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봉곡리 793-1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김문옥 의사는 병신 칠월 십칠일 의령군 지정면 봉곡에서 태어나시어 육십칠세의 오수를 누리시다가 임인 오월 삼십일 출생지인 봉곡에서 세상을 떠나시었다. 의사는 을사년 오월 향리에 있는 양심정 서광에서 한학을 수학 하던 중 을사보호조약의 뒤를 따르는 일본의 학정이 자심 할 적에 그 분통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농사 일에 바치시였다. 그러던 중 기미 삼일 운동이 일어나자 삼월 십오일 기독교인 장재명 밀사로부터 독립선언 지령문을 받고 손태현 이승로 박지목과 상의한 끝에 자금은 무제한 이승로가 부담키로 하고 박지목은 동부 지점 의사와 손태현은 중서부 지점을 맡아 삼월 십칠일 면민 수백명을 봉곡 장터에 집합시켜 동부 대열과 합세한 후 태극기를 앞세우고 낙동강을 건너 창녕군 웃개(남지)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오후 함안군 평림을 거쳐 그 익일 봉곡 장터에 이르렀을때 의령 경찰서 중교 출장소 관 순검이 이를 제지하자 의사는 이놈! 너는 대한 백성이 아니냐 우리와 같이 만세를 불러라 하면서 차고 있는 칼을 뺏아 부수고 앞장 세워 만세를 부르게 했다. 의사는 삼월 십구일 의령 경찰서원 이십 여명에게 검거되어 전주 형무소로 거쳐 대구 고등 형무소에서 삼개월간 고초를 당하시다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삼년 동안 영호에서 욕을 당하시고 임술 일월 십삼일에 출옥 하시었다. 의사는 향리에 돌아와 자나깨나 잔악한 일정의 쇠사슬을 벗어나서 조국의 광복을 하루 바삐 보시려 하였지만 일정의 감시는 더욱 심하여 그들의 국경일에는 일주일 이주일씩 구속시켰다. 견디다 못해 처자를 버리고 을축 사월에 만주로 들어가 봉천에서 은폐 생활을 하시다가 갑술 사월 부인이 마산 장남 원배 차남 상배 장녀 봉순을 데리고 만주와 화태 등지를 전전 유랑하시였다. 해방을 맞이하여 을유 십이월 이십일 귀국 하시였다. 의사는 몽매에도 기다리고 바라
김문옥 의사는 병신 칠월 십칠일 의령군 지정면 봉곡에서 태어나시어 육십칠세의 오수를 누리시다가 임인 오월 삼십일 출생지인 봉곡에서 세상을 떠나시었다. 의사는 을사년 오월 향리에 있는 양심정 서광에서 한학을 수학 하던 중 을사보호조약의 뒤를 따르는 일본의 학정이 자심 할 적에 그 분통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농사 일에 바치시였다. 그러던 중 기미 삼일 운동이 일어나자 삼월 십오일 기독교인 장재명 밀사로부터 독립선언 지령문을 받고 손태현 이승로 박지목과 상의한 끝에 자금은 무제한 이승로가 부담키로 하고 박지목은 동부 지점 의사와 손태현은 중서부 지점을 맡아 삼월 십칠일 면민 수백명을 봉곡 장터에 집합시켜 동부 대열과 합세한 후 태극기를 앞세우고 낙동강을 건너 창녕군 웃개(남지)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오후 함안군 평림을 거쳐 그 익일 봉곡 장터에 이르렀을때 의령 경찰서 중교 출장소 관 순검이 이를 제지하자 의사는 이놈! 너는 대한 백성이 아니냐 우리와 같이 만세를 불러라 하면서 차고 있는 칼을 뺏아 부수고 앞장 세워 만세를 부르게 했다. 의사는 삼월 십구일 의령 경찰서원 이십 여명에게 검거되어 전주 형무소로 거쳐 대구 고등 형무소에서 삼개월간 고초를 당하시다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삼년 동안 영호에서 욕을 당하시고 임술 일월 십삼일에 출옥 하시었다. 의사는 향리에 돌아와 자나깨나 잔악한 일정의 쇠사슬을 벗어나서 조국의 광복을 하루 바삐 보시려 하였지만 일정의 감시는 더욱 심하여 그들의 국경일에는 일주일 이주일씩 구속시켰다. 견디다 못해 처자를 버리고 을축 사월에 만주로 들어가 봉천에서 은폐 생활을 하시다가 갑술 사월 부인이 마산 장남 원배 차남 상배 장녀 봉순을 데리고 만주와 화태 등지를 전전 유랑하시였다. 해방을 맞이하여 을유 십이월 이십일 귀국 하시였다. 의사는 몽매에도 기다리고 바라
시던 조국의 광복을 보셨지만은 남북 통일의 성업을 남겨둔 채 돌아가시었다. 그러나 의사의 민족 정신의 정화와 항성은 천추에 길이 남으리라. 이제 향리 선비들이 의비 건립 위원회를 결성하고 한 덩이의 돌을 세우는 것이다. 아 비문은 김문옥 의사의 조카 인수군의 원을 따라 읽기 쉬운 국문으로 전 민의원 이영희 짓고 임채봉 쓰다.
서기 1970년 8월 15일 세우다.
서기 1970년 8월 15일 세우다.
의사 김해 김공 문옥 기의비
(義士 金海 金公 文玉 記義碑)
(義士 金海 金公 文玉 記義碑)
애국지사 김사용(일명 : 문옥) 선생의 묘소
공은 1896년 7월 17일 의령군 지정면 봉곡리 747번지에서 출생하시고 1919년 3월 14일 의령읍 항일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시고 이틀 뒤인 3월 16일 지정면 봉곡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태극기를 제작, 배포하고 독립선언문 낭독 후 시위하시다가 주동자의 한 분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감옥에서 1년간의 옥고를 겪으셨다. 출감 후 향리에서 조용히 사시다가 1962년 5월 30일 타계하셨다. 정부에서는 공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追敍)하였다.
● 묘소 소재지 : 경남 의령군 지정면 태부리 산 284 / 1996년 10월 11일 대전국립묘지 봉안
공은 1896년 7월 17일 의령군 지정면 봉곡리 747번지에서 출생하시고 1919년 3월 14일 의령읍 항일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시고 이틀 뒤인 3월 16일 지정면 봉곡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태극기를 제작, 배포하고 독립선언문 낭독 후 시위하시다가 주동자의 한 분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감옥에서 1년간의 옥고를 겪으셨다. 출감 후 향리에서 조용히 사시다가 1962년 5월 30일 타계하셨다. 정부에서는 공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追敍)하였다.
● 묘소 소재지 : 경남 의령군 지정면 태부리 산 284 / 1996년 10월 11일 대전국립묘지 봉안
제14호 훈장증 - 고 김사용 자 문옥
위는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 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족장
1990년 8월 15일
대통령 노태우 / 국무총리 강영훈 / 이 증을 건국훈장부에 기입함 / 총무처장관 이연택
위는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 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족장
1990년 8월 15일
대통령 노태우 / 국무총리 강영훈 / 이 증을 건국훈장부에 기입함 / 총무처장관 이연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