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억근 공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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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629-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함안이씨(咸安李氏) 운곡정사
애국지사 일성 이억근 선생 공훈비
관리번호: 42-1-45
관리자: 함안이씨 월암공파 종중
소재지: 경남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629-3
고 이억근 애국지사는 함안 이씨 23대손으로서 1893년 5월 24일 의령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일찍이 서원학습을 마친 지사께서는 대한제국이 강제합방되자 1912년 만주 용정으로 나가 그 곳의 조선인 학숙에서 청소년 계몽교육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어렵게 되자 의령으로 귀향하여 의령청년개척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서 자주정신과 무실사상을 고취하는데 주력했습니다.
1919년 2월,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시위에 참가하고 귀향한 동갑내기 구여순과 함께 의령지역의 거사를 계획하는데 적극 찬성하고 주동세력으로 가담했습니다.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선도한 이억근 지사는 강제진압에 나선 일본군경에 체포되어 4개월여 간의 수감 끝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 공훈비는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2017년 4월 19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애국지사 일성 이억근 선생 공훈비
관리번호: 42-1-45
관리자: 함안이씨 월암공파 종중
소재지: 경남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629-3
고 이억근 애국지사는 함안 이씨 23대손으로서 1893년 5월 24일 의령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일찍이 서원학습을 마친 지사께서는 대한제국이 강제합방되자 1912년 만주 용정으로 나가 그 곳의 조선인 학숙에서 청소년 계몽교육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어렵게 되자 의령으로 귀향하여 의령청년개척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서 자주정신과 무실사상을 고취하는데 주력했습니다.
1919년 2월,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시위에 참가하고 귀향한 동갑내기 구여순과 함께 의령지역의 거사를 계획하는데 적극 찬성하고 주동세력으로 가담했습니다.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선도한 이억근 지사는 강제진압에 나선 일본군경에 체포되어 4개월여 간의 수감 끝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 공훈비는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2017년 4월 19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愛國志士一星李億根先生功勳碑(애국지사 일성 이억근 선생 공훈비)
지사의 휘는 진억이요 자는 억근이며 호는 일성이다. 고려 왕조 고종 세시에 광록대부를 역임하신 파산군 상공을 시조로 받드는 성안이씨의 23세손이며 월암공파 13세손으로서 1893년 계사 5월 24일 의령군 의령읍 중동 238번지에서 지규와 합천이씨의 장남으로 생하였다. 유시부터 서원에서 한학문을 수하며 동량지재로 성장하였는바 문장과 변론에 능하였다. 20세기 초 조국이 일본제의 무력침략에 굴하야 국권을 실함에 고향을 기하고 만주지역으로 이주해간 동포를 찾아 용정에서 학숙을 열어 조선인 청소년을 위한 계몽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재정사정으로 인해 난고가 가중되니향리 선영으로 귀하야 잡화점을 영하면서 선영청년개척단을 조직하고 무실사상과 자주정신을 함양 고취하며 향토개
발을 위해 진력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봉기함에 동시위에 가담하고 의령지방의 거사를 모하려 귀향한 27세 동갑 구여순의 제의에 적극 찬동하며 최정학 남호섭 등 제 동지와 대하야 의령읍내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세력으로 활약하였다. 3월 14일 읍내 장날을 택하야 궐기한 시위는 비밀리에 사전 준비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참집 군중에게 배포하며 시위 동참을 권하는 취지연설로 시작된 바 지사는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들어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추변으로 역설하고 집회행렬의 선도에 임하였다. 시위운동은 수천읍민의 만세 고창과 도보행진으로 15일과 16일까지 연하였다. 연이나 만세시위 직후 일본관헌에 검거되어 3개월여의 구금 끝에 대구복심법원으로부터 징역 10월의 선고를 받고 대구감옥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 오래동안 일본경찰의 일상감시하에 생활하다가 일본국 대판(오사카)으로 이주한 바 그것은 일본 국내지에서 오히려 감시제한이 경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1934년 이래 대판(오사카) 거류 조선인 연맹구 지회장을 맡아 교민권익 옹호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1938년에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의령으로 강제귀환 당하였다. 기후 태평양전쟁 발발에 이은 전시 체제하에서 인고의 날을 보내다가 조국광복 8개월을 앞둔 1944년 12월 20일에 52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으니 의령읍 중동 산5번지 내곡 황토등에서 영면하고 있다.
대한민국정부는 1992년 3월 1일 조국의 자주독립에 이바지한 공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일성은 경주 최씨 점이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광수(대원)는 향리의 선각명사였으며 2남3녀 상석 상무 경자 영희 영옥이 있고 차남 정수는 해군 준장으로 보국한 국가유공자로 3녀 주흥 귀흥 경이었다. 장녀 광숙은 박
○룡에게 嫁(가)하야 5남 욱 춘 탁 진 경을 두었으며 차녀 광순은 최연길에게 가하야 2남 2녀 규식 규수 정인 미연이 있다.
일성 지사께서는 조국의 독립을 갈구하는 열화 같은 신념을 고수하였으며 덕망 높은 인격을 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애국 지도자로서 행적이 우뚝하였으니 가문의 영광이어라. 이에 함안이씨 월암공파 문중 일동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님의 공훈을 기리며 높이 찬양하는 바 입니다.
서기 1995년 10월 3일
함안이씨 월암공파 의령종친회 일동
차남 국가유공자(예) 해군준장 정수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629-3 운곡정사 앞 애국지사 일성 이억근 선생 공훈비 안내판이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