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33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崇義門(숭의문)
德谷書堂(덕곡서당)
덕곡서당기
서당은 진주 서쪽 오십리 수곡면 중앙에 있으니 고 대한국 처사 회봉 하선생이 문도를 모아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처음 선생께서는 구강정사라는 곳에 있었지만 너무 좁아 많은 생도를 수용할 수 없었다, 제생이 이를 염려하여 선생의 맏아들 영윤으로 더불어 의견을 모아 이곳에 이건하였다. 규모는 전일에 비해 조금 넓어지고 수죽이 울창하며 시내가 그윽하여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선생이 들어와 거처하며 즐기더니 그 지명을 따서 덕곡 서당이라 이름하였다. 선생은 서구의 물결이 밀려오고 유학의 운수가 장차 망하려는 시기에 태어나 한 몸으로 대임을 짊어지고 어지러운 소용돌이 가운데서 항쟁하였으니 그 마음의 괴로움과 형세의 고단함이 어떠하였겠는가! 선생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천하의 일이란 자초하지 않았는데도 이르는 것은 있지 않다. 오도의 쇠퇴는 허세가 번창하여 실지가 병들고 혼란이 일어나 정로가 막혔기 때문이니 이 어찌 한갓되이 남만 탓하고 스스로 반성할 바를 생각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일생의 힘을 다해 백가에 통달하고 천고를 절충하여 논의를 저술하고 정당함을 밝혔으니 이 모두 명리를 정립하고 인심을 밝게 한 것이 아님이 없다. 심위자모설, 원애, 원양, 국성론 등 제편은 그 극치를 이루고 취지를 다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서당에 거처한 지 십 수 년 동안 하루도 전념하여 힘쓰지 않음이 없었다. 온 세상이 지목하기를 우활하고 쓸데없다 하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제 선생은 세상을 떠나고 서당 또한 폐쇄된 지 십 수 년이다. 제생이 선생의 유서를 이미 간행하고 서당에 유독 기문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찾아와 나에게 부탁하였다. 내 어리석어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으나 다만 생각건대 평소 선생의 연고로 외람되이 선생의 사랑을 입은 것이 적지 않으니 정의를 헤아려 보건대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이때 나에게 이야기하는 객이 있어 말하기를,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천명이 변치 않으며 도 또한 변치 않는다 하고, 또 이르기를 천도는 순환하기를 좋아하여 대저 막힘이 극에 달하면 통하게 되고 혼란이 지극하면 다스림이 회복된다 하였으니 맹자 이하로 이러한 일은 명백히 징험 할 수 있다. 지금의 운수는 그 원근과 지속으로 비록 미리 점칠 수는 없지만 참으로 인물이 나타나 성현의 원제를 구하고자 한다면 선생을 말미암지 아니하고 누구로부터 하겠는가! 내 이로써 선생의 유서가 반드시 후세에 크게 전해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당은 하나의 외물 일뿐이니 그 존폐는 마땅히 선생의 도에 크게 연관이 없을 듯하다. 하였다. 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 일찍이 북쪽으로 유람하면서 수사를 보았고 돌아와서 덕산으로 달려가 산천재에 올랐으며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암서헌을 방문했고 또 이동, 분천서당에서 일을 보았다.
대개 그 사람을 추모하는 이는 국그릇이나 담장에서도 그 사람을 보고 산천초목에도 정채를 입었는지 물어본다. 하물며 생전에 기거하며 글을 짓고 도를 논하던 자리로 범현 금서. 장구 등의 기물이 의연히 남아 있어 문을 들고 마루에 오르면 모습이 보이듯 음성이 들리듯 하여 우러러 상상하며 감격함이 적지 않는 것에 있어서랴! 이제 서당은 제생에게 있어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이미 서당에 나아가 해마다 석 채례를 행한다.
또 특별히 문자를 구하여 도리 사이에 걸어두고 오로지 지난날을 본받는다면 후세에 힘을 합쳐 끊임없이 개수하는 성대함이 장차 유서로 더불어 시종을 함께 함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객이 수긍하고 물러가기에 드디어 이를 적어 제생에게 고한다.
문하생 이현덕 지음
德谷書堂記
堂在州西五十里德谷山中故韓處士晦峯河先生聚徒講學之所也始先生有所築龜岡精舍者僻隘不能容諸生之衆諸生病其然也.與先生胤子泳允合謀移建于此制度比前稍宏敞而樹竹成行澗阿窈窕境趣甚佳先生旣入處而樂之則因其地名名撲之曰德谷書堂先生生於西潮東擈儒運將喪之日思以隻肩擔負護持抗爭於狂瀾倒波之中其心之苦而其勢之孤危爲何如矣先生嘗以爲天下事未有不自致而至者吾道之衰由於虛繁張而實地病奔競作而正路廢其來非一朝夕之故是豈可以徒尤人而不思所以自反哉於是盡一生之力疏瀹百家折表千古論擬述著發揮正當無非所以定名理淑人心者 而至如心爲字母說及原愛原讓國性論諸篇抑可謂會其極而盡其趣矣故其居書堂十數年無日不孜孜矻矻擧世目之爲迀闊而無當而不之顧也今先生殁而書堂鎖廢無人 又十數年矣諸生以先生遺書己刊書堂不可獨無記來以屬余余愚陋不敢當是役第念平日以先人之故猥蒙先生眷愛自不尟揆以誼分其何敢辭方是時客有語於余者曰古人云天不變道亦不變又云天道好還夫否極而泰剝極而復自孟子以下其事昭昭然可徵也今玆之運其遠近久速踓不可預卜苟有人焉欲求聖賢之遺緒其不於先生乎自而將誰自哉吾以是知先生之遺書必且大傳於世無疑然至書堂一外物耳其存廢宜若無大關於先生之道者曰是不然余嘗北遊而觀於洙泗矣歸則走德山而登山天之齋溯洛江而訪巖棲之軒己又相役於尼東奔川之間盖慕其人者見其人於羹牆而山川草木 皆問其精彩所被況於平日所藏修著書論道之地凡硯琴書杖履什物依然故在入其門升其堂容儀如接謦欬如聞瞻想感發之有不可少者乎今書堂之於諸生亦猶是己故旣巳就書堂歲行釋菜之儀又必別求文字栖之楣間要以取徵來古可見其他日幷力嗣修之盛將與遺書而相終始矣客唯唯退遂幷書之以復於諸生云
歲辛丑孟春日門下生李鉉德記
서당은 진주 서쪽 오십리 수곡면 중앙에 있으니 고 대한국 처사 회봉 하선생이 문도를 모아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처음 선생께서는 구강정사라는 곳에 있었지만 너무 좁아 많은 생도를 수용할 수 없었다, 제생이 이를 염려하여 선생의 맏아들 영윤으로 더불어 의견을 모아 이곳에 이건하였다. 규모는 전일에 비해 조금 넓어지고 수죽이 울창하며 시내가 그윽하여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선생이 들어와 거처하며 즐기더니 그 지명을 따서 덕곡 서당이라 이름하였다. 선생은 서구의 물결이 밀려오고 유학의 운수가 장차 망하려는 시기에 태어나 한 몸으로 대임을 짊어지고 어지러운 소용돌이 가운데서 항쟁하였으니 그 마음의 괴로움과 형세의 고단함이 어떠하였겠는가! 선생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천하의 일이란 자초하지 않았는데도 이르는 것은 있지 않다. 오도의 쇠퇴는 허세가 번창하여 실지가 병들고 혼란이 일어나 정로가 막혔기 때문이니 이 어찌 한갓되이 남만 탓하고 스스로 반성할 바를 생각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일생의 힘을 다해 백가에 통달하고 천고를 절충하여 논의를 저술하고 정당함을 밝혔으니 이 모두 명리를 정립하고 인심을 밝게 한 것이 아님이 없다. 심위자모설, 원애, 원양, 국성론 등 제편은 그 극치를 이루고 취지를 다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서당에 거처한 지 십 수 년 동안 하루도 전념하여 힘쓰지 않음이 없었다. 온 세상이 지목하기를 우활하고 쓸데없다 하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제 선생은 세상을 떠나고 서당 또한 폐쇄된 지 십 수 년이다. 제생이 선생의 유서를 이미 간행하고 서당에 유독 기문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찾아와 나에게 부탁하였다. 내 어리석어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으나 다만 생각건대 평소 선생의 연고로 외람되이 선생의 사랑을 입은 것이 적지 않으니 정의를 헤아려 보건대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이때 나에게 이야기하는 객이 있어 말하기를,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천명이 변치 않으며 도 또한 변치 않는다 하고, 또 이르기를 천도는 순환하기를 좋아하여 대저 막힘이 극에 달하면 통하게 되고 혼란이 지극하면 다스림이 회복된다 하였으니 맹자 이하로 이러한 일은 명백히 징험 할 수 있다. 지금의 운수는 그 원근과 지속으로 비록 미리 점칠 수는 없지만 참으로 인물이 나타나 성현의 원제를 구하고자 한다면 선생을 말미암지 아니하고 누구로부터 하겠는가! 내 이로써 선생의 유서가 반드시 후세에 크게 전해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당은 하나의 외물 일뿐이니 그 존폐는 마땅히 선생의 도에 크게 연관이 없을 듯하다. 하였다. 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 일찍이 북쪽으로 유람하면서 수사를 보았고 돌아와서 덕산으로 달려가 산천재에 올랐으며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암서헌을 방문했고 또 이동, 분천서당에서 일을 보았다.
대개 그 사람을 추모하는 이는 국그릇이나 담장에서도 그 사람을 보고 산천초목에도 정채를 입었는지 물어본다. 하물며 생전에 기거하며 글을 짓고 도를 논하던 자리로 범현 금서. 장구 등의 기물이 의연히 남아 있어 문을 들고 마루에 오르면 모습이 보이듯 음성이 들리듯 하여 우러러 상상하며 감격함이 적지 않는 것에 있어서랴! 이제 서당은 제생에게 있어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이미 서당에 나아가 해마다 석 채례를 행한다.
또 특별히 문자를 구하여 도리 사이에 걸어두고 오로지 지난날을 본받는다면 후세에 힘을 합쳐 끊임없이 개수하는 성대함이 장차 유서로 더불어 시종을 함께 함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객이 수긍하고 물러가기에 드디어 이를 적어 제생에게 고한다.
문하생 이현덕 지음
德谷書堂記
堂在州西五十里德谷山中故韓處士晦峯河先生聚徒講學之所也始先生有所築龜岡精舍者僻隘不能容諸生之衆諸生病其然也.與先生胤子泳允合謀移建于此制度比前稍宏敞而樹竹成行澗阿窈窕境趣甚佳先生旣入處而樂之則因其地名名撲之曰德谷書堂先生生於西潮東擈儒運將喪之日思以隻肩擔負護持抗爭於狂瀾倒波之中其心之苦而其勢之孤危爲何如矣先生嘗以爲天下事未有不自致而至者吾道之衰由於虛繁張而實地病奔競作而正路廢其來非一朝夕之故是豈可以徒尤人而不思所以自反哉於是盡一生之力疏瀹百家折表千古論擬述著發揮正當無非所以定名理淑人心者 而至如心爲字母說及原愛原讓國性論諸篇抑可謂會其極而盡其趣矣故其居書堂十數年無日不孜孜矻矻擧世目之爲迀闊而無當而不之顧也今先生殁而書堂鎖廢無人 又十數年矣諸生以先生遺書己刊書堂不可獨無記來以屬余余愚陋不敢當是役第念平日以先人之故猥蒙先生眷愛自不尟揆以誼分其何敢辭方是時客有語於余者曰古人云天不變道亦不變又云天道好還夫否極而泰剝極而復自孟子以下其事昭昭然可徵也今玆之運其遠近久速踓不可預卜苟有人焉欲求聖賢之遺緒其不於先生乎自而將誰自哉吾以是知先生之遺書必且大傳於世無疑然至書堂一外物耳其存廢宜若無大關於先生之道者曰是不然余嘗北遊而觀於洙泗矣歸則走德山而登山天之齋溯洛江而訪巖棲之軒己又相役於尼東奔川之間盖慕其人者見其人於羹牆而山川草木 皆問其精彩所被況於平日所藏修著書論道之地凡硯琴書杖履什物依然故在入其門升其堂容儀如接謦欬如聞瞻想感發之有不可少者乎今書堂之於諸生亦猶是己故旣巳就書堂歲行釋菜之儀又必別求文字栖之楣間要以取徵來古可見其他日幷力嗣修之盛將與遺書而相終始矣客唯唯退遂幷書之以復於諸生云
歲辛丑孟春日門下生李鉉德記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330 덕곡마을 애국지사 하겸진 추모 덕곡서당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