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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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25-1
탐방로그
경남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25-1 솥발산공원묘원(솥발산을 한자로 쓰면 정족산이다)에는 애국지사 한흥교 공의 묘(C-6-29), 애국지사 김인호 공의 묘(B-11-31), 애국지사 김말복 공의 묘(C-2-33) 총 세 분의 묘가 이 곳에 있다. 애국지사 한흥교 선생(부산 최초 양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의 묘소는 한형석 선생(광복군가를 작곡한 독립운동가)의 묘소 바로 뒤에 있었다. 둘은 부자 지간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청주한선생 형석지묘

입구에 서있었던 한형교선생의 장남이시면서 광복군가를 작곡한 애국지사 한형석의 묘
일월은 자연의 광명이요 지사 의인은 인간의 들불이니 천지만물은 해와 달의 운행으로인해 조화를 이루고 인류역사는 지조와 의리로 말미암아 바르게 나아감이라 우리는 여기 청석을 세워 한형석선생의 불굴의 절의와 티없는 인품 그리고 낭만이 가득한 삶의 일단을 새겨 길이 우러러 보려한다. 선생의 중국명은 한유한이요 필명은 한서한희요 호는 먼구름 원운 유운 옥봉이며 본관은 청주인데 애국지사이신 아버님 동행 한흥교공과 어머니 이인옥여사의 차남으로 서기 1910년 2월 1일에 동래교동에서 태어나니 그 선대의 세계는 이 가족묘지안의 부조의 묘비문에 소상하다. 북경에 망명중인 아버님을 찾아 오세때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고곳에서 초중고급 학교를 거
쳐 신화예술대학에 입학하기위해 상해로 떠날적에 아버님이 주신 한폭의 태극기와 한주머니의 모국 흙을 종신토록 소중히 간직하였다. 위대학을 고학으로 졸업한후 1933년 가을부터 중국대륙을 전전하면서 항일군가를 작곡하기 시작하고 '여나' '아리랑'등 수많은 가극작품을 창작연출 주연하여 항왜의식을 고취하였으며 때로는 김구주석과 장개석위원장을 초대하여 격찬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39년 6월에 중국 서북집단군 정치부 공작대장에 임명되어 산서 중조산에 침입한 일본군 소탕전에 참전하고 이어 전사공작 간부훈련단 교관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용사' '동포는 우리를 기다린다'등의 연극을 공연하였다. 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교관으로 임명되어 44년 10월에는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에 취임하였으며 익년 8월에 한미합작OSS특공작전의 훈련을 이수한후 국내 침투작전 대기중 8.15광복을 맞았다. 실로 춘풍추우 10성상동안 풍찬노숙의 연속이었다. 48년 9월 광복의 감격을 안고 환국한후 자유아동극장및 색동야학원을 설립하여 걸식아동을 교화하였으며 초대 부산 문화극장과 부산대학교 문리대교수및 광복회 부산지회장을 역임하면서 고장문화창달과 영재의 교육및 불우한 독립유공자돕기에 심혈을 기울렸으며 정년퇴임후에도 시내 각대학에서 젊은이 못지않은 정열과 낭만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996년 6월 1일 향년 87세로 서거하셨다. 정부에서는 대통령표창과 국민훈장 목련장및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고 지금 자녀들이 정성을 모아 묘비를 세우니 선생의 위업에 보답하는 길이라 하겠다. 선생의 티없는 맑은 인품 굽히지 않는 지조 변함없는 나라사랑은 겨레역사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입구에 서있었던 한형교선생의 장남이시면서 광복군가를 작곡한 애국지사 한형석의 묘

애국지사 한형석 공의 묘
애국지사 한형석 공은 1910년 2월 21일 부산 동래에서 출생하였으며, 1939년 10월에 중경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결성되자 예술조장으로 임명되어 군가인 '한국행진곡', "항전가곡"을 작곡하였으며,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으며, 그는 광복군가집 1,2집을 발간하고 국가가, 광복군 제2지대가 등 항일가곡을 작곡하였다. 1944년 10월 그는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에 피임되어 복무하면서 작곡 및 가극 활동으로 침체된 항일정신을 고취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