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익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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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 283-1
탐방로그
김용익 공적비는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 자웅석(운돌)앞에 위치해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후세의 귀감이 되는 항일투사로 기억되리라. 선생의 배위는 의령 남응칠의 따님이니 성품이 효성스럽고 부덕이 있었다. 장남은 진권이요. 둘째는 재권이요 셋째는 상권이며 넷째는 성권이다. 진권의 장남은 형준(일명 쌍수)이며 둘째는 형윤이고 재권의 장남은 형기요, 둘째는 형문이며 셋째는 형진이고 넷째는 형수이다. 상권의 장남은 형국이요. 둘째는 형판이다. 성권의 장남은 형만이요. 둘째는 형득이다. 증손자는 계규 정규 용규 경규 동규 민규 봉규 범규 성규 인규 형규 태현 은규 현규 진규 남규 등이다.
서기 2010년 경인 4월 일 호석 추경화 근찬
애국지사 김용익 선생 공적비 건립추진위원 명석면민 일동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 산 278 자웅석(운돌)앞에 있는 김용익 선생 공적비를 찾아왔다
하지만 이 번지로는 네비게이터에 입력이 안된다. GPS상으로는 283-1이다.
항일투사 김용익(金溶益) 선생 공적비
위치: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 산 278(명석각)
이 비석은 항일투사 호산(湖山) 김용익(1886-1970년) 선생을 기리는 공적비로 선생은 진주 3.1운동 때 종소리에 따라 군민들은 지휘하고 시내 남문 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셨다.
일경의 경계를 벗어나 서울에서 광복단에 가입해 임시정부와 관련된 문서와 권총을 입수해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셨고 일본 순사와 총격전을 전개하시다 체포되어 징역 6년형이 언도된 내용이 동아일보 1921년 10월부터 1922년 2월까지 보도되어 확실하다 정부는 김용익 선생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공적을 선양하기 위해 2009년 8월 15일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13년 6월 일
충.효.예. 실천운동본부 진주. 산청지회, 진주문화원
抗日愛國志士 湖山 金溶益 先生 功績碑(항일애국지사 호산 김용익 선생 공적비)
선생의 휘는 용익 자는 석홍 호는 호산이며 김녕인이다. 중시조는 경순왕이며 관조는 위사공신 김녕군 휘 시흥이다. 조선 단종충신 이조판서이신 충의공 백촌선생의 15세손이다. 증조 휘 일현이며 조부 휘 치환이다. 황고는 휘 사성이며 비는 진주정씨 용대의 따님인데 부덕이 있어 칭송을 받았다. 선생은 서기 1886(병술)년 2월 14일 진주시 명석면 남성리에서 출생했으니 소년시부터 비분강개한 뜻이 있어 충신열사를 추모하였고 기질이 강직하며 영명하였다. 천자문과 노당의 명심보감을 배워 충효정신을 배우고 사서삼경을 습득하여 신동이라 칭송을 받았으며 효성이 지극하므로 이 지역에 널리 알려져 있다.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 33세 청년으로서 고국광복의 일념으로 김재화 박진환 등과 더불어 명석면민 수백명
을 영솔하여 진주 남문내에 이르러 종소리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군중을 지도하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계를 벗어나 서울로 달려가 광복단에 입단하였고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된 문서와 권총을 입수해 귀향하였고 1920년 후반부터 강기수 홍종석 등과 함께 산청군 단성면과 도산면 일원에서 임시정부와 태평양회의를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여 전달하였다. 1921년 9월 28일에는 산청군 생비량면 가계리에서 일본순사와 서로 총격전을 전개하여 중상을 입히는 등 맹활약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22년 1월에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징역 6년형이 언도되었고 1924년 4월 감형처분을 받아 4년 8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선생의 자손들이 1982년부터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명석면사무소에서 감형통지서와 수형인명부를 찾았을 뿐 구체적 활동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수년전 소생을 찾아와 명예회복의 방법을 호소하므로 서울 부산 등지로 왕래하면서 드디어 동아일보 1921년 10월 13일자를 찾으니 산청지방에 독립단 2명 각처에서 대활동이란 제목이었고 또 동아일보 1922년 2월 14일자를 찾으니 산청에 순사저격한 김용익 검사국 송치라는 제목 이었다. 이 같은 자료를 정리해 포상신청한 결과 마침내 2009년 8월 15이 광복절에 항일독립운동의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의 위대한 업적을 후세에 전하고자 명석면 노인회와 이장단이 협의하여 명석면민의 이름으로 공적을 기리고 영구히 선양하고자 정성을 모아 깊이 새기게 되었다. 선생은 1970년 경술 3월 10일 향리에서 춘추 85세에 별세하셨지만 아름답고 훌륭한 위훈이 태양같이 빛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