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권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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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벌당리 산80-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愛國志士 金公 諱 潤權 之墓(애국지사 김공 휘 윤권 지묘)
애국지사 김공 묘표
진북 미천 벌당리 후산 유좌원의 사척봉은 근고 지사 김공 휘 윤권 자 치홍의 묘소이다. 공은 고종 13년 병자에 이곳에서 태어나 향년 69로 광복 전년 갑신에 몰하였으니 거금 52년이다. 병자 동에 공의 손 정규가 봉산서실로 나를 찾아와 묘문을 구하므로 내이르기를 애국지사를 천양하는 일은 후인의 책임이다 하고 문득 원필하여 쓰기를 공은 천성이 영민하여 일찍이 불의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초장하여서는 학업에 열중하여 사서를 섭렵하였고 성립하여서는 충신과 독경으로 사린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34세때 문득 종
사가 멸은 하게 되자 치솟는 울분을 억제할 길 없어 숙야로 비분강개하면서 후도에게 항일정신을 고취함에 여념이 없더니 마침내 동지 노기주 등 12인으로 더불어 독립의우회를 결성하고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미년 3월 1일 만세의 함성이 메아리칠때 18일에는 2만 군중이 진주에서 노도처럼 봉기하니 의우회는 이 때를 놓칠세라 태극기를 제작하고 군중을 동원하여 드디어 700 대중이 동매리에 운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규호하니 그 함성 순식간에 충천하여 지축을 흔들었다. 의거의 행렬은 밤을 잊은 채 치성하니 이에 놀란 왜헌은 총검으로 군중을 강압하고 거사의 주동자인 공을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으나 공은 질곡을 무릅쓰고 일발의 동요없이 최후까지 항쟁하였다. 마침내 6월에 미쳐 진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복역 중의 옥고는 그 진상을 형언하기 어려우며 석방 후에도 5년간을 와상신음하였다. 여생을 후도에게 광복정신 전수에 심혈을 쏟았으니 그 투철한 민족혼을 아는 이 몇이던가. 그러나 공든 탑은 헛되지 않아 광복 48년 계유에는 민국정부에서 대통령표창을 추서함으로 인하여 공의 애국단충은 그 빛을 내외에 발양하게 되었다. 어찌 장하지 아니한가. 공의 관조는 경순왕 8세손인 고려 인종조의 문렬공 휘 시흥이니 묘청난에 수공하여 위사공신을 배하였고 팔전하여 충의공 백촌 선생 휘 문기는 세조 2년 병자에 시임 판서로써 장릉 복위를 도모하려다 순절하여 정조조에 이르러 의정부 좌찬 홍문관 대제학을 증하고 시하니 공의 15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치숙이요. 조의 휘는 금성이며 고의 휘는 용후요 비는 밀양박씨며 배 안동권씨의 묘는 대당리 마전곡 건좌에 있고 배 창녕성씨의 묘는 마전곡 해좌원이며 4남은 형광 형
국 형채 형두이고 여서는 강주행 강억수 박민규 강만근 문을주 윤순대 공영창이며 손남 인규 의규 백방출이요. 정규 쌍규 만규 흥규는 중방출이며 성규 운규 홍규 우규는 숙방출이요. 상규 해규 원규는 계방출이며 여는 번불록한다.
광복 51년 병자 납월 하한 삭녕 최인찬 찬
외손 진주 강병포 근서
진주시 미천면 벌당리 후산 유좌원 사척봉(마전곡) 애국지사 김윤권의 묘를 찾아가고 있다.
벌당리 정성마을 뒤편 언덕에는 김윤권 선생의 공적비도 있다고 되어있다.
마을회관 뒤쪽에 보이는 언덕 위로 뭔가가 보였다.
저 낮은 산에 큰 비석이 보였다. 올라가보기로..
묘비에서 애국지사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이 곳의 GPS상의 주소는, 진주시 미천면 벌당리 산 80-1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