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신안동 848-2
- 탐방로그
- 한치문 선생 사적비는 경남 진주시 신안동 석갑산 등산로 청주한씨 병사공파재실 앞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건국훈장 애국장 독립유공자 한공치문 사적비
건국훈장 애국장 독립유공자 한공치문 사적비
우리가 국가를 잃고 온 민족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을 때, 오직 하나 뿐인 자기 목숨을 바쳐 국가를 위해 싸우는 일은 위대한 일이다.한 사람의 독립운동가가 나오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한 집안에서 여러 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온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것은 그 모두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런 선열들의 공덕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천, 하동, 합천군에 세거하던 청주한씨 병사공파 가문은 선비의 가문으로, 평화시에는 많은 학자 관료들을 배출하였고, 나라가 어려울 때는 여러 명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여 나라를 구제해 냈으니, 선비정신을 올바르게 실천해 온 모범적인 가문이라 할 수 있다. 공은 이 집안이 배출한 인물 가운데 한 분이다. 공은 1852년에 태어났다. 족보상의 휘는 홍학이고 초휘는 치문이다. 한씨는 본관을 청주로 하는데, 고려 삼중대광 위양공 휘 란을 족보상의 시조로 삼는다. 대대로 저명한 인물과 큰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름난 가문이 되었다. 고려말 판후덕부사문경공 류항 휘수은 문학과 명절로 이름이 났다. 그 아들 영의정 서원부원군 개국공신 문절공 휘 상경은 조선초기 명경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 손자 영의정 문정공 휘 계희는 공신으로 서원군에 봉해졌다. 그 손자 돈암 휘 승리는 부사직을 지내다가 연산군의 난정을 만나 영달을 다 버리고 진천로 내려와 숨어 살았다. 경상도 일원의 한씨들은 대부분이 돈암공의 후손들이다. 돈암공 증손 조은 휘 몽삼은 학덕이 있어 왕자사부로 추천되었다. 그 증손 휘 범석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총관과 5도의 병마사를 지냈는데, 장수로서나 행정장관으로서의 능력이 출중한 인물로 이름이 높았다. 그 증손자 휘 계인은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는데, 곧 공의 부친이다. 모친은 숙부인 전주이씨로 인득의 따님이다. 임진왜란
이후 이웃 일본이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우리보다 일찍 받아들여 과학기술을 응용하여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국방력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를 이용하여 이웃 우리나라를 침략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다 왔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맺은 것은, 곧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첫 공작이었다. 1895년 우리의 왕비를 시해하는 을미왜변이 있어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통치를 시작하였고, 급기야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이유로 고종황제를 강제퇴위시키고 우리의 군대를 해산하였다. 공은 의분을 이기지 못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여 사천, 산청,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다. 1908년 전반기에 이차봉, 이소봉, 김화숙, 김찬숙, 김우옥, 김응오, 장명언 등 삼가 출신 동지들과 함께 삼가, 사천, 단성, 산청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총책을 맡아 큰 공을 세웠으며, 일본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몇 차례의 격전을 벌였다. 특히 1908년 4월 24일 삼가군 대평면에서 신화 24원, 28일 사천군에서 신화 17원, 엽전 8관을 모집하고, 5월 1일 합천군 모 영수원 집에서 엽전 1관 3백문, 6일 삼가군 문송면에서 엽전 2관을 모집하였다. 또 산청의 일본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소각하고, 무기 등 관급품 일체를 노획하는 등 전과를 크게 올렸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삼가 순사주재소의 일본 경찰에 1908년 5월 12일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은 검거하지 못한 의병을 체포하고자 하여 18일 이미 체포된 공과 동지들을 끌고 삼가군 고현면으로 출동하였다. 이때 의병장인 공 등을 구출하려는 의병들이 일본 군경을 습격하여 그 틈에 탈출시키려고 했으나 공은 동지들과 함께 전원 피살되고 말았다. 공의 시신은 찾지 못하여 묘소도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1949년 삼가면 사무소가 좌익들에 의해서 불타는 바람에 상세한 신원도 알 수 없고, 족보에도 이름만 올라 잇고 그 밖에는 아무런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일본의 「폭도에 관한 편책」이라는 문서에 3건의 기록이 있어 독립운동 공적이 증명되어 2004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공은 세상을 떠날 때 자손이 있었을 것이나,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공의 위대한 공적이 인멸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청주한씨 공사공 종중의 임원진과 여러 종원들과 협의하여 공의 사적비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나를 방문하여 비문을 지어줄 것을 요청해 왔다. 내가 그 정성에 감동하여 크게 사양하지 않고 관계 자료를 모아 이렇게 서술하고 끝에 명을 붙인다. 국가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키려고 노력한 공의 위대한 공적에 비해, 생애에 관한 자료가 너무 없는 것은 정말 탄식을 금치 못하게 할 따름이다.
명문가 청주한씨, 팔도에 알려졌네,
조선조 명공거경, 역사에 찬란하네.
둔암공 락남으로, 경상도 자리했네,
병사공 성예높아, 문성을 유지했네.
평화시 학자관료, 대대로 배출됐고,
국가가 위급할때, 의병에 앞장섰네.
왜놈들 침략앞에, 한목숨 걸었나니,
우리공 앞장서서, 왜놈을 막았다네.
전공을 세우다가, 불의에 체포당해,
탈출을 시도타가, 불행히 사살됐네.
훌륭한 그자취가, 장기간 묻혔다가,
자료가 발굴되어, 애국장 받았다네.
자손도 흩어지고, 묘소도 없던것을,
종중의 일가들이, 사적비 건립하네.
묻혔던 그공적이, 마침내 나타났네,
천추에 전하리라! 구국의 큰정신이.
병신(2016)년 곡우절에
문학박사 경상대학교 교수 허권수 근찬
청주한씨 문정공파 병사공 종중 후손 일동 근수
조선조 명공거경, 역사에 찬란하네.
둔암공 락남으로, 경상도 자리했네,
병사공 성예높아, 문성을 유지했네.
평화시 학자관료, 대대로 배출됐고,
국가가 위급할때, 의병에 앞장섰네.
왜놈들 침략앞에, 한목숨 걸었나니,
우리공 앞장서서, 왜놈을 막았다네.
전공을 세우다가, 불의에 체포당해,
탈출을 시도타가, 불행히 사살됐네.
훌륭한 그자취가, 장기간 묻혔다가,
자료가 발굴되어, 애국장 받았다네.
자손도 흩어지고, 묘소도 없던것을,
종중의 일가들이, 사적비 건립하네.
묻혔던 그공적이, 마침내 나타났네,
천추에 전하리라! 구국의 큰정신이.
병신(2016)년 곡우절에
문학박사 경상대학교 교수 허권수 근찬
청주한씨 문정공파 병사공 종중 후손 일동 근수
경남 진주시 신안동 848-2 석갑산 등산로 청주한씨 병사공파재실 앞 독립유공자 한치문 선생 사적비를 찾아왔다.
왼편이 한치문 선생 사적비다.
가운데는 애국지사 한필동 선생 공훈비이다.
가운데는 애국지사 한필동 선생 공훈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