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이목리 48-3
- 탐방로그
- 경남 의령군 용덕면 이목리 639-11 애국지사 최병찬(최광) 묘소 안내판을 찾았다. 안내판의 주소는 원래 이목리 48-3이었는데 48-2로 바뀌었다. 다만 정확한 주소는 48-3이 맞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먼저 용덕면 이목리 48-3이다.
도지부 주사 석주 경주최공 병찬(광)지묘
애국지사 석주 최병찬 선생 지묘
선생의 관향은 경주최씨로 호는 석주요 자는 찬옥이시며 휘는 병찬으로 1882년 4월 10일 염순공과 남평문씨 사이에서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일찍이 송계 전규진 공과 우당 조재학 공에게 수학하셨고 연재 송병준 선생에게 사사를 하셨다. 1907년 보성전문경제과를 졸업하신 뒤 대한제국 도지부판임관에 서임되셨고 이어서 모교에서 2년간 교수를 역임하셨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노골화되자 교남교육회를 조직하시고 대동청년단에 입단하시는 등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운동에 투신하면서 모든 관직을 버리신채 최광으로 변명하시고 도산 안창호 백산 안희제 선생을 비롯하여 이극로 이갑 신채호 김동삼 서초 선생 등 애국지사들과 뜻을 같이하여 시베리아로 망명하시어 신한민보 독립순보 발행의 책임을을 맡기도 했으며 세계 열강국 원수들에게 일제 강점을 규탄하고 조국독립을 위한 국제적 지원을 호소하는 청원문(성명회 선언문)을 전달하는 등 크게 활약을 하셨으니 1919년 신병 악화로 환국하시어 동래 범어사에서 안준상 공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차도가 없자 고향집으로 오셔서 정양하시던 중 1918년 11월 25일 한많은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37세이셨다. 이에 송계공의 시문에 이르되 「3군의 병력은 빼앗을 수 있어도 그대의 뜻은 가히 뺏지 못할 것이고 여섯마리 말은 따라갈 수 있지만 그대의 진보는 따라갈 수 없도다」라고 했다. 더구나 선생의 외아들이신 공렬씨도 진주고보 재학 중 일본학생들과의 대립 끝에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부자분이 모두 항일투사로서 거룩한 삶을 마감하신지라 제씨 병기공의 아드님이신 윤두공을 양자로 삼아 후사를 이으셨다. 선생은 민족사의 암흑기를 맞이하여 일생의 부귀안락을 생
각치 않으시고 오로지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평생을 다 바치신 항일애국지사이셨으니 선생의 숭고한 애국혼은 역사와 더불어 면면히 이어져 빛나게 될 것이요. 후진들에게는 영세불망의 사표로서 추앙을 받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1994년 4월 13일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서기 2000년(경진) 4월 일
비문 선령문화원장 허백영 근찬 선정 전무수 근서
경주최씨 관가정공파 종중 건립
배 광산김씨 인악 자 공렬 양자 윤두 손 길성 용성 증손 진 홍진 유진
서기 2000년(경진) 4월 일
비문 선령문화원장 허백영 근찬 선정 전무수 근서
경주최씨 관가정공파 종중 건립
배 광산김씨 인악 자 공렬 양자 윤두 손 길성 용성 증손 진 홍진 유진
이목리 48-2를 확인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가 보았다.
이곳이 이목리 48-2이다. 안내판 주소를 잘못 변경한 것 같다.
의령군 용덕면 이목리 639-11 애국지사 최병찬(최광) 묘소 안내판을 찾았다.
주소가 예전에는 이목리 48-3이었는데 48-2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