 입구에 있다는 애국지사 후강 한필동 선생의 공훈비를 찾아가고 있다.
애국지사 후강 한필동 선생 공훈비
오늘날 우리나라가 독립된 국가로서 번영의 길을 가고 있는것은 모두가 애국선열들이 한 몸을 바쳐 나라를 되찾아준 덕분이다. 우리나라는 유사이래로 수 많은 외침을 받아왔지만 우리 선열들은 불굴의 호국정신으로 나라를 지켜왔다. 그러다가 1910년에 이르러 잠시 간악한 일본제국주의에게 영토를 빼앗기어 식민지가 되는 통한의 역사가 있게되었다. 일제는 잔인하고도 악랄한 학정을 자행하여 우리 민족마저 말살하여고 드니 우리동포들은 저들의 채찍아래 신음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혈관속에는 정의의 기백이 서려있기에 일제의 국레를 벗어나려고 분연히 일어섰다. 기미만세운동을 위시하여 유림대표의 파리장서발송등 우리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이 전국 곳곳은 물론이고 해외에서 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수 많은 독립운동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조직적으로 거행된 운동이 삼가장터 독립만세운동이었는데 선생은 고종황제 인산에 참것하고 돌아와 여러동지들과 함께 삼가장터로 주민들을 모아 독립운동의 불을 붙였다. 18일 선생이 먼저 단상으로 올라가 조선독립기이라고 쓰인깃발을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높게 선창하자 많은 주민들이 여기에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계속 만세를 삼가시장을 누비고 다니면서 시위를 했다. 면사무소를 불사르고 일본인 주재소와 우편소를 때려부수었다. 시위는 저녁 8시까지 계속되었다. 이에 놀란 일제는 합천경찰서 경찰을 먼저 출동시켰고 또 일제 재향군인과 진주에 주재하는 일제헌병들까지 동원하여 군중들을 겨우 해산시켰다. 선생은 이 만세운동을 진두지휘한 혐의로 그날 체포되어 5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12월 12일에 출옥하였다. 출옥한뒤로는 국가가 독립하기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서 귀평의 파평윤씨 재실에 귀음의숙을 1921년에 설립하고 교장의 책임을 맡았다. 국어 영어 수학 수신체조등의 과목을 가르쳐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주고 시대현실을 직시하는 안목을 갖추게 하였다. 학교가 번성할때는 학생이 150여명에까지 이르렀으나 1925년에 애국가를 불렀다는 이유로 일제는 학교를 폐쇄시켜버렸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점점 더 심해져오자 선생은 만주로 옮겨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이때 아우 욱동 일동과 아들 필우 여우와 조카들도 함께 가족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많은 활약을 했다. 그러나가 모친 함안조씨는 봉천서탑에서 별세했고 부인 성산이씨와 장남 필우는 1943년 만주 삼강성 나북현에에서 별세했다. 해방후 선생은 조국으로 돌아와 진주 옥봉동에서 거주하다가 1952년 6.25전쟁중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진주시 이현동 선산에 있다. 독립유공자가 된뒤 국립묘지 현충원으로 이장하려고 묘를 열어보니 유골은 보이지않고 묘지석만있어 이장을 하지 못했다. 선생은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위해 한몸을 돌보지 않고 노력했지만 주변에 그 공적을 전하는 자제들이나 동지가 남아있지않아 훌륭한 자취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점점 사람들의 관심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근년에와서 경남도의회 수석 전문의원 조찬용씨등이 다년간의 노력을 들여 선생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밝혀 마침내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2009년 8월 15일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또 2005년 삼가장터 삼일만세운동기념탑에 그 공훈이 새겨져있다. 그리고 행방을 몰랐던 손자 기표와 증손자 현호 현국도 찾게 되었다. 선생이 독립운동에 헌신한것은 살신성인하고 사생취의하는 선비정신에 기인한것이다.
선비정신에 기인한 것이다. 조선 중기 대학자 남명선생은 옛날 삼가현 사람으로 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그 제자들이 壬辰倭亂 때 義兵을 일으켜 나라를 구제했다. 덕촌은 옛날 삼가현에 속한 지역으로 남명이 끼친 경의사상이 짙게 배어 있는 곳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자라서는 조선 말기의 대학자 后山 許愈先生의 문하에 나아가서 공부하여 氣節을 숭상하는 남명정신을 배웠다. 후산선생은 南冥과 退溪 두 大先生의 학문을 아울러 익히신 분으로 유림에서 이름이 높았다.
선생은 합천에서 세거해온 청주한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1888년 1월 26일이었다. 자는 悅卿이다. 淸州韓氏는 高麗 三重大匡 威襄公 諱蘭을 족보상의 시조로 삼는다. 이후 자손이 번성하고 현달한 인물과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온 나라에 두루 알려진 명문이 되었다. 高麗末 判厚德府事 文敬公 柳巷 諱脩는 名節로 이름이 났다. 그 아들 領議政 西原府院君 文簡公 諱尙敬이 開國功臣으로 朝鮮初期에 이름이 크게 알려졌다. 그 손자 領議政 文靖公 諱 繼禧는 공신으로 西原君에 봉해졌다. 그 손자 遯庵 諱 承利는 副司直을 지내다가 燕山君의 亂政을 만나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晋州에서 숨어 지냈다. 江右地域의 韓氏들은 대부분이 遯庵公의 후손들이다. 그 증손 釣隱 諱夢參은 學德이 있어 王子師傅로 추천되었다. 그 증손 諱範錫은 武科에 급제하여 副摠管 七道兵馬節度使를 지내는 등 능력 있는 將軍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 5대손 諱鎭行은 嘉善大夫 參領을 지냈는데, 선생의 조부다. 대대로 仕宦과 학문이 있는 집안으로 경상우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부친은 諱翊源인데, 역시 후산선생의 제자이다. 모친 함안조씨는 용하의 따님이다.
선생 뿐만 아니라 집안 사람 가운데 한치문이 이미 1908년 정미의병전쟁 때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大幷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