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세병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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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의령군 칠곡면 외조리 558-1
탐방로그
여세병 추모비는 기미독립만세 사건 때 칠곡면소를 타격하는 등 독립만세를 외치다 옥고를 치른 선생의 우국충정을 기리고자 1984년에 건립되었다. 같은 장소에 여찬엽 추모비가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 곳의 주소는 경남 의령군 칠곡면 외조리 559-2이다.
독립지사 도와 여찬엽공 추모비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42-01-21 / 관리자: 의춘여씨 칠곡종친회 / 성명: 여찬엽(余燁) / 생존기간: 1889. 7. 14~1954. 12. 17 / 출생지 : 경남 의령 / 운동계열: 3.1운동 / 사망지: / 훈격(연도): 애족장(90)
공적내용
경상남도 의령(宜寜) 사람이다. 1919년 3월 14일의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누이동생 구은득(具銀得)의 문병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구여순(具汝淳)과 그의 이종동생 이화경(李華卿)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들은 귀향 즉시 이곳의 청년 유지들인 정용식(鄭容軾)·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만나,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당시 용덕면(龍德面) 면장이던 강제형(姜齊馨)에게 독립선언서의 등사를 부탁하여 그의 협조로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수백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이 계획을 알리고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찬성한 그는, 3월 14일 오후 1시경, 의령장터에서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이 가세하였고, 인근의 주민들도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시위군중은 장터와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친 뒤 자진 해산하였다. 이튿날 그는 의령향교(宜寧鄕校) 앞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시위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화경·이원경(李源卿)·최숙자(崔淑子)·강순이(姜順伊) 등의 주동 하에 여성들도 궐기하였다. 그러나 이때 마산(馬山) 주둔 일본 포병대대에서 응원 출동한 8명의 일본군과 현지의 일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8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진주(晋州)지청에서 소위 소요 협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註(주) ㅇ 형변경통지서(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검사분국) / ㅇ 판결문 (1919. 4. 28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 ㅇ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11면

독립지사 만송 여세병공 추모비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42-01-22 / 관리자: 의춘여씨 칠곡종친회 / 성명: 여세병(余世炳) / 생존기간: 1897. 5.22~1971. 7. 15 / 출생지 : 경남 의령 / 운동계열 : 3.1운동 / 사망지: / 훈격(연도): 애족장(90)
공적내용
경상남도 의령(宜寜) 사람이다. 1919년 3월 14일의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누이동생 구은득(具銀得)의 문병 차 상경하였다가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구여순(具汝淳)과 그의 이종동생 이화경(李華卿)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들은 귀향 즉시 이곳의 청년 유지들인 정용식(鄭容軾)·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만나,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당시 용덕면(龍德面) 면장이던 강제형(姜齊馨)에게 독립선언서의 등사를 부탁하여 그의 협조로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수백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이 계획을 알리고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찬성한 그는, 3월 14일 오후 1시경, 의령장터에서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이 가세하였고, 인근의 주민들도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시위군중은 장터와 읍내를 시위 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친 뒤 자진 해산 하였다. 이튿날 그는 다시 의령향교(宜寜鄕校) 앞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비가 내리 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시위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화경·이원경(李源卿)·최숙자(崔淑子)·강순이(姜順伊) 등의 주동 하에 여성들도 궐기하였다. 그러나 이때 마산(馬山) 주둔 일본 포병대대에서 응원 출동한 8명의 일본군과 현지의 일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8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진주(晋州)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주) ㅇ 형변경통지서(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검사분국) / ㅇ 수형인명부(의령군 칠곡면) / ㅇ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11면
추모비는 1984년 건립되었다.
여찬엽공 추모비는 칠곡면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른 선생의 의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여세병공 추모비는 기미독립만세 사건 때 칠곡면소를 타격하는 등 독립만세를 외치다 옥고를 치른 선생의 우국충정을 기리고자 건립되었다.
獨立志士 晩松 余世炳公 追慕碑(독립지사 만송 여세병공 추모비)
지나가는 길손이여. 이 글월에 걸음을 멈추시랴! 젊어선 조국과 겨레를 위해 몸을 던졌고 절개와 지조로 일제에 항거한 어른을 명기함인저 - 공은 1897년 의령여씨 휘 선재 29세손이며 고는 휘 민표이며 비는 현풍 정씨 망우당 재우 후예로 칠곡면 도산리서 출생하니 자는 사견 호는 만송이다. 일찌기 망국의 한을 간직하다가 기미독립만세때 사종 찬엽과 더불어 동지를 규합. 분연히 일어나 군중들에 앞장서 칠곡면소를 타격하는 등 독립만세를 선창하였으니 그 메아리치는 서부일원을 여울졌으며 주모로 왜경에 피체된 공은 진주 대구 서울 마포형무소 등을 전전 이감돼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1년여 뒤 출옥하였다. 그 후 일제 감시하에 조국 광복을 확신한 공은 끈질긴 협력과 회유책에 불응하며 절개와 지조로 일관하여 해방을 맞았다. 1964년 의령군수는 공을 포상하였고 1977년 75세를 일기로 영면하자 의령군수는 군민장으로 위령하였다. 1983년 정부는 공에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포상을 추수하였으며 이어 84년 경남도지사와 의령군수는 공의 묘역정화사업을 추진한 바 이에 뜻을 같이 한 여러 인사들과 함께 추모의 비를 여기 세우는 터이다. 무릇 한 개인의 부귀영화는 시대에 따라 뜬구름처럼 사라지나 공의 지조와 절개는 조국의 역사와 더불어 항상 새로우니 그 행적을 길이 만세에 전하고자 함이로라.
1984년 11월 일 경남대학교 교수 법학박사 이종상 찬 우촌 심철호 서
만송 여세병공 추모비 건립위 수
사자 동규 진규, 서 허만주
손 석호 재호 인호 양호 만호
증손 태열 태만 태원 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