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규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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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이목리 536-2
탐방로그
경남 의령군 용덕면 이목리 94 수도사 입구에 있다는 독립지사 최병규 선생 추모비를 찾아왔다. 하지만 해당 번지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실제 기념비는 의령군 용덕면 이목리 536-2 수도사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남 의령군 용덕면 이목리 94 수도사 입구에 있다는 독립지사 최병규 선생 추모비를 찾아왔다.
하지만 해당 번지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의령군 용덕면 이목리 536-2 수도사 입구이다.
독립지사 최병규 선생 추모비
눈서리 지난 뒤에 비로소 송백의 지조를 알고 어려운 일 겪은 뒤에 장부의 기상을 안다함은 어찌 옛과 오늘이 다르리오.
신덕산 정기 짙은 경남 의령군 용덕면 이본리에서 1881년 10월 28일 최학순옹의 3남으로 태어난 선생은 관은 경주요 명은 병규로 봉조 고운 최치원 선생의 30세손이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했고 향리에서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남달리 출중하여 가혹했던 일제의 탄압을 부구하고 민족혼의 회복과 문맹의 퇴치를 위하여 동구에 교회당을 건립하고는 미국인 선교사를 초빙하여 이를 맡겼다.
1919년 3월 4일 이 고장의 독립지사 구여순
선생은 이화경 동지와 함께 서울에서 독립선언문 한 장을 양말 속에 숨겨와 최정학, 정용재, 남종혁 제씨와 강제형 용덕면장을 만나 동년 3월 13일 의령읍내 시일 오후 1시를 기하여 우리 고장에서도 독립만세의거를 감행키로 모의하고는 당일에 배부할 독립선언문 등사의 책임을 최병규, 전용선 두 분에게 맡겼으니 동지와 함께 불철주야로 이를 장성한 선생은 자진해서 야음을 틈타 의령군 전역의 뜻있는 인사에게 거사연락과 아울러 유인물을 돌렸고, 두려움 없이 3월 13일 의령읍내 시장에 모인 군중들에게도 쪽지를 살포하면서 행동을 선도하였으니 궐기한 군민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의대같은 함성은 천지를 뒤덮었으며 임시로 가설한 연단에선 구여순 선생과 남종?씨의 일제 기만에서 벗어나 조국독립이 이뤄질 때까지 우리는 최후의 일각까지 목숨을 걸고 투쟁하자라는 절규에 여기 저기서 합세한 인원 수는 때마침 호응해서 달려온 의령보통학교 학생을 합쳐 삽시간에 무려 3천여 명이 노도로 변하였고, 만세운동은 시일 당일은 물론이고 3월 15일에는 향교 앞에서 또는 집에서, 거리에서 봄비내리는 산마루에서 수삼일로 계속되었으니 실로 청사에 길이 빛날 장거였지만, 급파된 왜병에게 검거된 100여 명이 겪은 고문은 형언키 어려운 절치의 참상이었다. 동지 30여 명과 같이 재판에 회부된 선생은 그해 7월 25일 전용선씨와 동량인 1년 징역의 선고를 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뒤 출오갛였으나 악형의 여독으로 누년 신음 끝에 조국광복의 그날을 끝내 보지 못한 채 1931년 7월 15일 50세가 되는 해에 애국단심으로 점철된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