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83
- 탐방로그
-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83 설뫼충효테마파크에 항일고난체험관과 백산 안희제 기념관이 위치한다. 기념관에는 선생의 동상과 각종 설명 안내판, 선생이 운영했던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모형 등 여러 전시품들이 자리하고 있다. 또 선생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던 인물들인 백범 김구, 문파 최준, 그리고 친척이던 안효제, 안창제와의 일화도 살펴볼 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독립운동가"
송은 안창제(1866~1931) : 안희제의 친척동생
● 송은 공은 1866년(고종 3년)에 출생하였고 자는 중양, 호가 송은이며 18세에 무과 급제하여 용양위사과에 오름.
● 을사늑약 이후 청참오적 상소로 옥고를 겪고 형인 수파공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1년 65세로 기세하신 애국지사임.
송은 안창제(1866~1931) : 안희제의 친척동생
● 송은 공은 1866년(고종 3년)에 출생하였고 자는 중양, 호가 송은이며 18세에 무과 급제하여 용양위사과에 오름.
● 을사늑약 이후 청참오적 상소로 옥고를 겪고 형인 수파공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1년 65세로 기세하신 애국지사임.
"제헌 국회의원"
군산 안준상(1897~1994) : 안희제의 조카
● 자는 민흥이며 호는 근산이고, 연파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일본 동경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유학하고 신문학을 연수함.
● 조국광복을 위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조달책을 맡았으며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고 의령협동조합을 설립하여 12년간 운영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기도 함.
서상일, 곽상훈, 김정설 등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48년 의령에서 제헌 국회의원에 피선되었고, 조국 광복과 민주 정치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 받음.
군산 안준상(1897~1994) : 안희제의 조카
● 자는 민흥이며 호는 근산이고, 연파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일본 동경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유학하고 신문학을 연수함.
● 조국광복을 위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조달책을 맡았으며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고 의령협동조합을 설립하여 12년간 운영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기도 함.
서상일, 곽상훈, 김정설 등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48년 의령에서 제헌 국회의원에 피선되었고, 조국 광복과 민주 정치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 받음.
白山貿易株式會社(백산무역주식회사)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83 설뫼충효테마파크
설뫼충효테마파크
항일고난체험관이 있어서 찾았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백산 안희제기념관도 있었다.
항일고난체험관이 있어서 찾았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백산 안희제기념관도 있었다.
설뫼충효테마파크안내지도에 표되어있던 백산 안희제기념관
백산 안희제 기념관
백산 안희제선생
"차시양백오등양인"
백범 김구
● 모스크바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귀국길에 상하이에 들러 대한민국임시정부 용인들을 만난 안희제.
이때 김구 주석은 안희제에게 국내정세에 대해 물었고 안희제는 "국내의 기장은 해이하고 변절자가 많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애국사상이 있다는 사람도 [정감록]의 '양백지간에 가활만인' 만 안일하게 찾고 앉았다"고 대답하며, "세인구구 양백지간(세상 사람들이 말끝마다 양백지간 운운한다)" 이라고 하자, 김구는 안희제의 손을 잡으며 "차시양백오등양인(양백지간은 바로 우리 둘이다)"라고 하면서 "백범의 '백'과 백산의 '백'을 합하면 양백이니 우리 두 사람이 장차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구하자"고 말했다.
● 해방이 되고 임시정부가 환국한 후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은 안희제와 유가족의 안부부터 물었다고 한다. 백범은 백산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목놓아 통곡을 했다. "상해임시정부와 만주독립운동자금의 약 60%가 백산 안희제의 손을 통해 나왔다"
백범 김구
● 모스크바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귀국길에 상하이에 들러 대한민국임시정부 용인들을 만난 안희제.
이때 김구 주석은 안희제에게 국내정세에 대해 물었고 안희제는 "국내의 기장은 해이하고 변절자가 많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애국사상이 있다는 사람도 [정감록]의 '양백지간에 가활만인' 만 안일하게 찾고 앉았다"고 대답하며, "세인구구 양백지간(세상 사람들이 말끝마다 양백지간 운운한다)" 이라고 하자, 김구는 안희제의 손을 잡으며 "차시양백오등양인(양백지간은 바로 우리 둘이다)"라고 하면서 "백범의 '백'과 백산의 '백'을 합하면 양백이니 우리 두 사람이 장차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구하자"고 말했다.
● 해방이 되고 임시정부가 환국한 후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은 안희제와 유가족의 안부부터 물었다고 한다. 백범은 백산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목놓아 통곡을 했다. "상해임시정부와 만주독립운동자금의 약 60%가 백산 안희제의 손을 통해 나왔다"
"백산, 준을 용서해주게"
문파 최준
● 독립유공자, 경주 최부자 12대손.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고 백산상회를 설립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해방 후에는 전재산을 기부하여 현재의 영남대학교를 설립.
● 최준은 자신이 안희제에게 건넨 독립운동자금이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정확하게 전달된 사실을 그가 순국한 후에야 알게되었다.
● 6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최준은 마침내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경교장 2층 마루로 나가 남쪽으로 난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경남 의령의 안희제 묘소 쪽을 향해 목놓아 울며 말했다.
"백산! 준을 용서해 주게! 내가 준 자금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절반이라도 전달되었으면 다행으로 늘 생각한 준을 용서해주게"
문파 최준
● 독립유공자, 경주 최부자 12대손.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고 백산상회를 설립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해방 후에는 전재산을 기부하여 현재의 영남대학교를 설립.
● 최준은 자신이 안희제에게 건넨 독립운동자금이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정확하게 전달된 사실을 그가 순국한 후에야 알게되었다.
● 6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최준은 마침내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경교장 2층 마루로 나가 남쪽으로 난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경남 의령의 안희제 묘소 쪽을 향해 목놓아 울며 말했다.
"백산! 준을 용서해 주게! 내가 준 자금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절반이라도 전달되었으면 다행으로 늘 생각한 준을 용서해주게"
"임진왜란 의병"
지헌 안기종[1556~1633] : 안희제의 선조
● 자는 응회, 호는 지헌, 본관은 탐진임. 조선중기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봉사에 임명되고 군자감 판관에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곽재우의 지휘를 받아 유곡.영천.화황산에서 전공을 세움.
● 입산마을의 창시자로 전해지며 마을입구 효충원에 안기종 선생의 휴허비인 이충각이 있음.
지헌 안기종[1556~1633] : 안희제의 선조
● 자는 응회, 호는 지헌, 본관은 탐진임. 조선중기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봉사에 임명되고 군자감 판관에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곽재우의 지휘를 받아 유곡.영천.화황산에서 전공을 세움.
● 입산마을의 창시자로 전해지며 마을입구 효충원에 안기종 선생의 휴허비인 이충각이 있음.
"독립운동가"
수판 안효제(1850~1916) : 안희제의 친척형
● 한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흥. 자는 순중임. 1883년(고종 20년)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 지평을 지내다 관황녀가 고종의 총애를 받아 군령군에 봉해지는 한편, 위복을 전단하자, 그녀를 벨 것을 상소하여 고종의 분노를 사서 제주 추자도에 유배됨.
● 이후 1894년 전라남도 임자도로 옮겨진 뒤 곧 귀양이 풀리고 을미사변 이후 민비가 시해되고 왕후폐위조칙이 내려지가, 참판 이용원, 최익현과 더불어 민비의 복위를 건의하였고, 또한 단발령을 적극 반대함.
●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당하자 산중에 들어가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순국함.
수판 안효제(1850~1916) : 안희제의 친척형
● 한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흥. 자는 순중임. 1883년(고종 20년)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 지평을 지내다 관황녀가 고종의 총애를 받아 군령군에 봉해지는 한편, 위복을 전단하자, 그녀를 벨 것을 상소하여 고종의 분노를 사서 제주 추자도에 유배됨.
● 이후 1894년 전라남도 임자도로 옮겨진 뒤 곧 귀양이 풀리고 을미사변 이후 민비가 시해되고 왕후폐위조칙이 내려지가, 참판 이용원, 최익현과 더불어 민비의 복위를 건의하였고, 또한 단발령을 적극 반대함.
●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당하자 산중에 들어가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순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