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82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손자 용기 공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으며, 묘지는 현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대전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할 예정이다. 선생은 개인의 국가적 사회적 역활을 중시하는 유가사상을 몸소 실천하여 강직한 애국의 삶을 살아온 선비로 그 숭고한 항일독립운동정신을 후세에 영원히 기리며 손자 용기 공의 생가 복원 기념과 더불어 우리 후손들의 뜻을 모아 이 기념비를 세운다. 아래의 한시는 선생의 서거 소식을 옥중에서 전해들은 심산 김창숙 선생이 통절한 아픔을 표현한 애도의 시다.
嶺表有一士(영표유일사) 淸狂白笠客(청광백립객) 有粟百餘種(유속백여종) 有酒數三石(유주수삼석) 散粟與貧兒(산속여빈아) 被酒歌月夕(피주가월석) 歌破伋大哭(가파급대곡) 宇宙皆陣跡(우주개진적)
2002년 11월 봉건 증손 현성 현태 현회 글 지음
嶺表有一士(영표유일사) 淸狂白笠客(청광백립객) 有粟百餘種(유속백여종) 有酒數三石(유주수삼석) 散粟與貧兒(산속여빈아) 被酒歌月夕(피주가월석) 歌破伋大哭(가파급대곡) 宇宙皆陣跡(우주개진적)
2002년 11월 봉건 증손 현성 현태 현회 글 지음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822 애국지사 일암 하장환 선생 기념비를 찾아왔다.
애국지사 일암 하장환 선생 기념비
관리번호 : 43-1-15 / 관리자 : 문중대표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이 기념비는 일암 하장환(河章煥:2002.8.25. 대통령표창)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2년 11월에 건립되었다.
1926년 1월 김창숙(金昌淑)과 함께 군자금모집 활동을 하였다. 북경(北京)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이 귀국했던 목적은,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 아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만주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구를 지니고 있었다. 이떄 필요한 군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하장환은 곽종석의 문집(文集) 출판을 위해 서울에 머물려 있던 중 김창숙을 만나 그와 같은 임무를 맡았다. 그리하여 경남 일대의 유림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활동 중 하장환은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어 9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관리번호 : 43-1-15 / 관리자 : 문중대표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이 기념비는 일암 하장환(河章煥:2002.8.25. 대통령표창)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2년 11월에 건립되었다.
1926년 1월 김창숙(金昌淑)과 함께 군자금모집 활동을 하였다. 북경(北京)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이 귀국했던 목적은,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 아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만주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구를 지니고 있었다. 이떄 필요한 군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하장환은 곽종석의 문집(文集) 출판을 위해 서울에 머물려 있던 중 김창숙을 만나 그와 같은 임무를 맡았다. 그리하여 경남 일대의 유림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활동 중 하장환은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어 9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애국지사 일암 하장환 선생 기념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43-1-15호 / 소재지 : 경남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822
애국지사 일암 하장환 선생(1874-1928)은 유림의 대표적 항일독립운동인 제2차 유림단사건에 김창숙, 김황, 김화식과 함께 연류되어 옥고를 치른 후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출옥 1년만인 1928년에 서거하였다. 강직한 애국의 삶을 살아온 선생의 숭고한 항일독립운동정신을 후대에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2002년 11월 3일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정부에서는 이 기념비가 선생의 공훈 및 희생정신을 기리며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함에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여 2003년 12월 18일 국가 현충 시설로 지정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2004년 5월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43-1-15호 / 소재지 : 경남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822
애국지사 일암 하장환 선생(1874-1928)은 유림의 대표적 항일독립운동인 제2차 유림단사건에 김창숙, 김황, 김화식과 함께 연류되어 옥고를 치른 후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출옥 1년만인 1928년에 서거하였다. 강직한 애국의 삶을 살아온 선생의 숭고한 항일독립운동정신을 후대에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2002년 11월 3일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정부에서는 이 기념비가 선생의 공훈 및 희생정신을 기리며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함에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여 2003년 12월 18일 국가 현충 시설로 지정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2004년 5월
愛國志士 逸庵 河章煥 先生 紀念碑(애국지사 일암 하장환 선생 기념비)
이곳은 하장환(1874~1928년, 호:일암) 선생이 태어나고 유학을 수학하던 생가일 뿐만 아니라, 일제 시대 때에는 심산 김창숙 선생 등과 함께 유림들의 독립운동 활동방향에 대하여 논의하던 곳이다. 선생은 고려 현종에 거란에 항거하여 임금에 대한 절개와 나라에 충성을 바쳤던 공진(~1011년, 시 문하시랑)공의 29대손이며, 조선 태종때 영의정을 지낸 하륜(1347 ~1416년, 호 호정 시호 문충)공, 세종때 함길도 도절제사, 판중추원사를 역임한 경리(1377~1438년, 시호 양정) 공의 후손이다. 선생은 1874년 11월 21일 계중공과 의성김씨 사이에 1남 2녀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배위 노정덕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만기, 만리, 만춘과 딸 춘심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곧은 지조와 절개를 지녔고 한학과 유학에 정진하여 지방 유림의 학맥을 이어갔다.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강한 선생
은 일제 치하 일본에게는 세금을 낼 필요없다며 세금을 징수하러 온 일본 관리를 엄하게 꾸짖어 돌려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1919년 2월 고종장례식 인산례 때는 일제가 금하는 백립을 쓰실 만큼 선생은 올곧은 선비의 절개를 지켰다. 하지만 우리 동포에 대한 사랑은 남달라 흉년에는 집안 곳간을 모두 열어 헐벗은 사람들을 규휼하는 인자함을 지녔다. 1919년 3월 1일 일제 치하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을 때 각계 33인중에 유림대표가 빠져 있음을 애통해하며, 이에 유림들은 어려움에 빠져있는 조국의 상황에서 학문에만 전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향후 활동 방향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1925년 3월 김창숙, 손후익, 김황 등 유림대표들은 해외에 독립기지건설과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향성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진주의 부호이자 지역 유림의 지도자였던 선생은 자기 재산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김창숙, 송영우, 김화식 등과 함께 1925년 9월 비밀결사조직인 신건동맹단을 결성하여 진주, 함양 등 서부 경남지방 자금 모급을 총괄하였다. 이를 통해 거두어진 자금은 무기구입 등 독립활동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 1926년 3월 독립자금 모금 활동이 밝혀져 선생은 손후익, 김황, 김화식 등과 함께 피검되었으며, 유림 600여명이 체포되었던 이 사건은 일제하 유림 선비들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으로서 병인유림단사건 또는 제2차 유림단의거라 한다. 선생은 대구감옥에 구금된 후 9개월동안 미결수로서 옥고와 심한 고문을 받다가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예심종결 결정으로 방면된 후, 옥고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이듬해 무진년 1928년 1월 3일에 서거하니 향년 53세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선생의 항일독립운동 공훈을 인정하여 2002년 8월 15일 제57주년 광복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