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말복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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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25-1
탐방로그
경남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25-1 솥발산공원묘원(솥발산을 한자로 쓰면 정족산이다)에는 애국지사 한흥교 공의 묘(C-6-29), 애국지사 김인호 공의 묘(B-11-31), 애국지사 김말복 공의 묘(C-2-33) 총 세 분의 묘가 이 곳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자 일권, 병권
녀 덕자, 귀자, 영주, 영희
손자 준열, 준걸
손녀 현미
종손 태봉
질 중관, 성관, 명철, 영만
상좌 정인찬, 서경조, 이영백, 오경택, 김기호
서 이성백, 이문주
애국지사 김인호 공의 묘(B-11-31), 애국지사 김말복 공의 묘(C-2-33)

애국지사 김인호 공의 묘
〈묘지 위치: B-11-31〉
애국지사 김인호 공은 동래고보의 학생대표로서 부산상업학교 학생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받고 1919년 3월 13일 동래읍 장날을 이용해 동래군청 앞 광장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5백여매의 독립선언서와 대형독립기 및 수백매의 태극기를 시위 군중에게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일본군과 기마경찰이 출동하여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83년 대통령 표창 을 수여하였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7.12.20. 양산시장

애국지사 김말복 공의 묘
〈묘지 위치: C-2-33〉
애국지사 김말복 공은 1939년 양산 통도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의 국체 및 식민통치와 왜곡된 역사를 부정하고 한국의 민족사, 언어, 문학을 교육하여 항일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애국적 인재를 양성 하는데 전력하다 1939년 일경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7.12.20. 양산시장
김말복 선생의 묘소
愛國志士 慶州金公 末福 之墓(애국지사 경주김공 말복 지묘)
겨레의 아픔을 스스로의 아픔으로 알고 저 잔학무도한 왜군이 우리 국토를 강점하여 민족의 생존권이 날로 위협을 당하고 있을 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의연히 구국의 선봉에 섰던 김말복공이 여기 길이 잠드시다. 공의 일명은 수성 불명은 해은이며 본관이 경주로 아버님 김성진 공과 어머님 윤재열 여사 사이에 1909년 6월 25일 통경사 기슭 지산리에서 세째 아드님으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성행이 관후하며 의협심이 강하였고 또한 총명하여 이웃의 촉망을 받으셨다. 공은 항상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해야겠다는 일념으로 1939년 일본
駒澤大學(구택대학)을 졸업한 즉시 귀국하여 통도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3.1운동정신과 국권회복의 민족정신 고취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이 사실을 탐지한 왜경이 학생들의 필기장을 조사하여 증거물로 제시 공은 양산경찰서로 연행되어가 조사를 받고 1942년 4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44년 4월 초에 출옥하셨으나 그 후에도 사상개전이 되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다시 대구형무소로 끌려가 1945년 7월까지 1년 3개월간 잡역부로 혹사 당하셨으니 그 고초가 얼마나 하셨으리. 그 후 8.15 조국광복은 공에게 새로운 용기와 조국에 헌신할 기회를 제공하여 주었으니 교육보국의 일념으로 다시 교육계에 투신 1964년 3월 보광중학교 교장으로 취임 후진양성에 심혈을 경주하시다가 1975년 정년 퇴임하시고 1983년 8월 15일 건국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으신 후 1985년 5월 27일 77세로 타계하셨다. 이제 여기 우뚝 솟은 정족산 정기 어리고 기름진 땅 굽어보이는 곳에 정부의 애국지사묘역 정화사업으로 묘비를 세워 필생을 나라 위해 바치신 공의 지조와 업적을 기리니 길이 길이 겨레의 귀감이 되리.
1985년 을축 11월 23일 양산군수 이두연 수