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서동리 58
- 탐방로그
- 남저 이우식 선생은 한글학자 이극로와 안호상과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그들 개인이 공부하고 활동하는 비용도 대주었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1967년 한글학회에서 세운 비석이다.
일생에 어진 뜻을 품고 어진 일을 하고 간 어진이 한 분이 여기에 누워계시니 남저 이우식 선생이시다.
세상에 부유하고서 교만하지 아니하기 어렵고 그보다도 귀중한 재산을 큰일과 좋은일에 빛나게 쓰기란 더 어려운 일인데 그는 두 가지 어려움을 모두 행한이라 우리는 그를 어진이로 받들어 왔었다.
일찍 나라를 여윈 뒤로 동지들과 더불어 백산상회를 세워 임시정부를 돕고 다시 시대일보와 중외일보등을 창간하여 언론으로 일제에 항거도 했으며, 1929년부터 조선어학회 한글큰사전편찬을 위한 재정을 전담하더니 마침내 그 때문에 흥원, 함흥 등 일제의 감옥에 갇혀 고초를 당하기도 했으나, 76년 한평생 몸과 뜻을 높고 깨끗이 오직 지조와 성실 속에 살고 간지라 믿건대, 겨레와 나라에 끼친 문화적 공덕으로는 선생이 명복을 누릴 것이요, 벗들과 후배를 도와준 선생의 값은 유가족들에게 복됨이 될 것이다.
이은상은 글을 짓고, 김충현은 글씨를 쓰고, 1967년 7월 5일 한극학회 동지 일동이 세우다.
세상에 부유하고서 교만하지 아니하기 어렵고 그보다도 귀중한 재산을 큰일과 좋은일에 빛나게 쓰기란 더 어려운 일인데 그는 두 가지 어려움을 모두 행한이라 우리는 그를 어진이로 받들어 왔었다.
일찍 나라를 여윈 뒤로 동지들과 더불어 백산상회를 세워 임시정부를 돕고 다시 시대일보와 중외일보등을 창간하여 언론으로 일제에 항거도 했으며, 1929년부터 조선어학회 한글큰사전편찬을 위한 재정을 전담하더니 마침내 그 때문에 흥원, 함흥 등 일제의 감옥에 갇혀 고초를 당하기도 했으나, 76년 한평생 몸과 뜻을 높고 깨끗이 오직 지조와 성실 속에 살고 간지라 믿건대, 겨레와 나라에 끼친 문화적 공덕으로는 선생이 명복을 누릴 것이요, 벗들과 후배를 도와준 선생의 값은 유가족들에게 복됨이 될 것이다.
이은상은 글을 짓고, 김충현은 글씨를 쓰고, 1967년 7월 5일 한극학회 동지 일동이 세우다.
1891년 7월 22일 경남 의령 출생
1966년 7월 5일 서울에서 별세
1966년 7월 5일 서울에서 별세
의령군 의령읍 서동리 주공아파트에서 뒤쪽으로 올라가 주차를 한 후 저수지 쪽으로 가는 길이다.
저수지 뒤쪽의 대나무 숲 사이길로 계속 올라가야 한다.
대나무 숲길을 지나 계속 올라가면 의령남씨의 무덤들이 보인다. 이곳에서 계속 소나무 속으로 올라가야한다.
아래쪽에는 남저 선생의 자제분 묘소가, 위쪽에 남저 이우식 선생의 묘가 있었다.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1977.12.13 훈장증 제 508호
1977.12.13 훈장증 제 50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