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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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21-1
탐방로그
이곳에는 유홍석 선생 묘, 유제원, 윤희순 선생 합폄묘, 윤희순 선생 사적비, 유돈상 선생 묘가 있다. 유홍석 선생의 아들이 유제원 선생, 유제원 선생의 아들이 유돈상 선생으로, 세 인물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고흥유씨(고흥류씨) 집안 독립운동가이다. 윤희순 선생은 유제원 선생의 부인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과 연루되여 만주 흥경현 경찰서에서 비통히 학살되니 그 참상은 목불인견이라. 여사는 시모와 아들의 생명보존을 위하여 풍찬노숙 만주 땅을 헤매며 남편을 내조하다 1934년 차자 연익을 출산하였으나 천인공노할 왜경이 여사가 은거한 집에 불을 질러 구사일생으로 시모와 아들을 구출하시니 이 어찌 선대의 은우하심이 아니리요. 그것도 잠시 이듬해 7월 남편 류돈상 지사가 대한독립단 청년단원 교육 중 왜적의 급격으로 피체되여 무순현옥에서 모진 고문으로 빈사 상태에서 출옥 즉후 순국하니 아들을 잃은 충격에 노시모마저 운명하시다. 이때 여사의 나이 28세라. 황막한 이국 땅에서 두 아들에 목숨을 지키고져 몸부림친 형극의 고초를 어이 다 상상하리오까. 여필종부라 시재당숙 극와장의 인도로 두 아들을 이끌고 충북 산청면 고국을 찾았으나 호구지책을 감내할 길 없는 가난에 다시 만주로 가게 되니 독립투사의 아내와 자식이 머물 곳은 한반도 땅이나 만주 땅이나 막막할 뿐 잃어버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항쟁의 시련은 노모와 젊은 아내 어린 아들까지 지탱할 길 없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손가. 사면초가 왜적의 소굴에서 천행만고 목숨을 부지하다 폭악한 왜경에게 잡혀 잔인한 고문의 여독으로 1940년 3월 초 어느날 천추의 한을 가슴에 묻은 채 가련히 생을 마치시니 향년은 33세라 한다. 시대비운의 역사속에서 여사께서 격으신 생의 수난은 독립운동가의 딸과 3대를 이어 구국투쟁에 목숨 바친 독립지사의 며느리와 아내로서 걸어오신 발자국마다 혈루로 얼룩졌으니 오호통재라. 이 쓰라린 사록은 천지신명이나 아실런지 어이 필설로다 형용하오리까. 그 후 장자 연직마저 요절하니 유일한 혈손은 연익이라. 광복 후 12세에 환국하여 정처없는 유랑생활로 성장하여 1968년 선영을 찾아 통곡으로 성묘하고 1978년부터 춘천에 정착 순국선열의 충의선양과 묘성역화사업에 진력하다 평생을 오매불망하던 선대의 유해를 찾아 만주로 들어가 994년 천우신조하여 조모 윤희순 여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 선영에 안장하고 다음해부터 수차 만주로 가 부모님 유해를 찾았으나 뜻을 못 이루어 아버님이 순국한 무순 땅 흙 한 줌 떠다 혼백을 모시고 중
국에서 모친 종이 옥순 이모님을 모셔다 극진히 뫼시던 중 뜻밖에 TV를 접한 박한설 교수의 도움으로 서울에 있는 외가 일족을 찾아 만주 길림성으로 달려가 효임 이모님을 상면하니 이 또한 선대현령이 굽어 살피신 계시라 아니하리요. 광복회 강원도지부장으로 민족정기 선양을 위한 정신운동에 헌신하는 아드님을 도와 일하면서 몽매간에도 어머님 유해를 못 찾아 자식된 도리를 못함을 몹시 애통하는 아들의 심정을 시생 희동은 선대의 돈독한 세교와 사가의 구국의지 상통했던 유지를 받들어 여사의 일대기를 지었으며 아들은 여기 아버님 묘역 옆에 어머님의 애모비를 세우나이다.

광복회 강원도지부 사무국장 권희동 지음 서기 1998년 8월 15일 자 연익 세움
윤희순 의사께 바치는 글

아, 윤희순! 뒤뜰에 단을 세워 정안수 떠 놓고 춘천의병 전승 빌며 삼백일 기도 내 한 몸 바쳐서 나라가 한다면 남녀 구별 쓸데없네 오로지 애국이요 만주 땅 허허벌판 이름 없는 망명 생활 조선 독립 일념으로 군사훈련 몸소 받고 노학당 학교 세워 애국혼 길러내니 높은 뜻 흘러 흘러 이곳에 살아나네 무순감옥 모진 고문 아들마저 잃고 나니 칠십육 세 한평생을 나라 위해 쓰인 몸 쓸쓸히 눈 감을 때 새 한 마리 울었을까 안사람 의병가를 목메게 부르노라 아, 윤희순! 그 혼불 영원토록 아, 윤희순! 조국을 지키노라

윤희순 기념사업회 김금분
윤희순 의사의 애국애족의 "혼"이 담긴 애달픈 노래와 이역만리 타국에서 운명을 앞두고 남긴 유묵인 소망과 평소 윤 의사의 높은 민족정신을 흠모하던 김금분 시인이 바치는 헌시를 담아 숭고한 애국충정의 뜻을 영원토록 기리고져 이 비를 건립한다.

2009년 3월 18일
윤희순 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찬옥
묘소의 GPS상의 주소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21-1이지만 넓은 산 지역을 포괄한다. 대신, 묘에서 가장 가까운 번지인 349-1을 찾아가는 것이 좋다.
이곳에는 유홍석 선생 묘, 유제원, 윤희순 선생 합폄묘, 윤희순 선생 사적비, 유돈상 선생 묘가 있다.
유홍석 선생의 아들이 유제원 선생, 유제원 선생의 아들이 유돈상 선생으로, 세 인물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고흥유씨(고흥류씨) 집안 독립운동가이다.
윤희순 선생은 유제원 선생의 부인이다.
항일 독립 애국선열 묘역 이전비

이곳은 의병장 유홍석 지사와 최초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 대한독립단에서 구국 항일투쟁에 신명을 바친 유돈상 지사의 묘역이다.
위 선열은 국내 의병 항쟁을 비롯하여 국외(중국) 망명, 민족운동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모두 중국 땅에서 서거하셨다.
유홍석 지사는 1930년 11월, 윤희순 의사는 1994년 10월, 유돈상 지사는 1994년 7월 춘천 남면 관천리에 안장되었다가, 국권 수호를 위한 춘천 의병 항쟁의 진원지인 남면 가정리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 성역화와 함께 민족정신 함양을 위하여 2012년 4월 6일 후손 연익에 의하여 이곳으로 묘역을 이전하였다.

광복회강원도지부 전 사무국장 권희동 근찬
소망 / 충효 / 애국 / 자손 / 만대 보존 / 윤희순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윤희순 여사의 친필이다.
애달픈 노래

애닯도다 애닯도다 형제간의 싸움이요
부자간의 싸움이라 이런 일이 어디 있나
우리 조선 백성들이 이렇듯이 어두운가
제 임금을 버리고서 남의 임금 섬길쏘냐
우리 조선 버리고서 남의 나라 섬길쏘냐
애닯도다 애닯도다 우리 조선 애닯도다
자기 처를 버리고서 남의 처를 사랑하니
분한 마음 볼 수 없어 내 가슴을 두드리니
내 가슴만 아플세라 귀한 목숨 아무 데나
버릴쏘냐 나도 나가 의병하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도와주세

이 노래를 부르면서 도와주세
유제원 선생의 아버지, 윤희순 선생의 시아버지이자 유돈상 선생의 할아버지인 유홍석 선생 묘이다.
'의사 고흥유공 홍석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선생의 휘는 홍석이요 자는 효백이요 호는 외당이니 고흥인이다. 원조는 고려시중 휘 탁이요 조선조에 휘 숙 부제학이니 선생의 10세조이다. 고조는 휘 경이니 첨지중추부사요 증조는 휘 영구니 통덕랑이요 조는 휘 구니 진사요 고는 휘 중학이요 비는 완산이씨니 주석의 녀이다. 선생이 헌종7년 신축정월6일에 한양에서 출생하니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질이 비범하여 10세에 숙부 성재선생을 따라 화서 중암 두 선생문하에서 수학하여 지행이 고결하였으며 특히 의리에 밝아 위정척사에 큰 뜻을 두게되었다. 고종 갑신년에 변복령이 내리자 선생이 크게 반발하여 삼첩시를 지어 그 뜻을 표하였다. 그 후 을미년에 왜적이 국모를 시해하는 변이 일어나매 선생
이 재종제 의암 선생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가 형세가 여의치 못하니 여선 곡산 영변 초산 등지로 전전하여 요동으로 들어갔다가 정유년에 환국하였다. 정미년에 왜적이 고종황제를 핍박하여 장제로 전위케하며 정부의 군대를 해산케하자 각지에서 격렬한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에 선생은 족숙 항와 선생 등과 모의하고 의병 6백여 명을 모집하여 춘천진 병산과 가평 주길리 등지에서 싸웠으나 왜병의 우세한 무기를 감당할수는 없었다. 선생은 제천 장담으로 가서 재거를 도모했으나 각처 의병이 모두 해산되어 뜻을 이룰수 없었다. 드디어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선생은 원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하여 가권을 거느리고 만주로 들어가 의암 선생과 함께 의병 재거를 추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축년 12월 21일에 요동 회인현 대아하춘 유도산만 거제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73세였다. 명년 3월 10일에 서강왕팔가 후산 하록 임좌원에 안장하였다가 경오년에 장손 돈상이 고향인 관천 선영 하향 서원에 이장하였다. 선생의 필생국권 수호운동에 대하여 국가에서는 경신년 8월 14일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배는 파평윤씨니 학생 영만의 녀이다. 헌종 3년 정유에 출생하여 철종 6년 을묘에 선생에게 시집오고 고종 25년 무자 11월 9일에 돌아가니 가평 검단리 임좌에 안장하였다가 갑자년 6월에 이장하여 선생과 합폄하였다. 2남 2녀가 있으니 장남은 제원이요 차남은 제설이며 2녀는 순흥 안승욱과 달성 서정환이다. 제원은 돈상 민상 교상 3남을 두었고 제설은 남
휘상과 녀 김해 김현모를 두었다. 돈상은 남 연익을 두었고 민상은 연화 연중 2남을 두었고 교상은 연홍 연우 2남을 두었는바 연우는 종문 휘상에게 출계하였다. 연익은 석균 영균 2남을 두고 연홍은 남 양균을 두었고 연우는 익균 성균 2남을 두었다.
단기 4307년 6월 강원대학교 교수 박한설 근찬
영력 기원 후 육갑자 음력 5월 족질 유제직 근서
서기 1984년 6월 대한민국 원호처장 조철권 근수
유제원 선생과 윤희순 선생의 묘이다.
유제원 선생은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이시다.

윤희순 선생의 묘는 10월 20일 춘천시 남면 관천리 고흥류씨 선영에 남편 유제원과 합폄되었다. 이후 춘천 의병항쟁의 진원지인 춘천시 남면 가정리의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 성역화와 함께 유제원, 윤희순 선생의 묘는 2012년 4월 6일 고흥유씨(고흥류씨) 가족묘역으로 이전되었다.
'지사 고흥유공 제원지묘
배 유인 해주윤씨 부좌'라고 새겨져 있다.
공의 휘는 제원이요 자는 성지요 호는 항제니 고흥인이다. 고는 휘 홍석이니 의병장이요 비는 파평윤씨니 학생 영만의 녀이다. 공이 철종 10년 기미8월 13일에 출생하니 총명이 와인하여 7세에 능히 시를 지어 松柏葉似針楊柳枝如絲十月天氣冷未作良人衣(송백엽사침양유지여사십월천기냉미작양인의)라 하였으며 8세부터 종조 성재 선생과 족조 항와 선생에게 수학하여 화서 중암 두 선생의 대도를 습득하였다. 화동사판의 판자는 모두 공이 쓴 바이다. 조선 말엽에 가존 외당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토적할 때에 공은 부인 윤씨와 함께 극력 주선하여 의병활동을 도왔
으며 경술국치를 당하여 외당이 가권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들어가 의암 선생과 함께 국권회복을 도모하다가 외당과 의암이 차제로 하세하여 대의를 펼 수 없게 되자 공은 이로 인하여 병을 얻어 을묘년 10월 2일에 돌아가니 요동 회인현 대아하에 안장하였다가 경오년에 장자 돈상이 고향인 관천리 선영하에 이장하였다. 공의 배는 해주윤씨 휘 희순이니 해양군 양간공 희평의 후학 생익상의 여이다. 철종 11년 경신에 출생하니 천성이 씩씩하고 활발하여 16세에 공에게 시집온 후 집안의 대소사를 무난히 처리하였다. 조선말에 외당이 의병을 일으킬 때에 윤씨는 부녀들을 모아 군자금을 거두고 의병활동을 후원하였으며 의병군가 안사람 의병가 등을 지어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경술국치 후 요동으로 들어가 외당의 국권회복운동을 돕다가 외당과 항재가 연하여 돌아가고 또한 독립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장남 돈상이 왜병에게 피살되자 3대에 걸친 의병활동에 참여하던 윤씨는 원한에 사무쳐 을해년 8월 1일에 돌아가니 요동 해성현 묘관 둔지산에 안장하였는바 세월과 인사를 헤아리건대 고국으로 반장할 가망이 없으므로 장손 연익이 갑자년 6월에 윤씨의 신위를 옥석에 새기어 공의 좌측에 합폄하였다. 임술년 11월 9일에 강원대학교 이상주 총장이 발산리 항곡에 해주윤씨 의적비를 세워 그 공적을 찬양하였으며 또한 국가에서는 윤씨의 구국활동에 대하여 계해년 8월 31일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한 바 있다. 공의 선계와 자손에 대하여
는 공 고 외당 선생 묘문에 상기하였으므로 다시 기록하지 아니한다. 공의 비문은 전자에 중와 김용숙 공의 지은 바가 있으나 이제 윤씨의 신위를 합폄하였으므로 양위의 사적을 결합하여 새로 쓰는 바이다.

단기 4317년 6월 일 강원대학교 교수 박한설 근찬
영력 기원 후 육갑자 음력 5월 일 족제 류제생 근서
광복 후 40년 갑자 6월 일 장손 연익 근수
윤희순 선생 사적비이다. '애국선열 윤희순 여사 사적비'라고 새겨져 있다.

본 사적비는 윤희순의 여성 의병활동과 항일독립투쟁활동을 기리기 위하여 강원대 박한설 교수가 사적비문(碑文)을 찬(撰)하고 애국선열 윤희순여사유해봉환제전위원회 위원장 이상룡과 집행위원장 김형배 외 위원 일동이 1994년 10월 20일에 세운 것이다. 이후 춘천 의병 항쟁의 진원지인 춘천시 남면 가정리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 성역화와 함께 2012년 4월 6일 고흥유씨(고흥류씨) 가족 묘역이 이전하면서 사적비도 함께 이전하였다.
여사의 성은 윤씨요, 휘는 희순이니 해주윤씨 익상의 따님으로 철종 11년에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품성이 명민하고 부모에게 효순하였으며 기상이 씩씩하고 활달하였는데 16세에 항재 류제원 공에게 시집온 후 그 관후하고 상밀한 솜씨로 어려운 가정을 잘 이끌어나갔다. 그런데 을미년에 이르러 왜적이 민비를 참살하는 사변이 일어나자 춘천에서는 전국 최초로 의병이 봉기하여 맹렬한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시부인 외당 선생과 항제 등 온 집안이 여기에 가담하여 싸우게 되었다. 과당이 전장으로 출발한 후 여사는 후원에 단을 몯고 매일 밤 정화수를 떠놓고 의병의 승리와 시부의 무사귀환을 하늘에 비는 한편 왜적의 만행을 규탄하는 포고문과 일제의 앞잡이를 질책하는 경고문을 지어 발포하고 또 병정 노래를 지어 국민의 분기와 의병 참여를 권유하고 의병가를 지어 의병들의 사기를 격려하기도 했는데 특히 역사상 초유의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도 의병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고 심지어 남장을 하고 정보를 수집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 후 정미년에 구 한국군대 해산 사건을 계기로 다시 격렬한 의병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이때에 과당은 의기청년 6백여명을 모아 주민 수 천명과 함께 남면 가정리 여우내골에서 대약과 강환을 만들며 유격훈련을 실시하니 여사는 참판댁 약암댁 남종댁 가정댁
등 안사람 80여명을 규합하고 군자금을 거두어 의병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직접 의병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외당은 준비가 완료되자 춘천 진병산과 의암소 및 홍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우다가 가평 주길리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므로 제천 장담으로 가서 상처를 치료하며 다시 의병을 모집하던 중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었다. 이때에 외당은 크게 분노하여 왜적의 통치를 받을 수는 없다 하고 1911년에 전가족이 중국 해성현 묘관둔으로 망명하여 의병의 재거를 추진하다가 불운하게도 1913년부터 외당과 의암과 항재가 차례로 도라가니 남은 가족들은 만리 타국에서 의지할 데가 없게 되고 어린 자질들은 여사가 홀로 보호해야 하게 되었다. 더구나 국권회복운동은 중단할 수 없다 하여 돈상 민상 교상 등 세 아들이 이를 계승하기로 하고 음성국 음성진 금민와 및 중국인 장영방 등 18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니 이후 20년간 가정은 여사가 혼자 꾸려나가게 되었다. 그간의 피눈물 나는 시련은 매거할 수도 없거니와 여사는 그 혹독한 고생도 국권이 회복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는데 1935년에 이르러 장자 돈상이 왜병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 죽으니 여사의 인내력도 한계에 이르러 살 의욕을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사는 재종 시동생 직와장에게 어린 손자들을 부탁하는 서언을 남기고 또 해주윤씨 일생록을써서 자손들에게 후일을 당부한 후 아들이 숨을 거둔 지 12일만인 8월 1일에 세상을 떠나니 슬프다. 여사는 그 파란만장한 일생을 끝마치게 되었다. 이때에 여사는 수가 76세로서 해성현 묘관둔 북산에 임시로 이장하였다. 그 후 정부에서는 여사의 애국활동을 인정하여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또 1990년에는 다시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승격시켰는데 지역에서는 여성으로 일생을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한 공을 기리고자 1982년 11월 9일에 이상주 강원대학교 총장이 여사의 향리인 춘천군 남면 발산리 항곡에 해주윤씨 의적비를 건립하였고 1990년 11월 5일에는 여성단체 예림회에서 춘천시립도서관 정원에 여사의 동상을 세운 바 있다. 그러나 여사의 묘소는 반세기의 남북분단과 중국과의 교통사절로 실전하였으므로 손자 연익씨가 이를 애통히 여겨 1984년 6월 28일에 부군 항재의 묘비를 세울 때에 여사의 신위를 돌에 새겨 합폄한 바 있었는데 그 후 중국과의 왕래가 가능해졌으므로 금년 7월 15일에 연익씨가 중국으로 들어가 해성시 묘관촌에서 옛날 동지 영수덕 영수곤 진장림 장건평 갈복순 등 중국인을 만나 여사의 묘를 찾으니 이제 여사는 생전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더우기 여사는 건국유공자로서 유해의 봉환을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게 되고 또 여사의 안장을 위하여 거도적으로 애국선열 윤희순 여사 유해 봉환제전 위원회를 구성하여 의전을 집행키로 하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금의환향인가! 뿐만 아니라 현
지의 중국인들도 위대한 애국자를 그대로 보낼 수 없다 하여 여사의 묘지에 충효예의 자손만대 보존이라는 여사의 유훈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니 여사의명예가 영원토록 빛날 것이다. 이리하여 오늘 여사의 유체가 부군 곁에 나란히 묻치게 되었으니 이제 여사는 편안히 눈을 감고 기쁘게 잠이 들 것이다. 생각하건대 전쟁과 충렬은 남성에 관계된 일이요, 여성은 집밖으로 나오는 것도 예사롭지 않던 시대에 윤여사는 규중의 몸임에도 불고하고 국권의 상실을 좌시만 할 수 없다 하여 소매를 걷어부치고 의병활동에 뛰어든 후 40년 동안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도 오직 국권회복을 위해 일생을 바쳤으니 모든 국민은 윤여사의 거룩한 애국애족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아! 장하도다. 윤여사여 자랑스럽도다. 윤여사여!

단기 4327년 10월 20일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박한설 근찬
애국선열 윤희순 여사 유해 봉환제전 위원회 위원장 이상룡 집행위원장 김배 외 위원 일동 근립
유제원, 윤희순 선생의 장남인 유돈상 선생의 묘이다.
봉분 옆에는 유돈상 선생의 묘비와 더불어 선생의 부인 묘비가 있다.
유돈상 선생의 부인은 두 분이다. 함열남궁씨와 죽산음씨이다.
각각 왼쪽 묘비부터, '애국지사 유돈상지묘, 배 유인 함열남궁씨 부좌', '죽산 음씨 채봉여사 애모비'라고 새겨져 있다.
유돈상 선생 및 부인 함열낭궁씨의 묘비문이다.

지사의 휘는 돈상 도는 동식 영식이요, 자는 백윤 호는 해암이요, 성은 류씨니 고흥인이다. 증조는 휘 중학이요, 조는 휘 홍석이니 호가 외당으로 춘천 의병장이요, 고는 휘 제원이니 호가 항재요, 비는 해주윤씨 희순이니 윤익상의 따님이다. 지사가 고종 31년 9월 29일에 춘천군 남면 발산리에서 출생하니 이해에 동학난과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일어나고 단발령으로 국내가 시끄러웠으며 이어서 다음해 을미년에는 왜인의 민비시해 사변이 벌어져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적과 투쟁하였으며 또 10년 후에는 일제에 의한 을사조약이 늑결됨을 계기로 다시 을사의병이 일어나고 이어서 2년 후에는 구 한국군대 해산을 계기로 정미의병이 일어나 맹렬한 항일전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지사는 이러한 환경속에서 성장했을 뿐 아니라 조부와 부모가 모두 의병에 가담하여 춘천의병을 주도하였으므로 자연히 애국사상과 항일정신이 싹트게 되었다. 그런데 수차에 걸친 의병투쟁도 왜적의 잔악한 강압으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니 조부 외당은 왜적의 통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하고 다음해에 솔가하여 만주로 망명 의병의 재거와 국권의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년 후인 1913년에 객지에서 돌아갔으며 다음해에는 숙부 제설이 또 다음해에는 족종조 의암 류인석과 부친 항재가 차례로 돌아가니 이제 지사 형제는 만리 타국에서 의거할데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지사는 부조의 뜻을 이어 국권회복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회인현 대야하에서 아우 민상과 김용필 음성국 음성진 이길용 장인도 이동만 안중학 및 중국인 장껑호(본명 영방) 등 동지 180여명을 규합하여 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 홍익단과 합세하여 전투준비를 하던 중 왜병의 기습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지사는 이름을 효준 효남으로 바꿔가면서 활동을 재개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또 국내로 잡입하여 군자금 모집과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만주와 국내를 넘나들며 맹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35년에 왜병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 죽게 되었으므로 가족이 무순현감옥으로 가서 인수해오다가 중도에서 운명하니 때는 1935년 7월 19일이었다. 동지 음성진 등이 시신을 무순현 용봉 항남산에 장사지내고 돌에다 류자만 새겨놓고 돌아왔다. 그 후 광복으로 가족들이 귀국하니 중국과는 연락이 두절되고 50여년 동안 세월만 흐르다가 1993년 4월 13일에 이르러 정부에서 지사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를 계기로 지사의 아들 연익씨가 부친의 묘를 찾기 위해 1994년 7월 15일에 중국 무순으로 가서 해성시 일원을 수소문하였으나 지형의 심한 변화로 인하여 마침내 찾지 못하고 묘소 부근의 흙 한 줌을 가지고 돌아와 춘천군 남면 관천리 선영하에 혼백장을 지내게 되었다. 생각하건대 지사는 의병가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살아서는 위난속에서 지내며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고 죽어서는 60여년을 적막한 이국 산야에서 방황하였으니 그 애절함을 어찌 다 표현하랴. 다행히 혼백이나마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니 이제 지사는 편안히 눈을 감고 명복을 누릴 것이다. 지사의 전배는 함열남궁씨이니 1894년에 태어나 1922년 6월 13일에 만주에서 돌아가니 그곳에 모셨다가 1930년에 지사가 선영하로 이장하였더니 이번에 지사의 혼백과 함께 합폄하게 되었고 후배는 죽산 음
씨니 부는 성국으로 1908년에 태어나 1940년에 돌아갔는바 역시 묘소는 찾지를 못하였는데 자 연익과 손자 석균 영균을 두었다. 그밖에 지사의 가계와 구체적 사실은 외당과 항재의 묘비에 자세히 실렸으므로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

단기 4327년 8월 15일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박한설 근찬 광복회 강원도지부 근립
유돈상 선생의 부인인 음채봉 선생 애모비문이다.

여사의 본관은 죽산이요 휘는 채봉이라 1908년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경릉리에서 부친 음성국 공과 모친 손정숙 여사의 1남 3녀 중 장녀로 출생하시다. 일찍이 부친 성국공과 백부 성진공 형제는 국권상실을 통분하여 구국에 의지를 품고 평안도에서 활동하다. 여사가 10세되던 1917년 만주로 온 가솔이 망명하여 어려서부터 왜적을 피해 전전불매하며 성장하니 당년 21세되던 해에 지하독립운동을 하던 부친께서 대한독립단의 유돈상 지사를 찾아 침략자를 응징하는 원한을 생전에 못풀줄도 모르니 공은 내 여식과 혼인하여 자손을 보아 후일을 기약하자며 청혼함에 양가는 인연이 되니 이로부터 여사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시작되었다. 1932년 구국 지하활동 중인 부친이 대한독립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